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참, 무례한 자들이로군요.”
“내 말이. 부탁을 들어주든 말든 그건 루시아 마음이지. 거절당했다고 저렇게 나오는 것도 참 웃겨.”
크리스틴과 비앙카가 여학생들의 무례한 태도에 혀를 내둘렀다.
“하하, 어쩔 수 없지. 늘 있는 일인걸.
“루시아, 웃을 일이 아니야. 네가 맨날 웃고 넘기니까 저 애들이 널 쉽게 생각하잖아.”
“맞아요, 루시아. 이럴 땐 가만히 있는 것보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하하하…….”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루시아가 허허 웃고 말자, 두 사람이 한숨을 내쉬었다.
“헤르윈도 참 힘들겠다. 사람들이 너한테까지 와서 이렇게 괴롭히는데 걔는 오죽할까?”
“오히려 그 반대이지 않을까요? 솔직히 헤르윈이 다가가기 쉬운 사람은 아니죠. 그래서 루시아에게 소개해달라는 사람이 많은 거고요.”
“그런가? 하긴, 나도 처음엔 헤르윈이 어려웠어. 유명인사라 신기하긴 했는데 그 이상으로 어려운 사람이었지.”
비앙카가 특유의 쾌활한 웃음을 보였다.
“그런데 루시아.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응? 뭔데?”
“넌 단 한 번도 헤르윈 좋아한 적 없어?”
루시아의 심장이 살짝 떨렸다. 혹시 저도 모르게 동요를 내비치지 않았을까 걱정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없어.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는 거야?”
“아니, 그냥. 헤르윈이 워낙 잘났으니까. 한 번쯤은 좋아해 봤을 것 같아서.”
“비앙카, 루시아가 헤르윈을 좋아했으면 지금 이러고 있겠어요?”
크리스틴이 비앙카를 작게 타박했다.
“오늘만 해도 헤르윈에게 말 좀 대신 전해달라는 여자들이 벌써 3명이에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다른 여자가 접근하는 걸 두고만 볼 사람이 어딨습니까?”
“그래서 지금 전부 거절하고 있잖아.”
“거절은 당연한 거고요. 루시아는 지금까지 무슨 부탁을 받아도 사람들에게 짜증 낸 적 없어요.”
사실이었다. 방금 전과 같은 상황에 닥쳤을 때 루시아는 단 한 번도 짜증이나 화를 낸 적 없었다.
보통은 에둘러 거절하면 대부분 순순히 물러서는데 가끔 그런 것도 못 해주냐고 짜증 내는 사람도 존재했다. 방금 전, 여학생들처럼.
그런 상황에서도 루시아는 시종일관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흐음… 그럼 헤르윈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 거야? 한 번쯤은 받아줄 법도 하잖아.”
“그야, 헤르윈이 싫어하니까. 그리고 애초에 진심으로 헤르윈과 친해지고 싶은 거라면 자신이 직접 말할 용기가 있어야지.”
루시아가 침착하게 설명하자 비앙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것도 그렇네.”
변명하기 위해 한 말이긴 하지만, 그리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여자들의 부탁을 거절한 것은 모두 이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누군가가 접근한다면, 그것도 자신이 소개해줘야 하는 입장이라면 당연히 그 누구라도 싫을 것이다.
티를 내지 않아서 그렇지 그런 부탁을 들을 때마다 불편했다.
루시아는 감정에 잡아먹히는 것을 늘 경계하며 최대한 객관적으로 상대하려 했다.
가끔은 그에게 접근하는 여자들에게 질투가 나 방해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허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헤르윈이 가장 싫어하는 행동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시아는 자신에게 부탁하다가 거절당한 여자들이 헤르윈에게 접근해도 가만히 있었다.
애초에 헤르윈이 그런 여자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잘 알기도 했고, 만약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가 그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제 마음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데 남의 마음이라고 제멋대로 할 수 없지 않은가.
‘물론, 그런 상황이 오면… 마음 아프겠지.’
운 좋게도 지금까지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별로 그 뒤의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쾅!
폭음 같은 소리가 들리고 세 여자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저 앞에 보이는 연무장에서 뿌연 흙먼지가 날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분명 저기 헤르윈이 있었던 것 같던데요.”
“아! 이제 보인다!”
비앙카가 뭉게구름처럼 흩어져있는 흙먼지를 가리켰다. 그 안으로 두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하나는 180cm에 가까운 큰 덩치였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작은, 160cm 중반으로 보이는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다.
