<25화>
“뭐, 뭐야?”
“비앙카, 숨김없이 제대로 말해보세요. 고백 받은 거 맞죠?”
“누구야? 어떤 애가 고백한 거야? 잘생겼어? 고백은 받아준 거야?”
“루시아 넌 언제 왔어? 아니, 그보다 부담스럽게 왜 이래.”
낯빛이 안 좋았던 비앙카가 너털 웃음을 터트리며 제게 가까이 다가오는 두 사람을 밀쳤다.
“숨기지 말고 말해보세요. 대체 무슨 얘기를 나눈 거예요?”
비앙카가 애써 대답을 피하려 해도 크리스틴과 루시아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비앙카는 잠시 곤란해 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니까 고백 받은 건 맞는데…….”
어머, 어머, 어머.
크리스틴과 루시아가 눈에 불을 켰다. 그 모습이 상당히 부담스러워 비앙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만 벌써 7번째 고백이야.”
“네? 그렇게나 많이 했다고요?”
의외의 소식에 크리스틴과 루시아가 화들짝 놀랐다.
“그래, 뭐… 흔히 소꿉친구라고 해야 하나? 루시아랑 헤르윈처럼 엄청 친한 건 아닌데 부모님끼리 아는 사이라 어렸을 때부터 얼굴을 봐온 사이거든.”
비앙카의 설명은 이러했다.
그 남자는 ‘칼립스 체르빌’로 체르빌 백작가의 차남이었다.
그는 어렸을 적 몇 번 얼굴을 봐온 비앙카에게 어느 순간부터 반하여 2년째 짝사랑 중이었다.
심지어 이번 고백은 아카데미에 들어와서 벌써 두 번째였다. 첫 번째 고백은 입학식 첫날에 이루어졌었다.
비앙카의 간략한 설명을 듣고 크리스틴은 설레다며 아우성을 쳤고, 루시아는 칼립스라는 사람이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순애보네요. 그런 남자 어디 가서 찾기 힘들어요, 비앙카.”
“그럼 뭐해. 내가 관심이 없는데.”
비앙카가 삐뚜름하게 코웃음 쳤다.
“어머, 체르빌 영식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네요?”
“마음에 안 들다마다. 제발 고백 좀 그만했으면 좋겠어.”
루시아는 순간 저도 모르게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사람이 싫다고 하면 좀 알아들어야 할 것 아냐. ‘난 너 같은 남자는 딱 질색이다.’, ‘다음부터는 말도 걸지 마.’라고 해도 못 알아듣는 건지 알아듣지 못하는 척하는 건지 귓등으로도 안 들어.”
“어…….”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크리스틴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루시아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비앙카를 바라봤다.
‘……말이 달라.’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비앙카는 루시아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는 헤르윈을 비난하며 60번 정도 됐으면 받아줄 때도 됐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태도는 그때와 180도 달랐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나한테 들이대는 건지도 사실 잘 모르겠어. 얼굴이 잘생긴 것도 아니고 가문이 뛰어난 것도 아니면서 말이야.”
“하, 하지만 사람이 선해 보이던데요.”
“착한 사람은 찾으려면 많으니까 장점은 아닌 것 같은데.”
비앙카는 단호했다. 크리스틴은 칼립스와 아는 사이가 아닌데도 괜히 그가 안타까워졌다.
“아! 루시아!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던데 혹시 어디 갔다 온 건가요?”
어색해진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크리스틴이 서둘러 이야기 주제를 돌렸다.
그녀는 어색하게 말하다가 루시아 손에 들린 무언가를 발견했다.
“어머, 지갑은 왜 들고 왔나요?”
뚱하니 검술학 수업을 구경하던 비앙카가 고개를 홱 돌렸다.
“아… 잠깐 뭐 살까 싶어서 교실에 들렀다가 왔어.”
“그런가요? 물건은 샀나요?”
“아니, 생각해보니 필요 없더라고. 헛걸음한 거지.”
머쓱하게 웃던 루시아는 비앙카와 눈이 마주쳤다. 비앙카가 눈을 부릅뜨며 강렬한 시선을 보냈다.
‘지갑을 왜 들고 와?’
왜 아리스타 자리나 가방에 지갑을 넣지 않았냐는 물음이었다.
루시아는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비앙카의 시선을 어색하게 피했다.
그러자 비앙카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루시…….”
와아아아아!
비앙카의 목소리가 훈련장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에 묻혀버렸다.
