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에단이 입을 열었다.
“너는 자기 물건에 다른 사람이 손대는 거 엄청 싫어하면서 루시아한테는 물건 맡기더라?”
“엥?”
루시아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몰랐어? 기숙사에서 애들끼리 물건 공유 많이 하는데 헤르윈은 단 한 번도 한 적 없어.”
“맞아, 자기 물건 만지는 거 엄청 싫어해. 생긴 것처럼 까탈스럽다니까?”
“몰…랐어. 나한테는 한 번도 그런 적 없는데?”
뚱한 표정으로 에단과 브라이언을 노려보던 헤르윈이 루시아의 얼떨떨한 시선을 마주했다.
“너야 뭐 어렸을 때부터 봐왔으니까. 너랑 루카스 형은 괜찮아.”
자신이 특별해서 그런 건가 기대했던 것도 잠시, 루시아는 금세 그의 말에 수긍했다.
“하긴, 우리 오빠한테도 그러지?”
“루시아, 너 오빠 있어?”
에단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응, 오빠 한 명 있어.”
“어머, 오라버니가 계셨나요? 미처 몰랐네요.”
“그러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어.”
크리스틴과 비앙카도 놀라워하자 루시아는 떨떠름했다.
“내가 말한 적 없던가?”
“네, 그런 얘기 한 적 없어요. 루시아의 오라버니라니, 한번 보고 싶네요.”
“오빠랑 몇 살 차이야? 혹시 여기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는 것 아냐?”
“응, 맞아. 나랑 2살 차이라서 지금 졸업반이야.”
농담으로 던졌던 비앙카의 말에 수긍하자 다시 한 번 친구들이 놀라워했다.
“우와, 왠지 상상이 안 간다. 루시아 형이라니. 헤르윈, 대체 어떤 사람이야?”
“혹시 루시아처럼 작고 아기자기하신 분이셔?”
호기심이 생겼는지 에단과 브라이언이 헤르윈에게 물었다.
“아기자기하기는. 루시아랑 많이 닮긴 했는데 완전 달라. 좀 장난기가 많지.”
“한번 보고 싶다.”
“한번 보고 싶다.”
에단이 루카스의 얼굴을 상상하며 내뱉던 도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언제 왔을지 모를 아리스타가 서 있었다. 에단이 괴성을 지르며 기겁한 것은 당연했다.
“너, 너! 언제 왔어?!”
“방금 전에. 루시아, 오빠가 있다고?”
에단만큼이나 깜짝 놀란 루시아가 옆에 있는 비앙카를 꼭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어떻게 돼?”
“루카스 아그네스.”
“루카스…….”
아리스타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할 말이라도 있어?”
헤르윈의 물음에 잠시 루시아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아리스타가 바로 고개를 돌렸다.
“선전포고하러 왔지! 이번 실습 평가 수석은 바로 이 몸의 차지다! 두고 보라고!”
아리스타가 헤르윈을 향해 선전포고했다.
늘 1, 2등을 다투는 사이라 그런지 두 사람은 라이벌에 가까웠다.
헤르윈이 씩 웃으며 붉은 눈을 번뜩였다.
“바라던 바다. 어디 한번 열심히 해 봐.”
헤르윈과 아리스타 사이에 스파크가 튀었다. 누구 할 것 없이 호승심이 가득한 눈이었다.
“저것 봐, 분명 리디아 공녀가 헤르윈을 좋아하는 게 맞다니까?”
옆에서 비앙카가 루시아만 들을 수 있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루시아는 머쓱하게 웃는 게 전부였다.
* * *
우르릉 쾅!
천둥 번개가 창밖으로 번쩍였다가 사라졌다.
“자자, 집중하세요.”
교실에서 학생들이 술렁거리자 교수가 주의를 줬다.
“아직 5월인데 무슨 비가 장마처럼 오냐.”
“그러게 말이에요. 오늘 검술학 실습 평가가 있는 날인데 거긴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비앙카와 크리스틴이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바깥을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걱정이네.”
루시아도 근심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오늘은 검술학에서 가장 중요한 실습 평가가 있었다.
헤르윈에게 듣기로는 아카데미 바로 옆에 위치한 야산에서 실습한다고 했는데 이렇게 비가 많이 쏟아지니 걱정이 안 들 수가 없었다.
‘부디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아침부터 비가 쏟아졌으면 아카데미 측에서 알아서 실습 평가를 늦췄겠지만, 비는 예고도 없이 쏟아졌다.
이렇게 갑자기 비가 오면 산에서 미끄러지거나 조난을 당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헤르윈이야 강하니까 괜찮겠지만…….’
16살이라고 해도 소드 익스퍼트를 목전에 앞둔 한 명의 기사이다. 분명 무사히 돌아올 것이다.
