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129)

<17화>

“와… 마성의 여자네.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꼬시다니.”

“강적이군. 루시아에게서 저런 반응을 보이게 만들기 쉽지 않은데.”

“루시아, 얼굴이 붉어졌어요.”

아리스타가 떠나자 친구들이 뒤늦게 아리스타의 행동에 대해 얘기했다.

방금 전, 그녀는 누가 봐도 루시아를 유혹하려는 것 같았다.

브라이언의 부단한 노력에도 낯빛 한 번 바뀌지 않던 루시아가 아리스타의 미소 하나로 얼굴을 붉히는 것이 참 신기했다.

루시아는 정말로 자신의 얼굴이 빨개졌나 싶어 볼을 문질렀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헤르윈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지 아리스타가 사라진 곳을 노려보던 그는 돌연 걸음을 돌렸다.

“헤르윈! 어디가?”

“잠깐 세수하러.”

“아, 그럼 나도 같이 가. 얘들아 나 물 좀 떠 올게. 늦으면 먼저 가. 알겠지?”

루시아가 서둘러 빈 물통을 들고 헤르윈의 뒤를 따라갔다.

헤르윈은 루시아가 따라온다는 소리에 성큼성큼 걷던 걸음을 멈췄다.

루시아가 오고 나서야 그는 그녀의 보폭에 맞춰 함께 천천히 수돗가로 향했다.

친구들의 눈에 헤르윈이 루시아의 말에 피식 웃는 모습이 보였다. 헤르윈의 얼굴엔 편안하고 부드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아리스타와 있을 때보다 확실히 다른 분위기였다.

“헤르윈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루시아만큼은 잘 챙기는 것 같아요.”

크리스틴 말에 에단이 동의했다.

“저 녀석 루시아 보폭 맞춰주는 것 봐. 저번에 나랑 걸을 때는 네가 알아서 따라오라고 그랬는데. 사람 차별하는 거야 뭐야.”

“너랑 루시아처럼 귀여운 여자애가 같은 줄 알아? 나 같아도 그러겠다.”

“뭐? 지금 내가 여자가 아니라서 그런다는 소리야?”

브라이언과 에단이 실없는 말을 하고 있을 때, 무덤덤한 비앙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헤르윈은 다른 여자한테도 저렇게 하지 않아. 오직 루시아한테만 잘해주지.”

그녀는 늘 웃던 얼굴을 무뚝뚝하게 굳히며 이제는 잘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흔적을 쫓고 있었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슬슬 쉬는 시간이 끝날 것 같은데 우리 먼저 들어가도록 할까요?”

다음 수업을 위해서는 지금 출발하는 것이 좋았다. 루시아가 먼저 가라 했으니 두 사람도 알아서 올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고 떠나려던 도중 에단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어? 헤르윈, 수건 두고 갔네.”

“아까 세수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수건 없으면 닦을 게 없을 텐데…….”

“대충 알아서 닦겠지. 신경 쓰지 말고 우리 먼저 가자.”

헤르윈의 수건을 두고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비앙카가 에단의 손에 들린 수건을 가져갔다.

“그거 이리 줘. 내가 갖다 줄게.”

“응? 괜찮겠어? 지금 따라가면 수업시간에 늦을 텐데.”

“괜찮아, 괜찮아. 그까짓 것 지각 한 번 하지 뭐. 수건 없으면 분명 젖어서 나타날 텐데 여자애들이 난리 날걸?”

“아,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면 저랑 같이 갈까요?”

떠나려는 비앙카를 크리스틴이 붙잡았다.

“아니야, 괜찮아. 나 혼자 갔다 올게. 너희 먼저 가 있어.”

비앙카는 크리스틴의 호의를 거절하며 서둘러 헤르윈과 루시아의 뒤를 쫓았다.

* * *

졸졸졸-

루시아는 수도시설에서 물통에 물을 담았다.

“헤르윈, 다 씻었…….”

제 볼일을 마친 루시아는 헤르윈을 부르려 고개를 돌린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헤르윈이 흐르는 물에 얼굴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적시고 있었다. 그의 머리를 따라서 물줄기가 날카로운 턱선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눈을 감고 머리를 식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침이 꿀꺽 삼켜졌다.

“방금 나 불렀어?”

헤르윈이 머리를 대충 털며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의 붉은 눈이 머리카락과 얼굴을 따라 촉촉하게 젖은 것만 같았다.

머릿속으로 적색 신호가 울렸다. 평소보다 더 위험한 모습에 루시아는 황급히 물병으로 시야를 가리며 헤르윈의 시선을 피했다.

