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비앙카라면 괜찮겠지?’
그녀를 알고 지낸 지 겨우 한 달 남짓밖에 되지 않았지만, 자신이 아는 그녀는 남의 비밀을 함부로 옮길 사람이 아니었다.
루시아는 결국 비앙카를 믿기로 하며 겨우 입을 열었다.
“……속여서 미안해. 나 사실 헤르윈 좋아해.”
헉-
숨을 급히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야 그렇겠지. 단순히 소꿉친구라고 생각했을 텐데, 사실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짝사랑하고 있었으니.
“많이 놀랐지?”
“어? 어어. 좀 놀랐… 아니, 솔직히 많이 놀랐어. 그동안 그런 티를 한 번도 내지 않았잖아.”
“들키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했어.”
비앙카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니, 할 말은 많아 보였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자꾸 입을 달싹이는 그녀를 보고 루시아가 피식 김빠진 소리를 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을 텐데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그래도 돼? 혹시 불편한 거면…….”
“너라면 괜찮을 것 같아. 이렇게 들킨 마당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내 이야기를 다른 곳에서 할 건 아니잖아. 그치?”
“어휴, 내가 이걸 왜 다른 사람한테 얘기해!”
비앙카가 손사래 치며 절대 다른 곳에 이야기하지 않겠다며 맹세까지 했다.
루시아가 뭐든 물어보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비앙카는 결국 입을 뗐다.
“그동안 헤르윈을 좋아한 건 왜 숨긴 거야? 오늘만 해도 여자애들이 헤르윈 좀 소개해달라고 막 부탁했었잖아. 네가 헤르윈을 좋아하는 걸 알면 그런 부탁은 안했을 텐데.”
“음…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좋을 건 없으니까. 너도 알겠지만, 나랑 헤르윈에 대해서 입방아를 찧는 사람들이 많거든. 지금 상황에서도 말이 많은데 내가 헤르윈을 짝사랑하고 있는 걸 알면 어떻게 되겠어.”
“아… 하긴.”
“그냥 헤르윈을 좋아하는 것뿐이야.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도 사람들이 나를 멋대로 평가하고 폄하하는 게 싫어. 그래서 숨긴 것도 있고. 헤르윈과 약속한 게 있어서 그래.”
“약속?”
루시아는 잠시 고민했다. 어디까지 설명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비앙카, 나랑 약속 하나만 해줄 수 있어?”
“응, 뭔데?”
“지금 내가 하는 얘기, 절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 약속해줘.”
“절대 얘기 안 한다니까…….”
가볍게 웃으며 대답하던 비앙카는 진지한 루시아의 표정을 보고 멈칫했다.
“응, 절대 다른 사람에게 얘기 안 할게. 약속해.”
비앙카의 녹안이 진중한 빛을 띠었다. 신뢰가 가는 눈빛이라 루시아는 한시름 걱정을 놓았다.
그리고는 지금까지의 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8살부터 16살인 지금까지 헤르윈을 짝사랑해왔다는 것과 지금까지 60번에 가까운 고백을 하고 차였다는 것.
짝사랑과는 별개로 평상시에는 친한 친구로 지내자고 약속했던 것까지 전부.
그래도 중간중간에 헤르윈의 트라우마에 대해서라던가 일부분 사적인 일은 일절 말하지 않았다.
거의 1시간에 가까운 이야기를 가만히들은 비앙카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렇게 된 거야. 하하, 좀 이상하지?”
“응. 많이 이상하다.”
비앙카가 담백하게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8년이나 헤르윈을 좋아하고 있으면서도 평상시엔 그 감정을 숨기고 친구로 지내는 게 너무 신기해.”
“역시 그런가… 이렇게 지낸 지 워낙 오래돼서 친구로 지낼 때랑 고백할 때랑 다르게 행동할 수 있어.”
“아무리 그래도 한 사람이 다른 한 명을 짝사랑하고 있으면 관계가 이상해질 텐데 용케 오랫동안 사이가 안 틀어졌네?”
“그건 헤르윈의 배려가 커. 아무리 친구로 지낸다고 해도 결국 헤르윈이 피하면 끊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니까. 고백해도 금세 평소처럼 지내주는 헤르윈이 고맙지.”
“……그래도 60번이나 차였는데 서운하지는 않아? 그렇게나 많이 차이면 좀 짜증… 아, 미안. 어쨌든 한 번도 안 받아주면 서운할 법도 한데.”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괜찮아. 억지로 받아주는 것보다는 나아.”
“응? 차라리 당장 좋아하는 건 아니더라도 일단 사귀는 게 좋지 않아? 사귀다 보면 진짜로 좋아질 수도 있는 거잖아.”
