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129)

<20화>

“아리스타, 너무 무리하지 마.”

그때, 뒤편에서 아리스타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루시아와 친구들은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리스타는 준비된 수건과 담요로 낮아진 체온을 높이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아리스타, 괜찮다면 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줄 수 있겠니?”

한 교수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아리스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목표지점까지 가던 도중에 갑자기 비가 왔어요.”

아리스타는 천천히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웬만하면 그냥 가려고 했는데 예상보다 많이 쏟아져서 어떻게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철수하라는 신호탄이 쏘아지더군요.”

비가 쏟아지자 더 이상 실습평가를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한 아카데미 측은 신호탄을 쏴서 학생들이 철수할 수 있도록 했다.

아리스타도 신호탄을 똑똑히 봤다.

“그래서 서둘러 철수했죠. 내려가는 길에 우연히 헤르윈을 만나서 같이 가려고 했는데 중간에… 오거를 만났어요.”

주변에서 숨을 급히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브라이언과 에단이 확실히 봤다고 했을 때도 믿지 못했던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헤르윈이 먼저 오거를 발견해서 저를 보호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헤르윈이 큰 부상을 입었고요.”

듣기만 해도 심장이 철렁거리는 말에 루시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한 명이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에서 몬스터를 따돌리고 여기까지 온 것이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긴박한 상황인데 무사히 돌아왔구나.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마주친 오거는 어떻게 됐니? 무사히 따돌리고 온 게냐?”

교수들은 헤르윈과 아리스타가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며 남은 오거가 어떻게 됐을지 걱정했다.

아리스타는 잠시 입을 달싹이다가 주변 눈치를 봤다. 그녀는 무언가 말하기 주저하는 것처럼 보였다.

“괜찮으니 어서 말해보렴.”

오거를 마주쳤다는 충격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교수가 아리스타의 등을 토닥였다.

그럴수록 아리스타의 얼굴이 조금씩 붉어졌다.

“그게 사실은……오거를 해치웠어요.”

뒤이어 따라온 말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뒤늦게 기함을 토했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반응에 아리스타는 괜히 눈을 굴렸다.

“허…세상에 오거를 해치우다니. 대단하네요.”

“어떻게 된 거지? 혹시 헤르윈이 오거를 해치운 건가?”

크리스틴과 비앙카가 술렁거렸다. 그들 옆에 있던 루시아도 눈을 크게 뜨며 아리스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대체 누가 오거를 해치운 거니? 오거는 그리 쉽게 해치울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다. 적어도 실전 경험이 많은 숙련된 기사나 소드 익스퍼트의 경지에 다다른…….”

놀란 나머지 횡설수설하던 한 교수가 말을 하다 말고 아리스타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 커져 있었다.

“설마… 오러를 쓸 수 있게 된 거니?”

아리스타가 주변 눈치를 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작긴 해도 긍정의 표시였다. 이번엔 또 다른 의미로 주변이 어수선해졌다.

오러를 쓸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바로 소드 익스퍼트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소리였다.

“어떻게 오러를 쓸 수 있게 된 거지?”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저 오거가 헤르윈을 해치려고 하니까 저도 모르게 몸이 먼저 나가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오거는 이미 쓰러지고 난 뒤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아리스타의 옷에 몬스터의 녹색 피가 튀어있었다.

처음에는 풀물이 들었나 싶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오거를 확실히 해치우고 내려오는 길이겠구나.”

“네, 맞아요. 아무래도 비 때문에 길이 미끄럽기도 했고, 헤르윈이 많이 다쳐서 오는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아니다,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하지. 오거를 만나서 많이 놀랐을 텐데 쉴 시간도 주지 않고 물어봐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당연한 일인걸요. 콜록, 콜록… 교수님, 헤르윈은 좀 어떤가요?”

“지금 응급처치하고 있단다. 좀 있다가 바로 아카데미로 옮길 예정이야. 너도 이제 안심하고 푹 쉬렴.”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아리스타는 교수에게 이끌려 천천히 들것에 누웠다. 등이 천에 닿자마자 아리스타의 눈가가 가물거렸다.

