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래? 얼른 말해봐.”
“그냥… 그냥 진짜 별거 아닌데…….”
루시아는 말하기를 주저하다가 결국 자신의 불안정한 상태를 털어놓았다.
요 2주 사이, 초반에 이질감으로 시작했던 불길함이 점점 커져 결국 질투로 변했다. 여태 느껴왔던 감정과는 확연히 결이 달랐다.
아리스타와 헤르윈이 대화를 나눌 때, 별다른 얘기는 안 해도 그 안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가 자꾸만 의심하게 되고, 헤르윈과 붙어있는 모습이 보기 힘들어 결국에는 그녀가 보이는 것만으로도 괴로워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감정은 난생처음이라 현재 루시아의 상태론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아리스타는 헤르윈을 구해준 은인인데…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아는 데도. 보고 싶지 않아.”
속으로 끙끙 앓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루시아의 어깨를 비앙카가 꼭 껴안았다.
그녀는 루시아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얼굴을 굳혔다.
“괜찮아. 자연스러운 일이야. 너무 죄책감 가지지 마.”
“이게 진짜 자연스러운 일일까? 내가 너무 못돼서…….”
“아휴, 네가 못되기는 뭐가 못돼. 지금도 봐. 사람 한 명 미워하는 것만으로도 끙끙 앓고 있잖아. 넌 천성이 너무 착해. 사람이 살다 보면 다른 사람을 싫어할 수도 있는 거고, 미워할 수도 있는 거지.”
“하지만, 아리스타는 나한테 아무런 잘못도 안 했는걸…오히려 나를 잘 챙겨준단 말이야.”
아리스타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또한 얼마나 잘 대해줬는지 잘 알기 때문에 그녀를 미워하는 지금 이 마음이 너무나도 괴로웠다.
“그래도 리디아 공녀를 싫어하는 이유가 있지 않아? 예를 들어…….”
헤르윈이 공녀한테 관심을 가진다든지.
비앙카의 말을 듣고 루시아가 얼굴을 굳혔다. 그녀의 추측이 정답이었다.
오직 헤르윈이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이유만으로 아리스타가 미워지고 싫어졌다.
“전에는 헤르윈이 누구를 좋아해도 가만히 있을 것 같다고 했으면서…….”
몇 주 전에 나눴던 대화를 상기시키며 비앙카가 한숨을 내쉬었다.
루시아도 자신이 얼마나 안일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현실은 확연히 달랐다.
짝사랑하는 상대가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태평하게 두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앙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리로는 아리스타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해도 가슴으로는 그녀를 거부하니 이대로 평소처럼 지낼 수는 없었다.
“어떡하긴 어떡해. 네 마음 가는 대로 해야지.”
“마음 가는 대로라면… 아리스타를 멀리하라는 얘기야?”
“그것만으로 네 마음이 편하다면 말이야. 하지만 이건 너와 리디아 공녀만의 일이 아니라 중간에 헤르윈이 끼어 있잖아. 단순히 네가 공녀를 피하는 걸로 해결될 문제가 아닐 텐데.”
“그건 그래…….”
루시아의 어깨가 다시 축 처지자 비앙카가 서둘러 뒷말을 덧붙였다.
“그냥 네 마음 가는 대로 해. 공녀를 멀리하고 싶으면 멀리하는 거고, 가까이 지내고 싶으면 그렇게 하는 거지. 다만, 이거 하나만 명심해.”
비앙카의 다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너는 다른 사람 신경을 너무 많이 써. 다른 사람을 챙기는 것도 좋지만, 네 마음부터 먼저 챙겨. 그러다가 나중에는 너를 돌아볼 힘조차 없을지도 몰라.”
그녀의 말대로 타인을 먼저 돌보는 루시아의 성격은 장점이기도 하지만, 단점이기도 했다.
루시아는 비앙카의 조언을 조용히 속으로 되새겼다.
* * *
비앙카와 이야기를 나눈 후 루시아는 아리스타를 멀리하기로 결심했다.