고개를 돌리니 잠깐 쉬는 시간을 가지던 학생들 사이로 보랏빛의 무언가가 일렁였다.
“설마 저건…….”
“오러다.”
함성의 원인은 바로 아리스타가 뿜어내는 오러였다.
그녀는 오거를 해치웠을 때 이후로 다시 오러를 쓸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오러를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리스타를 중심으로 검술학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감탄을 터트렸다.
그중에는 헤르윈도 있었다. 다함께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는 것을 보자 루시아는 씁쓸했다.
“너 어떻게 된 거야.”
소란스러움을 타서 비앙카가 다가왔다.
“왜 지갑을 들고 온 거냐고.”
비앙카는 자리에서 일어난 크리스틴을 흘겨보며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루시아는 왠지 모르게 거부감을 느끼며 슬쩍 옆으로 피했다.
“그냥 아무것도 안하기로 했어.”
“갑자기? 겁이라도 난 거야? 네가 할 수 없다면 내가……!”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저… 이런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뿐이야. 그리고 더 이상 아리스타를 미워하기 싫어.”
한차례 체념한 것 같으면서도 루시아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해 보였다. 근 일주일 만에 찾은 평화였다.
그것이 너무나도 낯설어 비앙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칫-
아리스타를 보던 루시아의 귓가로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은 건가 싶어 고개를 돌렸지만, 비앙카는 뚱한 얼굴로 턱을 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어딘가 모르게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루시아!
그때, 누군가가 루시아를 긴박하게 불렀다. 루시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퍼뜩 들었다.
두 계단 밑에 있던 크리스틴이 황급히 자신에게 손을 뻗는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돌리자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서늘한 칼날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죽음.
본능적으로 머릿속에 죽음이라는 감각이 깊게 새겨졌다.
루시아는 피할 새도 없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날아오는 칼날을 볼 수밖에 없었다.
카가강-!
칼날이 얼굴에 박히기 직전,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또 다른 검이 루시아에게 날아든 칼날을 막아냈다.
스파크와 함께 튕겨 나간 검은 땅 깊숙이 박혔다.
“헉, 허억, 허억…….”
눈앞에 붉은 아지랑이가 선명하게 보였다.
분명 저 멀리 다른 친구들과 있던 헤르윈이 어느새 눈앞에 있었다.
헤르윈이 창백한 안색으로 숨을 헐떡였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사람 죽을 뻔했잖아!”
헤르윈의 분노가 훈련장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사방이 일순간 조용해지고, 그는 고개를 홱 돌렸다.
“루시아! 괜찮아?”
루시아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커다래진 눈으로 헤르윈을 볼 뿐이었다.
분명 색은 다르지만 헤르윈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것은 아리스타가 만들어낸 오러와 똑같았다.
“루시아!”
헤르윈이 루시아의 어깨를 꽉 잡고 흔들자 초점 없는 벽안이 헤르윈의 얼굴로 향했다. 그리고-
“루시아!”
루시아는 의식을 잃었다.
* * *
쉬는 시간이 되자 헤르윈이 땀을 흠뻑 흘리며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 마시곤 수건으로 얼굴을 대충 닦아냈다. 그리고는 훈련장을 둘러싸고 있는 돌계단을 훑어봤다.
돌계단에는 몇몇 학생이 검술학 수업을 구경하고 있었다.
“루시아 찾아?”
뒤에서 히죽거리는 목소리에 헤르윈이 곧바로 팔을 휘둘렀다.
브라이언이 가볍게 헤르윈의 공격을 피했다.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 되지 주먹을 휘두를 건 뭐람.”
“징그럽게 뒤에서 다가오지 마.”
“내가 뭘? 그냥 궁금해서 물은 건데.”
“보니까 루시아가 자리 비운 지 얼추 20분이 다 돼가더라.”
“음? 그래? 생각보다 오래됐네?”
뒤늦게 다가온 에단이 루시아의 부재에 대해 말해주었다.
헤르윈이 인상을 찌푸리며 크리스틴만 있는 돌계단을 바라봤다. 그의 붉은 눈이 우수에 잠겼다.
그것을 보고 브라이언이 능글맞게 웃었다.
“대체 루시아랑 언제 화해할까 몰라.”
헤르윈이 순식간에 얼굴을 굳히며 브라이언을 노려봤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화해하라고. 중간에 낀 우리는 대체 무슨 죄냐?”
