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친구들 가운데에 특히 아리스타가 안절부절못하며 루시아의 눈치를 봤다.
아리스타는 헤르윈에게만 들리게 작게 속삭였다.
“……혹시 나 때문에 그런 거야?”
헤르윈이 루시아를 찾아가기 전, 아리스타는 자신에 대해 잘 얘기해달라고 말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리스타 때문이라…….’
따지자면 그녀가 연관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루시아와 다퉜을 때 나갔던 말투와 비교될 정도로 퍽 다정했다.
루시아도 그것을 느꼈는지 몸을 움찔 떨며 더더욱 팔 사이로 머리를 묻었다.
“자, 모두 자리에 앉아라.”
모두가 루시아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 타이밍 좋게 교수님이 들어왔다. 친구들은 하는 수 없이 각자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앞자리에 앉은 에단과 크리스틴이 연신 뒤를 힐끔거리며 루시아의 눈치를 봤다.
“거기, 뒤에 엎드려 있는 사람 누구야.”
교수가 책상에 엎드린 루시아를 지적하자 루시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이 어느덧 더 부어올라 있었다.
귀신처럼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다고 해도 옆에 있는 헤르윈에겐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도 잘 보였다.
가슴이 답답했다.
“하아…….”
짙은 한숨 소리를 들은 루시아는 주먹이 새하얗게 질리게 꽉 쥐었다.
* * *
훌쩍, 훌쩍.
코를 들이켜 마시는 소리가 먼지 가득한 창고에 울려 퍼졌다.
이곳은 비앙카와 루시아가 비밀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였다.
루시아는 헤르윈과 다퉜던 일을 비앙카에게 털어놓았다.
비앙카는 설마 그런 일이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기에 저절로 벌어진 입을 가렸다.
“헤르윈이…… 이제 나를 미워하면 어떡하지?”
겨우 진정했던 감정이 다시금 울컥 차올랐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매몰차게 대한 헤르윈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재생됐다.
자신을 내려 보던 그의 눈빛은 명백한 경멸이었다.
루시아도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었다. 본인이 내뱉었으면서도 납득하지 못할 말들뿐이었으니까.
실제로 아리스타는 그렇게 못돼먹지도 않았고, 남자한테 꼬리치는 여우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폄하했던 것은 진짜 그런 사람이길 바라는 마음 때문은 아닐까.
‘아아, 최악이야.’
정말 최악의 인간이다.
질투에 눈이 멀어 할 말 못할 말을 가리지 못하다니.
그동안 남을 멋대로 평가하는 이들을 싫어하다 못해 증오해왔으면서 자신도 그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자신을 본 헤르윈은 오죽할까. 루시아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아리스타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 그러면서도 그녀를 미워하는 자신의 못난 마음이 못내 괴로웠다.
이러고 싶지 않은데도 도무지 제 마음대로 다스려지지 않았다. 더러운 감정으로 얼룩진 마음을 씻겨내고 싶을 뿐이었다.
“헤르윈 참 실망이야. 네가 여태까지 60번 넘게 고백했는데도 받아주지 않는 걸 보고 만만치 않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래도 어떻게 너한테 그럴 수 있어?”
비앙카가 루시아를 대신하여 욕을 했다.
“걔는 소꿉친구인 너보다도 겨우 3달 만난 여자애가 더 소중하다는 거야? 네가 평소 그런 말을 할 애가 아니니까 더더욱 네 말에 귀를 기울여야지.”
루시아는 비앙카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 보는 눈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영 꽝이네. 어떻게 리디아 공녀를 좋게 평가할 수 있는 거지? 아니, 애초에 남자들은 공녀의 어디가 좋은 거래? 외모? 지위? 성격?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잠자코 비앙카의 말을 듣던 루시아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루시아의 미간에 미미한 주름이 새겨졌다.
“지위야 태어났을 때부터 그 유~명한 리디아 공작가에서 태어났으니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외모? 흥, 그 정도는 어딜 가도 널려있다고. 그리고 성격도 그리 좋아보이지도 않더만. 남자애들 앞에서만 털털한 척 다른 여자들과 다르게 마음 넓은 척 하면서도 여자애들이랑 있으면 대화에 제대로 끼지도 않아. 우리랑 급이 다르다는 거야 뭐야.”
한번 터져 나온 불만이 점점 몸집을 불렸다. 그것들은 더 이상 루시아를 위로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간 비앙카가 아리스타에게 쌓여온 불만들이었다.