비앙카가 화끈하게 화라도 내보라고 했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니 결국 최선의 방도로 거리를 두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타를 매번 피할 수는 없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만들어서 그녀와 둘이서만 남는 상황은 만들지 않았지만, 친구들과 다 같이 있을 때나 헤르윈과 함께 셋이 있을 때는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그래도 요 며칠 자신이 피하는 기색을 느꼈는지 매번 스스럼없이 다가왔던 아리스타가 어느 날부터인가 루시아를 어색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눈치를 보며 어떻게든 예전처럼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하는 것이 눈에 보였으나 루시아는 그녀의 마음을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아리스타를 미워하는 마음이 크다고 해도 그녀를 밀어내는 루시아의 마음 또한 좋지 않았다.
헤르윈이 그녀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밀어내는 것이니 당연했다.
자신이 정말 치졸하고 비겁하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루시아는 아리스타를 가까이 둘 수 없었다.
결국 요 며칠 반복되는 루시아의 이상행동을 친구들도 슬슬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해도 루시아는 워낙 거짓말을 잘 못 하고, 얼굴에 감정이 여실히 드러나는 타입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아리스타가 다가왔다.
루시아는 그녀를 보자마자 눈에 띄게 불안해하며 비앙카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 얘들아 미안한데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그래, 갔다 와.”
아리스타가 도달하기도 전에 루시아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비앙카와 함께 떠났다.
헤르윈과 크리스틴 등, 남겨진 친구들이 문밖으로 나가는 루시아를 쳐다봤다.
잠깐의 정적 끝에 브라이언이 아리스타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 혹시 루시아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리스타가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알고 싶다. 루시아가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건지.”
“네가 뭐 속상하게 한 거 아냐? 루시아가 쉬이 누군가를 미워할 사람이 아니잖아.”
“속상하고 말고를 떠나서 루시아랑 대화를 많이 나눠본 적도 없단 말이야. 그냥 간단한 안부 인사랑 시답잖은 얘기만 했는데…….”
“확실히 요 며칠 루시아의 행동이 이상하긴 했죠.”
“비앙카는 뭐 알고 있는 것 같기는 하던데… 크리스틴, 너는 전해 들은 거 없어?”
에단의 질문에 크리스틴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이곳에서 루시아의 의중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대체 왜 그러는 것인지 이유라도 알면 좋으련만 그것을 모르니 답답하기만 했다.
지금 이 상황이 제일 답답한 아리스타가 한숨을 푹 내쉬며 헤르윈에게 물었다.
“헤르윈, 넌 아는 거 없어?”
“나도 몰라.”
“너는 소꿉친구라는 애가 그런 것도 몰라서 어떡해! 당장 알아 오란 말이야!”
아리스타가 작게 성을 내며 헤르윈을 타박했다.
“하아, 이대로 루시아랑 멀어지기 싫은데. 겨우 친해진 거란 말이야! 내가 뭘 잘못했는지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아리스타가 울상을 지었다.
아리스타는 입학 첫날부터 루시아와 친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같은 반인 것을 제외하고는 생각보다 접점이 없고 대화를 나눌 기회조차 없어서 친해지기 힘들었다.
최근 들어 헤르윈과 에단, 브라이언 등을 통해서 조금씩 가까워지고. 헤르윈을 구해줌으로써 이제는 친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대체 어디서 꼬여버린 걸까.
“헤르윈, 네가 어떻게 좀 해봐. 나 진짜 이대로 루시아랑 멀어지기 싫어.”
아리스타가 두 손을 모으며 헤르윈에게 부탁했다. 헤르윈은 가까이 다가오는 아리스타를 살짝 피하다가 입을 꾹 다문 그녀의 표정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래, 내가 한번 물어볼게.”
“아싸! 꼭! 꼭 물어봐야 해, 알겠지? 그리고 만약 내가 뭔가 잘못한 거면 꼭 알려줘. 그래야 고치지.”
“알겠으니까 얼굴 좀 그만 들이대.”
어느덧 아리스타의 얼굴이 가까워져 있었다. 헤르윈이 거리를 두자 아리스타는 군말 없이 물러섰다.
덜컹-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덧 돌아온 루시아와 비앙카가 있었다.
비앙카가 약간 인상을 구기며 루시아에게 무언가 속삭였고, 그럴수록 루시아의 낯이 점차 어두워졌다.
“루시아! 화장실 갔다 왔어?”
루시아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아리스타가 애써 최대한 밝게 그녀를 맞이했다.
하지만, 루시아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다시 교실을 벗어났다.
마치 울 것 같은 표정이어서 다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 뭐 또 잘못한 거야?”