“……반대로 말하면 나를 평생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지. 나랑 같은 마음이 아니면 안 돼. 그리고 헤르윈도 내 고백 그냥 흘려듣는 건 아니야. 매번 진지하게 답해주고 있어.”
“진지하게 받아주고 있다고 어떻게 확신해?”
“그야 감이지. 아무래도 내가 자주 고백하다 보니 가끔은 짜증 내기는 하는데 기본적으로 나를 무시하지는 않거든.”
“서로를 상당히 신뢰하고 있구나?”
비앙카가 감탄했다.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던 루시아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너무 진지한 얘기였나? 미안해.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게 처음이라서.”
“괜찮아. 신선한걸. 가만 보면 너는 숨김없이 다 드러내는 것 같으면서도 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거든.”
“내가… 그랬나?”
“응, 그래서 애들이 너한테 쉽게 접근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잖아. 뭐랄까, 너한테는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어.”
“에이, 설마. 너무 띄워주지 마.”
“아니야. 진짜래도? 나도 너의 그 모습에 끌린 건데?”
“……정말?”
루시아는 떨떠름했다. 아우라라. 대체 어디서 무슨 분위기가 나온다는 건지 스스로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만약 헤르윈한테 좋아하는 사람이나 애인이 생기면 어떡할 거야?”
“……글쎄, 잘 모르겠네. 사실 지금까지 헤르윈이 누구랑 사귄 적도 없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도 본 적 없었거든.”
“그래도 언젠가는 누군갈 좋아하는 날이 올 것 아냐.”
비앙카가 진지하게 물었다.
지금은 이렇게 허허 웃고 있지만, 그녀의 말대로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것이다.
‘그때, 나는 과연 어떻게 할까?’
사실 잘 모르겠다.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일이라 잘 예상이 가지 않기도 하고, 만약 그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면…….
“그냥 가만히 있지 않을까?”
“뭐? 당장 훼방을 놔야지 그게 무슨 소리야.”
루시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니야. 그렇게 하면 헤르윈이 싫어할걸. 나는 그저 평소처럼 헤르윈 곁에 있으면서 계속 고백할 것 같아.”
“……너도 참 대단하다.”
루시아가 머쓱하게 웃자 비앙카가 의미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네 일인데 내가 이래라저래라하는 것도 웃기지.”
창틀에 기대앉았던 비앙카가 엉덩이를 뗐다.
“혹시 헤르윈과 관련해서 상담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너도 가끔은 속마음을 어딘가에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을 거잖아.”
“아…….”
“절대로 다른 사람한테 얘기 안 하니까 너무 걱정하지도 말고.”
저를 배려해주는 비앙카의 따뜻한 마음씨에 루시아는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응, 그렇게 할게.”
“자, 우리 이제 이만 가자. 좀 있으면 소등하겠어.”
비앙카와 헤어지고 방에 들어온 루시아는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어쩐지 마음이 홀가분해진 기분이었다.
그저 다른 사람에게 제 감정을 털어놓는 것뿐인데 그것이 이렇게나 편안할 줄은 몰랐다.
루시아는 이번에 비앙카에게 들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잠에 빠져들었다.
* * *
비앙카에게 모든 것을 들킨 날로부터 루시아는 그녀와 많은 것을 공유하고 속마음을 털어놓으면서 예전보다 더 친해졌다.
비앙카는 열심히 루시아의 사랑을 응원하며 가끔은 헤르윈에게 접근하려는 여자들을 대신 치워주기도 했다.
비앙카가 너무 의식하고 행동하는 것 같아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런 것을 제외하고는 제 비밀을 알고 있는 소중한 친구였다.
“요즘 리디아 공녀가 수상해.”
“응? 뭐가?”
크리스틴이 잠시 자리를 비워서 비앙카와 단둘이 남게 됐을 때, 비앙카가 탐탁잖은 표정으로 저 멀리 있는 아리스타를 노려봤다.
루시아는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의아했다.
“뭐긴 뭐야. 넌 저걸 보고도 모르겠어?”
비앙카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아리스타를 가리켰다. 그녀 옆에는 헤르윈과 에단, 브라이언 그리고 그 외의 남학생들이 있었다.
검술 수업 때면 늘 보이는 광경이었다.
“대화하고 있는데?”
“그냥 대화가 아니라 자세히 보면 계속 헤르윈을 건드리고 있잖아.”
다시 살펴보니 아리스타가 크게 웃으며 헤르윈과 다른 남자애들을 툭툭 치고 있었다.
“저번부터 느꼈는데, 분명 리디아 공녀가 헤르윈에게 호감이 있는 게 분명해.”