“다, 다 씻었냐고… 나는 볼일이 끝나서…….”

루시아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에 감사했다.

분명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물병을 붙잡은 손까지 빨갛게 변한 것이 보였다.

다른 사람에게 헤르윈을 좋아한다는 것을 들키지 않도록 평소에 부단히 노력했다.

얼굴에 감정이 다 드러나는 타입이라 아무리 두근거려도 최대한 표정 관리하고, 얼굴이 붉어지지 않도록 많이 애써왔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나마 헤르윈과 암묵적인 룰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처럼 제 감정을 주체 못 하는 상황이 닥치면 헤르윈은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거나 이야기 주제를 바꾸고는 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다소 서운할만한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루시아는 그것이 헤르윈만의 배려라고 느꼈다.

만약 그가 붉어진 자신의 얼굴을 보고 당황하거나 불편해했으면 오히려 자신이 더 부끄럽고 창피했을 것이다.

루시아는 물병에 이마를 갖다 대며 얼른 열기가 식기를 기다렸다.

심호흡하며 어느 정도 가슴이 진정시키고 나서야 헤르윈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생겼다.

“미안, 좀 당황했지?”

홍당무처럼 빨갰던 얼굴이 어느덧 보기 좋을 정도로만 가라앉았다. 루시아는 애써 웃으며 헤르윈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러다가 멈칫했다.

평소 같으면 ‘괜찮아, 얼른 가자.’라고 둘러대면서 시선을 돌렸을 텐데 지금 헤르윈은 콧잔등을 일그러트리며 루시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헤르윈이 짜증이 날 때마다 하는 행동이었다.

헤르윈이 루시아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 어? 왜, 왜 다가와?”

루시아는 평소와 다른 헤르윈의 행동에 당황했다. 겨우 진정시켰던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오, 오지 마!”

루시아가 빽 소리 지르자 헤르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도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점점 다가오는 헤르윈 때문에 루시아는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탁.

결국 벽에 부딪쳤다. 여린 어깨가 파들파들 떨렸다. 눈을 살짝 뜨자 어느새 헤르윈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세수로 인해 젖어있는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위험했다.

“갑자기 왜 그래…….”

목소리가 잔뜩 떨려 흡사 공포에 질린 것 같았다.

스윽-

거친 헤르윈의 손가락이 루시아의 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루시아의 푸른 눈이 팽글팽글 돌았다.

‘이, 이게 대체 뭐야!’

애인처럼 볼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무척이나 다정했다.

어렸을 때 손잡았던 것을 제외하고 이런 신체 접촉은 난생처음이었다.

“원래 얼굴이 잘 빨개졌었나?”

“내, 내 얼굴?”

“그래, 지금도 얼굴이 빨갛잖아. 토마토 같아.”

차가웠던 인상이 부드럽게 풀리며 헤르윈이 쿡쿡 웃었다. 친한 사이에만 간혹 보여주는 희귀한 웃음이었다.

“아, 더 빨개졌다.”

“지, 지금 누구 놀려?!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잖아!”

자기를 놀리는 것만 같아 루시아가 빽 소리 질렀다.

“진짜 그러지 마. 심장 떨려서 죽을 것 같단 말이야.”

“……내가 아직도 좋아?”

헤르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루시아는 애써 터질 것 같은 심장을 가라앉혔다.

“어. 네가 너무 좋아서…미칠 것 같아.”

아카데미에 와서 처음으로 한 고백이었다. 헤르윈이 얼굴을 살짝 굳히고 루시아에게서 서서히 멀어졌다.

“미안.”

“됐어. 네 대답 들으려고 한 거 아니야. 아니, 대답을 들으면 좋기는 한데…….”

제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루시아 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나한테 마음이 생긴 게 아니면 이렇게 행동하지 마. 괜히 사람 헷갈리니까…….”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평소엔 이런 고백을 해도 금방 자연스럽게 지나갔는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헤르윈이 뭔가 생각하고 있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모든 정리를 마쳤는지 눈이 마주쳤다.

헤르윈의 손이 다시금 그녀의 볼을 쓸었다. 이내 부드러운 볼살이 잡혔다.

“으헤?”

“너야말로 아무 데서나 얼굴 붉히지 마.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잖아.”

“내, 내하 어즈 그흐다고 그래? 어마호느 어흐 아브히그드? (내,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 너 말고는 얼굴 안 붉히거든?)”

한쪽 볼이 붙잡힌 루시아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헤르윈은 그녀의 말을 전부 이해했는지 잡았던 볼을 놓아 주었다.