‘어딘가 이상해…….’
들으면 들을수록 루시아는 비앙카가 잘못됐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쉬이 판단할 수 없었다. 아니, 판단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루시아, 너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야?”
마음껏 쏟아내던 비앙카가 어느새 흥분해서는 눈을 번뜩였다.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뭐가……?”
“이대로 헤르윈을 리디아 공녀한테 뺏길 거냐고.”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걸.”
이대로 아리스타에게 헤르윈을 뺏기긴 싫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헤르윈 옆에서 치워버릴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없긴 왜 없어. 헤르윈이 리디아 공녀가 별로인 사람이라는 걸 일깨워주면 되잖아.”
“……어떻게?”
아리스타는 누가 봐도 참으로 근사하고 멋진 사람인데 도대체 어떻게 그녀를 깎아내린다는 걸까. 하물며 그 사실을 어떻게 증명한다는 건지 루시아는 알 수 없었다.
어리둥절해하는 루시아를 보고 비앙카가 씩 웃었다.
“들어봐, 이렇게 하면…….”
단둘밖에 없는 창고임에도 불구하고 비앙카는 루시아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한참 듣던 루시아가 경악하며 눈을 휘둥그레 키웠다.
“비앙카, 그건……!”
“쉬잇, 우리만 조용히 하면 아무도 몰라. 너는 그냥 사람들 앞에서 아리스타가 도벽이 있다는 걸 밝히기만 하면 돼.”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잖아. 난 못해.”
루시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비앙카의 말대로만 한다면 헤르윈도 그녀에게 실망하겠지만, 이런 비열한 방법은 내키지 않았다.
루시아의 거절에 비앙카가 서늘하게 얼굴을 굳혔다.
“루시아, 너 이대로 영원히 헤르윈 뒤꽁무니만 보고 있을 거야?”
아무런 감정도 품고 있지 않은 다갈색 눈동자가 오싹하게만 느껴졌다.
루시아가 겁에 질려 얼어붙자, 비앙카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정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조금 떨어진 루시아의 어깨를 끌고 와 그녀를 토닥였다.
“일단 헤르윈이 아리스타에게 관심을 끄는 게 최우선이잖아. 그것부터 이루고 나면 분명 헤르윈도 아리스타에 대한 마음을 접고 다시 너를 봐줄 거야.”
“……하지만.”
“벌써 60번 넘게 고백했어. 이 정도면 네 성의를 봐서라도 네 고백을 받아줘야 하는 거 아냐? 그리고 리디아 공녀의 민낯이 까발려지면 헤르윈은 분명 너한테 미안해질걸?”
순간 저도 모르게 귀가 솔깃했다.
“오늘 네가 아닌 리디아 공녀를 믿었으니 그게 거짓말인 걸 알면 분명 너한테 사과할 거야. ‘아,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구나. 부디 용서해줄래? 루시아?’라고.”
당장 넘어가고 싶을 정도로 달콤하기 짝이 없는 유혹이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점점 비앙카와 맞닿은 부분이 벌레가 기는 것처럼 불쾌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니까 내 말만 믿고 너는 실행에 옮기기만 해. 내가 도와줄게.”
처음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던 루시아는 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 * *
조용한 교실, 개별 수업을 듣는 시간이라 교실은 비어 있었다.
루시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조용한 교실에 발을 내디뎠다.
“이걸 아리스타 가방에…….”
루시아의 손에 지갑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바로 루시아, 본인의 지갑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의 지갑을 들고 제 자리가 아닌, 아리스타의 자리에 서성였다.
루시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지갑을 꽉 쥐었다.
‘네 지갑을 아리스타 자리나 가방에 넣어놔. 그리고 지갑이 없어졌다고 난리를 피우고 아리스타 자리에서 사라진 네 지갑을 발견하는 거지.’
아리스타를 헤르윈에게서 떼어내기 위해 비앙카가 생각해낸 작전이었다.
그녀가 이 말을 한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바로 그다음날에 실행하라던 비앙카의 말을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다가 결국 일주일이 흘러버린 것이다.
그 말은 즉, 헤르윈과 다툰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는 말이었다.
루시아는 그 일이 있고 일주일이 흐른 지금까지 헤르윈과 이렇다 할 얘기를 나눠본 적 없었다.