이제 막 잠에 빠져들려던 그녀는 교수가 가고 나서 다가온 루시아 일행을 발견했다.

진이 빠졌을 텐데도 아리스타가 미소를 지었다.

“……헤르윈을 구해줘서 고마워.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을게.”

루시아가 조심스레 힘 빠진 손을 꽉 잡았다.

손끝엔 여느 여인들처럼 부드러운 촉감이 아닌, 검을 휘두르는 기사의 굳은살이 느껴졌다.

이 손이 헤르윈을 구했다는 사실에 루시아는 다시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다.

“아니야… 나도 헤르윈이 아니었으면 여기에 없었을 거야…….”

아리스타의 목소리는 피곤함이 가득했다.

“나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미안해. 나는 이만 갈 테니까 얼른 푹 자.”

루시아가 어느새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닦으며 일어서자 아리스타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루시아.”

“응?”

“내가 정말 고맙다면… 혹시 나중에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

“부탁? 그게 뭔데?”

“나중에…나중에 알려줄게…….”

그 말을 끝으로 끝내 반쯤 감겼던 눈꺼풀이 닫히고 말았다. 이윽고 색색거리는 고운 숨소리가 들렸다.

루시아는 대체 아리스타가 무슨 부탁을 하려는 것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에취!”

골똘히 고민하던 것도 잠시 추위를 느낀 루시아가 재채기했다.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옷이라도 갈아입자니까.”

“그래, 루시아. 헤르윈도 곧 양호실로 옮겨갈 테니까 일단 기숙사에 가서 옷이라도 갈아입고 와.”

입을 꾹 닫고 요지부동이던 루시아는 결국 재채기를 한 번 더 하고 나서야 고집부리는 것을 멈췄다.

* * *

헤르윈과 아리스타의 실종 사건이 일어난 바로 다음날.

하루도 채 되지 않아서 두 사람의 이야기가 교내에 순식간에 퍼졌다.

나란히 실종된 페네우스 공자와 리디아 공녀. 구사일생으로 무사히 돌아오다.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말이었다.

1학년 중 가장 유명하다 할 수 있는 두 남녀가 나란히 실종됐다가 무사히 돌아오다니. 소설 쓰는 것을 좋아하는 치들이 반길만한 소재이지 않은가.

평소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고 수군거리던 사람들은 실종됐을 때 분명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비가 왔을 때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옷을 벗고 껴안았을 것이라든지, 절체절명의 순간을 함께 극복했으니 이번 기회에 서로에 대한 마음을 자각했을 것이라든지, 더한 경우에는 이미 약혼에 대한 이야기도 오갔을 것이란 말도 있었다.

모두 설레발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지만, 현실은 달랐다.

두 사람은 까무룩 잠이 들고, 꼬박 하루가 지난 오늘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푸에취.

루시아는 어제부터 계속 나오는 재채기를 참으며 서둘러 양호실로 향했다.

어제 기숙사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난 뒤부터 조금씩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한 시간 동안 비에 젖은 채로 있기도 했고, 갑작스러운 스트레스까지 더해져 결국 감기에 걸려버린 것이다.

양호 선생님은 하루 이틀 푹 쉬면 금방 나을 거라고 그랬지만, 루시아는 쉬기는커녕 헤르윈을 간호하기 바빴다.

마음 같아선 하루 종일 그의 곁에 붙어서 간호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학생이었다.

특별 사유 없이 친구를 돌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교수들이 수업을 빼줄 리 없었다.

그렇게 헤르윈을 간호하고 싶다면 요령을 피워 수업을 빼먹으면 될 텐데 루시아는 그렇게 하지도 못하고 꾸역꾸역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중간중간 쉬는 시간마다 양호실로 달려가 헤르윈을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모든 수업이 끝난 후.

루시아는 양호실에 도착하자마자 헤르윈의 상태부터 살폈다.

침대에는 헤르윈이 죽은 듯 누워있었다.

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탄성을 자아내는 그의 외모는 여전했다.