“그럼, 오늘 수업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때마침 수업이 끝나고 종소리가 울렸다.
루시아는 크리스틴, 비앙카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친구들 마중하러 갈까요?”
“지금? 밖에 비가 많이 오는데?”
“그러니까 가야죠. 분명 우산도 없을 텐데 우산이라도 가지고 가야 하지 않겠어요?”
마침 모든 수업도 다 끝났겠다. 크리스틴이 헤르윈 일행을 데리러 가자고 제안했다.
비앙카는 처음엔 꺼리다가 크리스틴과 루시아가 가려고 하자 결국 마지못해 합류했다.
루시아 일행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우산과 수건 등. 당장 필요할 만한 것들을 챙겨 검술학 실습 평가가 치러지는 곳으로 향했다.
거센 비바람에 우산은 쓸모를 잃고 옷자락이 젖어 들었다.
어떻게든 젖지 않으려 비앙카가 크리스틴에게 찰싹 붙었다.
“으아아!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비앙카, 조금만 참아요. 저기 천막이 보이잖아요.”
크리스틴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아카데미에서 미리 준비해둔 천막이 보였다.
아마 낙오된 학생이나, 교수들이 모여 있을 것이다.
루시아 일행은 서둘러 천막으로 다가갔다.
“지금 당장 구하러 가야 해요!”
천막에 다다랐을 때, 안에서 브라이언이 크게 소리 지르는 것이 들렸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산에는 몬스터가 있다고요! 지금 헤르윈이랑 아리스타만 못 왔잖아요! 이러다가 몬스터랑 만나기라도 하면 교수님들이 책임지실 거예요?”
브라이언이 교수들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비가 그칠 때까지 조금만 기다리거라. 지금 갔다가는 두 사람을 제대로 찾지도 못해. 그리고 몬스터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하거라. 이곳에는 몬스터가…….”
“교수님! 거짓말이 아니에요! 저도 몬스터를 봤어요. 분명 그건 짐승이 아닙니다! 오거예요!”
이번엔 에단이 소리쳤다. 그는 다리를 절뚝이며 브라이언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두 명이나 몬스터를 봤다고 하자 교수들의 낯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생각해보세요. 지금 이곳에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헤르윈과 아리스타뿐입니다. 두 사람은 여기서 가장 뛰어난 실력자들이에요. 다른 애들은 다 왔는데 딱 그 두 명만 못 오는 게 말이 됩니까?”
“교수님! 이러다가 두 사람이 위험해져요!”
브라이언과 에단은 교수든 누구든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서 아직 오지 못한 헤르윈과 아리스타를 찾길 바랐다.
툭-
“이,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헤르윈이 실종됐다고?”
막 천막으로 들어온 학생들이 경악하는 소리가 들렸다.
“루시아……!”
뒤늦게 루시아를 떠올린 비앙카가 서둘러 뒤를 돌아봤다.
순간 비앙카는 온몸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맑은 하늘처럼 생기 가득 했던 푸른 벽안이 순식간에 공허해졌다. 마치 인형을 마주한 것처럼 영혼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루시아가 비틀거리며 브라이언과 에단에게 다가갔다. 교수에게 계속 주장하던 두 사람이 뜻밖의 인물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너희가 여긴 어떻게…….”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헤르윈이 실종됐다고……?”
브라이언이 말하기를 주저하자 루시아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얼른 제대로 말해 봐!”
“그게…그러니까…….”
제발 아니라고, 네가 잘못 들은 거라고 말했으면 했는데 브라이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이 현재 헤르윈이 처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설명하는 것 같았다.
루시아가 숨을 급히 들이마시자 그녀가 쓰러지리라 생각한 브라이언과 비앙카가 서둘러 그녀를 붙들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쓰러지지 않았다.
아니, 쓰러질 수 없었다. 여기서 쓰러진다고 실종됐던 헤르윈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니까.
“루시아 너무 걱정하지 마. 별일 없을 거야.”
“그래, 비가 너무 오니까 잠시 어딘가에 몸을 숨겼을 수도 있어.”
주변 친구들이 서둘러 그녀를 위로했다. 소꿉친구가 실종됐다는 소리를 듣고 제정신을 유지할 사람이 없을 테니 말이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해봤자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기에 비앙카는 루시아의 어깨를 꼭 끌어안으며 그녀를 쓰다듬었다.
온몸에 무력감과 동시에 깊은 절망이 내려앉았다. 루시아는 눈을 질끈 감으며 두 손을 꽉 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저 빗줄기를 뚫고 실종된 헤르윈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마음과 달랐다.