“맞아, 숨 막혀 죽겠어. 맨날 루시아만 쳐다보면서 왜 화해할 생각을 안 해?”
“내가 언제…….”
“언제긴 언제야. 지금도 그러고 있고만.”
“너도 참 사람이 솔직하지 못해.”
농담인지 진담인지 브라이언과 에단이 헤르윈의 심기를 계속 자극했다.
입을 열려던 헤르윈은 짜증 섞인 한숨을 푹 내쉬며 말없이 그들에게서 빠져나왔다. 뒤에서 두 사람이 헤르윈을 불렀지만, 그는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오오오!”
“나온다! 나온다!”
아리스타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그녀가 쥐고 있는 검에서 옅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른 것이 원인이었다.
그것이 오러임을 직감한 헤르윈이 눈을 휘둥그레 키우며 다른 아이들과 함께 서둘러 아리스타를 구경했다.
아리스타의 숨이 거칠어지고, 이마에서 구슬땀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다시 눈을 부릅떴다.
검이 부르르 떨리더니 그녀의 눈동자와 비슷한 보랏빛 오러가 촤악! 하고 뿜어져 나왔다.
“돼, 됐다!”
“우와! 진짜 오러야!”
“소문이 사실이었어!”
아리스타를 포함한 모든 학생이 커다란 환호성을 내질렀다. 아리스타가 활짝 웃으며 자신의 오러를 둘러싼 검을 자랑했다.
“아리스타! 이거랑 한번 부딪쳐 보자!”
그때, 한 남학생이 진검을 들고 왔다. 오러를 둘러싼 검은 장인이 만들어낸 명검이나 같은 오러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잘라낸다는 속설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과연 아리스타의 오러가 진짜 검을 잘라낼지 궁금했다.
“그래, 한번 해보자. 위험할 수 있으니 모두 뒤로 물러나.”
아리스타의 말에 빽빽하게 모였던 주변으로 공간이 생겼다. 특히 아리스타가 검을 휘두를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모르니 일부러 피한 것이었다.
“과연 검이 진짜로 잘릴까?”
“헤르윈, 넌 어떻게 생각해?”
“이론대로라면 나무토막처럼 썰리겠지.”
붉은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그 안에는 흥분과 호승심이 가득했다.
“자, 간다!”
아리스타 맞은편에 있는 남학생이 검을 꽉 쥐며 아리스타에게 검을 휘둘렀다.
아리스타는 당연히 그가 공격해오는 반대 방향으로 똑같이 검을 휘둘렀다.
검이 맞부딪쳤음에도 검끼리 부딪칠 때의 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그저 부드러운 물체를 베는 것처럼 오러를 휘두른 아리스타의 검이 상대방의 검을 반으로 잘라냈다.
그 잘려나간 날이 오러의 영향 때문인지 비워둔 공간으로 맹렬하게 날아갔다. 그리고 그 날은…….
“루시아!”
어느새 돌아온 루시아에게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잘린 검날이 그녀가 있는 곳으로 날아가는 것을 발견한 에단이 황급히 루시아의 이름을 불렀다.
의도치 않게 검을 잘라낸 아리스타와 아이들 사이에 있던 브라이언이 서둘러 루시아에게 가려 했다.
하지만, 그들보다 날아가는 검날의 속도가 더 빨랐다.
“안-!”
브라이언이 다급하게 손을 뻗던 것도 잠시 갑자기 옆에서 불어오는 돌풍에 옆으로 밀려났다.
카가강-!
이윽고 검끼리 맞부딪치는 소음이 들렸다.
“어?”
브라이언이 멍청한 소리를 내며 소음의 근원지를 바라봤다.
불과 몇 초 전만 해도 자신의 옆에 있던 헤르윈이 어느새 루시아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몸에서는 붉은 오러가 크게 일렁였다.
브라이언이 멍하니 헤르윈을 보다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헤르윈이 서 있던 자리에 발자국이 깊게 파여 있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사람 죽을 뻔했잖아!”
우렁찬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헤르윈의 분노는 이 사태를 만든 남학생과 아리스타, 그리고 헤르윈, 본인에게도 향해 있었다.
헤르윈이 아니었다면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를 사고.
모든 이가 얼어붙어 있을 때, 헤르윈은 서둘러 루시아의 상태를 살폈다.
그토록 바라던 오러를 각성하게 되었는데도 그의 온 신경은 루시아에게 쏠려 있었다.
“루시아!”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루시아가 헤르윈의 품에서 기절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