이제 막 젖살이 빠지기 시작해 날렵하지만 약간 둥그스름한 턱선과 콧날, 곧게 내려앉은 속눈썹이 긴 그림자를 만들며 하얀 볼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살짝 벌려진 입 사이로 색색 새어 나오는 숨소리만 아니었다면 조각상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남들은 넋을 놓고 볼지도 모를 헤르윈의 얼굴에 루시아는 도리어 울상을 지었다.

“야위었어…….”

아주 미묘하지만, 그의 얼굴이 아주 조금 해쓱해져 있었다.

어제 점심 이후로 아무것도 못 먹었으니 일어나면 분명 배고플 것이다.

루시아는 그가 깼을 때 바로 먹을 수 있는 간단한 음식을 준비했다.

“루시아, 헤르윈은 좀 어때?”

그때, 비앙카가 나타났다.

“아직 안 일어났어.”

“분명 금방 일어날 거라고 했는데…….”

“많이 피곤했나 봐. 의식불명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대.”

“그러면 다행이고. 좀 있으면 저녁인데 밥은 좀 먹었어?”

루시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너 그러다가 큰일 나. 아침,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잖아. 이러다가 헤르윈이 일어나기도 전에 네가 먼저 쓰러지는 거 아닌가 몰라.”

“에이, 그 정도는 아니야. 그냥 감기 때문에 입맛이 없는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럴수록 더더욱 먹어야지. 감기가 더 심해지면 어떡해.”

비앙카는 툴툴거리면서도 루시아를 챙기기 바빴다.

“루시아 혹시 너 그 얘기 들었어?”

“뭘 말이야?”

“헤르윈이 리디아 공녀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소문.”

혹 다른 사람이 들을까 싶어 비앙카가 목소리를 낮췄다.

“어제 있던 일 때문에 과장된 소문이 퍼진 것 같은데, 그런 말도 있었어?”

“그래, 그런데 들어보니까 꽤 그럴싸하더라고.”

“비앙카, 아무리 그럴싸해도 그럴 리 없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어제 도착하자마자 둘 다 쓰러졌는데 사랑이니 뭐니 그런 이야기 할 시간이 어딨어.”

“하지만, 루시아 너도 한번 들어봐. 어제 헤르윈이 공녀를 감싸다가 다쳤고, 공녀 역시 헤르윈을 구하려다가 오거를 해치웠잖아. 서로에게 충분히 호감이 있으니까 한 행동 아냐? 물론 네가 헤르윈을 좋아한다는 건 알지만 혹시 헤르윈이 공녀를 좋아하는 거라면…….”

“친구가 위험에 처했는데 도와주지 않을 사람이 어딨니? 내가 헤르윈이었더라도 아리스타를 도왔을 거야. 너까지 괜한 소문에 휩쓸리지 마.”

루시아가 비앙카의 말을 끊으며 선을 그었다.

“미안…….”

비앙카의 어깨가 축 처지자 루시아는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나야말로 차갑게 말해서 미안해.”

“아니야, 네가 들어봤자 좋을 것 하나 없는 얘기인데 내가 괜히 말한 거지. 앞으로 조심할게.”

비앙카가 다시는 그런 말 하지 않겠다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음…….”

때마침 신음 소리가 들렸다. 루시아가 고개를 홱 돌렸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무거운 눈꺼풀이 서서히 올라가자 붉은 눈이 드러났다.

“헤르윈!”

“세상에! 내, 내가 양호 선생님 모시고 올게!”

비앙카가 서둘러 자리를 떴다. 루시아는 어느새 고인 눈물을 닦아내며 헤르윈을 애타게 불렀다.

“헤르윈, 정신이 좀 들어?”

멍하니 천장을 보던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옆으로 돌아갔다.

“루시아…….”

“응, 나 루시아야. 하아,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분명 금방 일어날 것이라고 했고, 자신도 그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렸지만 막상 붉은 눈을 다시 보게 되자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여긴 어디야?”

푹 잠겨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양호실이야. 실습 평가에서 1등으로 돌아온다던 애가 갑자기 실종됐다는 소리를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루시아가 헤르윈을 타박했다.

화를 낸답시고 얼굴까지 구기며 잔소리를 하곤 있지만, 영락없이 새끼고양이가 삐약거리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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