루시아는 브라이언이나 에단처럼 검을 휘두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하물며 체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현재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헤르윈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만을 기도하는 것. 오로지 그뿐이었다.
“저, 저기 누가 보인다!”
갑자기 한 학생이 천막 바깥을 가리키며 크게 외쳤다.
루시아가 감았던 눈을 퍼뜩 뜨며 폭우로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바깥을 살폈다.
저 멀리 회색빛 풍경에 검은 두 그림자가 보였다.
“아리스타, 헤르윈!”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몇몇이 바로 뛰쳐나갔다. 그중에는 루시아도 있었다.
“헤르윈!”
굵은 빗방울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지만 루시아는 헤르윈에게 달려가기 바빴다.
점점 두 그림자에 가까워지자 제대로 된 형체가 보였다.
“헉, 허억, 허억…….”
아리스타가 진흙과 비로 인해 엉망진창인 몸으로 자기보다 큰 헤르윈을 부축하며 힘겹게 걷고 있었다.
그녀는 달려오는 사람들을 보자마자 걸음을 멈추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아리스타! 이제 우리가 헤르윈을 부축할게.”
브라이언과 에단이 서둘러 아리스타에게서 헤르윈을 건네받았다.
헤르윈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크게 다치기라도 한 건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고, 한쪽 다리를 절뚝거렸다.
“헤르윈!”
루시아가 서둘러 헤르윈에게 다가가자 헤르윈은 가물거리는 눈으로 루시아를 보곤 고개를 뚝 떨궜다.
“이런 제기랄! 당장 들것 갖고 와!”
“헤르윈! 정신 차려! 여기서 정신 놓으면 안 돼!”
저 멀리서 들것이 오는 것이 보였다. 루시아는 당장이라도 목 놓아 울고 싶었다.
아니, 이미 울고 있었다. 다만 폭우로 인해 이미 얼굴이 젖어있었기에 그 누구도 그녀가 우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 아리스타!”
그때, 헤르윈 뒤에 있던 아리스타가 휘청이며 앞으로 고꾸라지려 했다.
헤르윈이 들것에 실려 나가는 것을 보던 루시아가 서둘러 그녀를 붙잡았다.
“루, 시아… 고마워…….”
겨우겨우 내뱉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래도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검은 놓지 않았다.
손이 하얗게 질린 것이 보일 정도로 그녀는 여전히 긴장한 상태였다.
“아리스타, 수고 많았어. 이제 안심해도 돼.”
루시아는 그녀가 검을 놓을 수 있게 조심스레 아리스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어?”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그녀의 검에서 희미한 무언가가 일렁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리스타가 손을 놓자 잠깐 보였던 아지랑이가 사라졌다.
‘내가 잘못 봤나?’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던 루시아는 자신에게 기대는 아리스타의 무게를 느끼고 서둘러 그녀를 살폈다.
마침 헤르윈을 옮기고 남은 인원들이 다가와 아리스타를 안아 들곤 서둘러 그녀를 천막으로 데려갔다.
천막에서는 먼저 실려 들어간 헤르윈을 치료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루시아! 다 젖었잖아!”
“이러다가 감기 들어.”
비앙카와 크리스틴이 루시아에게 수건을 건네줬다.
루시아는 수건을 대충 받으며 헤르윈을 살폈다.
“에단! 헤르윈은 어때? 괜찮아?”
“큰 상해는 없어. 뇌진탕 증상이 좀 보이고 발목이 많이 부은 거로 봐서는 한 번 구른 것 같기는 한데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지.”
에단도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털며 상황을 전했다.
“아리스타도 괜찮아, 힘을 너무 많이 써서 탈진한 것 같아.”
염려했던 큰 피해는 없었다. 깊은 안도가 파도처럼 밀려와 루시아는 그만 긴장을 놓았다.
그녀가 바닥에 스르륵 주저앉자, 에단과 브라이언이 서둘러 루시아를 잡았다.
“하아, 다행이다. 다치지 않아서…….”
“이제 안심해도 되니까. 너희는 이만 들어가.”
“그래, 우리가 헤르윈 곁을 지킬 테니까.”
에단과 브라이언이 루시아를 기숙사로 돌려보내려 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놀랄 만한 일을 겪었으니 그녀에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루시아는 정신적인 충격뿐만 아니라 비를 한차례 흠뻑 맞아서 온몸이 젖은 상태였다.
루시아의 입술이 파랗게 질리고, 몸이 알게 모르게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아니, 헤르윈이 정신 차릴 때까지는 못가.”
“하지만, 루시아. 이러다가 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야.”
“맞아, 일단 옷이라도 갈아입자.”
주변에서 설득해도 루시아의 태도는 강경했다. 그녀가 움직이지 않을 것이란 걸 직감한 친구들이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