파삭-

귓가에 아주 희미하게 나뭇가지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헤르윈이 고개를 홱 돌리자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얘들아! 드디어 찾았다!”

건물 뒤에서 나온 사람은 바로 비앙카였다. 그녀는 뛰어오기라도 한 건지 숨을 헐떡였다.

“비앙카! 여긴 어쩐 일이야? 먼저 안 갔어?”

“그러려고 했는데 헤르윈이 수건을 놓고 가서. 자, 여기.”

“……어.”

헤르윈은 잠시 비앙카를 탐탁잖은 눈빛으로 보다가 결국엔 그녀가 건네준 수건을 받았다.

헤르윈이 비앙카를 알게 모르게 경계하는 것만큼 루시아도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비앙카를 살폈다.

‘설마… 들었을까?’

그녀가 나타난 타이밍이 너무나도 절묘해서 제 고백을 듣지는 않았을까 걱정됐다.

“얘들아, 우리 얼른 가자. 다음 수업 역사학이야. 역사학 교수님 엄청 깐깐하시다고.”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비앙카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뭐해! 얼른 가자니까?”

비앙카가 루시아와 헤르윈 사이에 끼어 두 사람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그녀의 손이 팔에 닿자마자 헤르윈이 곧바로 뿌리쳤다.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너무 매몰찬 행동이라 비앙카는 물론이고 루시아도 놀랐다.

“다른 사람이 내 몸에 손대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헤르윈이 목소리를 내리깔며 서늘하게 비앙카를 쳐다봤다. 키 차이 때문인지 그에게서 위압감이 느껴졌다.

“아, 아니야. 내가 너무 눈치 없었네. 미안해, 다음부터 안 그럴게.”

“……그래.”

“자, 자. 진짜 이러다가 늦겠다. 루시아 우리 얼른 가자!”

비앙카는 금세 아무렇지 않게 특유의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리고 마저 잡고 있는 루시아의 팔을 이끌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종종걸음으로 뛰어가는 두 사람의 뒤를 헤르윈이 따랐다.

* * *

늦은 밤, 여자 기숙사.

늘 그랬던 것처럼 루시아는 친한 친구들과 한 방에 다 같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암… 저는 이제 그만 자러 가야겠어요.”

“뭐? 벌써? 아직 9시밖에 안 됐는데?”

“아무래도 오늘 이곳저곳 움직이느라 피곤했나 봐요. 죄송하지만, 먼저 들어갈게요.”

한 명이 빠지자 오늘 밤 모임은 슬슬 파할 분위기였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나둘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루시아도 다른 이들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가려 했다.

“저기, 루시아.”

“응?”

비앙카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잠깐 할 말이 있는데 시간 괜찮아?”

“응. 무슨 일인데?”

“음… 여기서는 말하기 곤란하니 장소 먼저 옮기자.”

의문스럽게 말을 끝내는 것이 어딘가 이상했다.

찜찜한 기분으로 그녀의 뒤를 따르던 루시아는 문득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혹시 들은 걸까?’

헤르윈에게 고백했던 것을 들은 게 아니고서야 비앙카가 자신을 따로 부를 이유가 없었다.

루시아는 자신의 안일함을 자책하며 아랫입술을 깨물고 죄인처럼 비앙카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비앙카와 함께 도착한 곳은 복도 끝에 있는 작은 창고였다.

주위를 살피던 비앙카가 조심스레 문을 닫고 창고 깊숙이 들어갔다.

“여기까지 끌고 와서 미안해.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들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아니야, 괜찮아. 할 얘기란 게 뭔데?”

침착함을 유지하는 겉모습과 달리 루시아의 속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루시아는 비앙카가 다른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부른 것이라 생각하며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았다.

“정말 미안하지만, 사실 오늘 네가 헤르윈한테 고백하는 걸 들었거든.”

조심스럽게 말하는 비앙카의 말을 듣고 루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신이시여.

“뭔가 거기서 당황하면 너희 두 사람이 곤란할 것 같아서 일부러 못 본 척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신경 쓰여서 말이야.”

비앙카가 루시아의 눈치를 슬쩍 봤다.

“분명 헤르윈을 좋아한 적 없다고 하지 않았어?”

비앙카는 오늘 계단에 앉아서 나눴던 얘기를 말하고 있었다.

루시아는 속으로 끊임없이 갈등하며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잘못 들은 거라고 둘러대면 좋을 텐데… 고백한 것을 직접 들었으니 그렇게 말할 수도 없었다.

결국 진실을 털어놓는 것이 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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