“에이, 말도 안 돼.”
“어머, 얘 좀 봐? 넌 헤르윈 좋다는 애가 저걸 보고도 몰라? 누가 봐도 헤르윈한테 관심 있으니까 스킨십 하는 것 아냐!”
비앙카는 잠시 소리를 줄여 얘기했다. 그녀가 계속 확신에 찬 말투로 말하니 루시아도 조금씩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의 상황을 자세히 다시 지켜봤지만, 딱히 비앙카가 말하는 포인트를 알 수 없었다.
누군가가 헤르윈을 좋아한다면 자신이 모를 리 없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헤르윈을 구경하는 여학생들의 흑심이 눈에 훤히 보이는데, 아리스타라고 해서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아리스타는 헤르윈 뿐만 아니라 다른 남자애들과도 고루고루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아니야. 그냥 친해서 그런 거잖아. 보면 헤르윈뿐만 아니라 에단이랑 브라이언한테도 장난치고 있는 걸.”
“하아, 진짜 답답하다.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너는 불안하지도 않아? 리디아 공녀는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인기가 많잖아! 혹시 헤르윈이 공녀를 좋아하면 어쩌려고!”
“음… 글쎄.”
루시아가 떨떠름하게 답했다. 비앙카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을~쎄? 그게 지금 여기서 나올 답이야?”
“그렇게 화낼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헤르윈이 누굴 좋아한다는 게 상상이 가지 않아서…….”
“……너 헤르윈 좋아하는 건 맞지?”
“내가 좋아하는 걸 떠나서, 헤르윈은 갑자기 누군가를 좋아한다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잘 상상이 안 가.”
이걸 담백하다고 해야 할지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비앙카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아휴, 됐다, 됐어. 말을 말자.”
“……혹시, 화났어?”
“화 안 났어! 내가 왜 화가 나!”
“에이, 화난 것 같은데?”
루시아가 비앙카의 팔을 슬쩍 잡고 특유의 애교를 부리자 비앙카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녀는 잠시 루시아를 흘겨보다가 여린 어깨를 살짝 꼬집었다.
“애교 부린다고 내가 그냥 넘어갈 줄 알아?”
“아앗! 아파!”
아프다고 말한 것치고 루시아의 얼굴은 밝았다.
두 사람이 서로 장난치고 있을 때, 크리스틴이 돌아오면서 검술 수업도 끝이 났다.
“하아, 다음 주가 실습 평가라니.”
“장소를 옮겨서 한다던데 과연 어디로 갈까?”
“선배님들한테 듣자 하니 야산으로 간다던데? 가서 목표지점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게 미션이래.”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헤르윈 일행은 갑자기 주어진 실습 평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실습 평가? 무슨 일 있어?”
“응, 갑자기 다음 주에 긴급평가를 한다네?”
“아무래도 이걸로 중간 등수를 매기려나 봐. 이제 벌써 5월이니까 슬슬 중간점검할 때가 됐지.”
브라이언과 에단이 친절히 설명했다.
아무래도 검술학은 실습이 상당히 중요한 과목이다 보니, 가끔 반나절이나 하루를 통째로 빼서 다른 곳에서 수업할 때도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일인 건가 싶었다.
“과연 이번에 등수 변동이 있을까?”
에단의 질문에 헤르윈이 답했다.
“최근에 제레미가 실력이 많이 좋아졌더라. 걔는 성적이 좀 오를 것 같지 않아?”
“흠, 나는 그냥 평범하게 중간 정도면 딱 좋겠다.”
브라이언은 이번 평가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너는 검에 별로 뜻도 없어 보이는데 이 수업을 왜 듣는 거야?”
“나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겠냐. 아버지께서 하라시는데.”
한숨을 푹푹 내쉬는 브라이언을 뒤로하고 헤르윈이 다가왔다.
“루시아, 내 옷 어딨어?”
“아, 잠깐 추워서 내가 걸치고 있었어. 지금 바로 줄게.”
수업 직전 헤르윈은 교복을 루시아에게 맡겼었다.
5월 초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날씨가 쌀쌀하여 루시아는 헤르윈의 블레이저를 잠시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루시아가 서둘러 그것을 돌려주려고 하자 헤르윈이 손을 내저었다.
“됐어, 너 입고 있어. 물 있으면 좀 줄래?”
“응, 안 그래도 미리 떠놨지.”
루시아에게 물통을 건네받은 헤르윈이 그것을 벌컥벌컥 들이켜 마셨다.
흡사 10년 차 부부를 보는 것 같은 광경에 친구들이 두 사람을 빤히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