아리스타가 이번엔 뭘 잘못했나 싶어 친구들을 돌아봤지만, 그들은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헤르윈, 네가 봤을 때는 어때?”
“……나 루시아한테 갔다 올게.”
헤르윈이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루시아의 뒤를 따라갔다. 아리스타는 엉거주춤 헤르윈을 따라 문가까지 따라갔다.
비앙카가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헤르윈을 슬쩍 보다가 문 앞에 서 있는 아리스타를 흘겨봤다.
“여우 같은 것.”
작은 소리였지만, 바로 옆에 있는 아리스타는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아리스타는 혹시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인상을 찌푸리며 옆을 돌아봤다.
아리스타를 노려보던 비앙카는 가소롭다는 듯 비웃음을 흘린 뒤, 미소를 지으며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워낙 순식간에 태도가 돌변했기에 아리스타를 제외하고는 비앙카의 변화를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뭐야?”
기분이 확 나빠진 아리스타가 인상을 찌푸렸다.
루시아 일행과 친해지고 난 다음부터 비앙카는 왠지 모르게 자신을 경계하며 다른 사람들 모르게 제 기분을 자극하는 행동을 많이 했다.
언제 한 번은 그런 비앙카의 행동에 화라도 낼까 했지만, 루시아와 친하게 지내는 몇 안 되는 사람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겨우 비앙카 한 명 때문에 루시아와 또다시 사이가 멀어질 수는 없으니 말이다.
아리스타는 찝찝한 마음을 뒤로하고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 * *
루시아는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애써 억누르며 황급히 빠른 걸음으로 교실에서 멀어져갔다.
방금 전, 아리스타와 헤르윈은 누가 봐도 다정한 연인 같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두 사람은 지독히도 잘 어울렸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철렁거리는데 키스라도 할 것처럼 가까운 두 사람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저거 분명 너 보라고 하는 행동일 거야. 봐, 너를 비웃고 있잖아.’
비앙카의 말이 거짓말이길 바랐지만, 자신을 향해 웃는 아리스타의 표정은 비웃음에 가까웠다.
‘헤르윈… 너 정말로 아리스타를 좋아하는 거야?’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차마 내뱉지 못하고 목 언저리에 맴돌았다.
헤르윈이 정말로 그녀를 좋아한다면,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맞다면.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루시아.”
입가를 가리고 얼굴을 일그러트리던 루시아는 뒤에서 잡아채는 강한 힘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바로 앞에 지금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이가 서 있었다.
“……너 울어?”
헤르윈이 크게 당황했다. 요 며칠 그녀의 행동이 이상해서 따라온 것이었는데 루시아가 울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울기 직전이었다. 푸른 벽안에 물기가 한가득 차올라서 톡 건드리면 눈물을 쏟아낼 것 같았으니까.
당황하던 것도 잠시, 헤르윈은 인상을 구겼다.
“누구야.”
“어?”
“누구 때문에 우는 거냐고!”
헤르윈은 화를 내고 있었다. 그것도 진심으로. 그가 이리 화를 내는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덕분에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루시아의 눈물이 자취를 감춰도 헤르윈의 가슴팍은 분노로 연신 오르락내리락했다.
“당장 말해. 대체 어떤 녀석이 널 울렸어?”
“……내가 우는 게 신경 쓰여?”
“당연하지! 하나뿐인 소꿉친구가 우는데 신경 안 쓰는 사람이 어딨어!”
그가 화를 내면서까지 걱정해주는 것이 가슴이 떨릴 정도로 좋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을 여전히 소꿉친구로만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루시아가 다시 얼굴을 일그러트리자 헤르윈은 답답한지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아무리 루시아가 순진하고 착하다고 해도, 쉽게 눈물을 보이는 편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우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지금 상황이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다.
헤르윈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잠재우며 루시아의 어깨를 잡아 눈높이를 맞췄다.
“괜찮으니까, 얼른 말해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루시아는 입을 달싹였다. 과연 그에게 자신이 현재 겪고 있는 감정들을 털어놓아도 되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루시아.”
헤르윈이 다시 한 번 루시아를 불렀다.
루시아는 겨우 헤르윈과 눈을 맞췄다.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가 사뭇 진지했다.
그것이 마음을 자극해 다시금 울컥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