루시아도 헤르윈도 서로의 사이를 풀기 위해 구태여 말을 꺼내지 않아서 지금까지 어색함이 지속되었다.
헤르윈과 이렇게까지 사이가 멀어진 것은 처음이라 루시아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에게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은데 ‘설마 네 잘못을 반성도 안하고 말을 건네는 건 아니지?’라고 말할 것만 같아서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은 지금 반성은 커녕 아리스타의 명예를 실추시킬 일을 도모하고 있지 않은가.
루시아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하나의 자아와 이렇게 해서라도 헤르윈을 네 것으로 만들라는 또 다른 자아가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싸웠다.
루시아는 10분 동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성이다가 결국 눈을 질끈 감고 아리스타 가방에 제 지갑을 넣었다.
그리고는 누군가가 볼까 싶어 서둘러 교실 밖으로 향했다.
“됐어. 이걸로 된 거야…….”
아리스타를 곤란하게 만들기로 했으면 후회하지 않아야 하거늘 루시아의 얼굴은 사정없이 구겨져 무척이나 괴로워 보였다.
복도를 빠르게 나아가던 루시아의 걸음이 점점 느려지더니 결국 멈춰 섰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복도에 한참이나 서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흠~ 흐흐흠~ 흐흠~
옆에서 들려오는 콧노래에 크리스틴이 고개를 돌렸다.
“비앙카,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나 봐요?”
“응? 나?”
“네, 아까부터 계속 웃으시면서 콧노래를 부르고 있잖아요.”
“아… 내가 그랬나?”
“무슨 일이길래 그래요?”
“음…비밀.”
곰곰이 고민하던 비앙카가 씩 장난스럽게 웃으며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크리스틴이 궁금하다며 다시 물어도 비앙카는 연신 비밀이라고 말하며 대답을 피했다.
“그나저나 루시아가 늦네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요?”
화장실에 간다던 루시아가 20여 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점점 시간이 흐르자 크리스틴은 그녀가 걱정됐다.
“루시아가 애도 아니고, 별일 없겠지. 분명 화장실 말고 중간에 어딜 간 걸 거야.”
“그럴까요?”
비앙카의 대답에도 크리스틴은 루시아가 걱정되는지 자꾸만 그녀가 사라졌던 곳을 힐끔거렸다.
비앙카는 옆에서 크리스틴이 루시아를 찾든 말든 다시 코를 흥얼거리며 열심히 검을 휘두르는 헤르윈을 구경했다.
그녀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저기, 비앙카 양.”
비앙카의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가 졌다. 비앙카는 익숙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자, 잠시 얘기 좀 가능할까?”
같은 학년으로 보이는 한 남학생이 얼굴을 붉히며 비앙카가 대답하기만을 기다렸다.
같이 다니는 친구들과 비교하면 엄청 뛰어난 외모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매력적인 외모의 훈남이었다.
누가 봐도 비앙카에게 고백하려는 것 같았다. 옆에 있던 크리스틴이 입을 손으로 가리며 어머머 감탄했다.
하지만, 비앙카는 영 못마땅한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저리가라고 소리 지르려다가 크리스틴뿐만 아니라 몇몇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앞에 있는 남학생을 째려봤다.
“하아…다른 곳에서 얘기하죠.”
영 마땅찮은 기색임에도 남학생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비앙카와 남학생이 사라지고 크리스틴이 실눈을 크게 띄우며 유리구슬처럼 연한 벽안을 빛냈다.
“……크리스틴, 뭐해?”
“루시아!”
루시아가 도착했다. 그녀는 크리스틴의 들뜬 기색을 볼 수 있었다.
“왜 그렇게 들떴어?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루시아, 방금 전에 봤어요? 어떤 남자가 비앙카에게 고백하려는 것 같아요!”
“뭐? 진짜?”
루시아의 얼굴도 크리스틴 만큼이나 확 밝아졌다. 두 소녀는 자기들이 고백이라도 받는 것처럼 설레했다.
“세상에, 고백이라니. 비앙카 대단하다.”
“보면 비앙카도 은근 인기 많지 않아요? 그 왜 저번에도 어떤 남자한테 고백 받았잖아요.”
“맞아, 생각해보면 고백 많이 받는 것 같아.”
“과연 이번에는 받아줄지 궁금하네요. 보니까 사람 괜찮아 보이던데.”
크리스틴과 루시아가 저들끼리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 마침 비앙카가 돌아왔다.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비앙카를 잡아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