와아아아!
연무장을 둘러싸고 있던 학생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휙-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놀랍게도 흙먼지가 반으로 갈려 나갔다.
카가각!
두 검이 맞부딪치며 남아있던 흙먼지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면서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우와, 리디아 공녀 대단하다.”
“저 헤르윈이랑 막상막하라니. 대단하네요.”
1학년 검술학 내에서 1, 2등을 나란히 차지한 사람이 바로 헤르윈과 리디아 공녀, 아리스타였다.
두 사람 모두 놀랍게도 소드 익스퍼트의 경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큭!”
그때, 승패가 갈렸다.
약점을 먼저 파고든 사람은 헤르윈이었다. 이번 승리는 그의 차지였다.
치열했던 승부가 끝나자 그걸 구경하고 있던 학생들이 박수를 쳤다.
두 사람은 잠시 숨을 고른 뒤 서로를 향해 인사를 하고 얘기를 나눴다.
피드백을 나누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웃고 있는 것을 보면 꽤나 즐거워 보였다.
“선남선녀가 다름없네. 어쩜 저렇게 잘 어울리지?”
“두 사람 모두 너무 잘나서 질투도 안 나. 하늘에서 내려준 인연 같아.”
“보면 페네우스 공자와 리디아 공녀가 더 잘 어울리지 않아? 아그네스 영애랑 너무 차이 나잖아.”
루시아처럼 두 사람을 구경하던 다른 학생들이 헤르윈과 아리스타가 잘 어울린다고 얘기하며 은근슬쩍 루시아를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어서, 듣고 싶지 않아도 어렴풋이 들려왔다.
하지만, 주변이 소란스러웠던 탓에 그것을 들은 사람은 루시아밖에 없었다.
그들의 말에 상처받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헤르윈과 아리스타를 마음대로 엮는 것에는 딱히 불안하지 않았다.
‘질투할 만하네.’
오히려 흑심을 품고 헤르윈에게 다가가는 여자들을 질투하면 질투했지, 아리스타에게는 그런 감정 따윈 들지 않았다.
“하아, 대련했더니 목이 타네.”
“더워! 차가운 거 마시고 싶다.”
수업을 마친 일행이 서서히 루시아네가 있는 곳으로 왔다.
브라이언과 에단이 먼저 계단 쪽으로 다가왔다.
“오래 기다렸어?”
브라이언이 흘러내리는 땀을 수건으로 닦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 또한 헤르윈 못지않은 미남이어서 그런지 주변 여학생들이 조그맣게 환호성을 질렀다.
“그렇게 오래 기다리진 않았어.”
“수고 많으셨습니다.”
비앙카와 크리스틴이 두 사람을 반겼다.
“아리따운 아가씨들을 이 뙤약볕에서 기다리게 하다니 면목 없군.”
“으, 그런 낯 간지러운 소리는 저기 저 여자들한테 가서 해.”
“……….”
브라이언의 느끼한 발언에 비앙카가 진저리를 치며 소름 돋은 팔을 쓸어내렸고, 크리스틴은 드물게 경멸 어린 눈초리로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는 하는 행동과 외모에 걸맞게 여자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여자를 꾀려는 행동을 본능적으로 하곤 했다. 첫날 넘어지려는 루시아를 잡으면서 보였던 느끼한 행동도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그래도 초반을 제외하곤 일행들에게 그런 식으로 행동한 적은 없었다.
자신의 유혹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친구로 지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지 그는 헤르윈과 에단처럼 평범한 남학생답게 행동했다.
물론 가끔 무의식적으로 행동할 때가 있긴 했다.
이번에도 순전히 농담이었는지 브라이언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들썩이는 정도에 그쳤다.
“두 사람 모두 고생 많았어.”
루시아가 뒤늦게 그들을 맞이했다. 땀을 닦던 브라이언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루시아의 손에는 물병이 들려있었다.
“괜찮다면 그것 좀 마셔도 될까?”
“이거? 내 입이 닿았던 건데 괜찮겠어?”
“당연히 괜찮지. 지금 목이 엄청 타거든.”
“하긴 목마르겠구나. 자, 여기.”
루시아는 흔쾌히 물병을 브라이언에게 건넸다.
“다 마시지 말고 내 것도 남겨줘!”
옆에서 더워서 죽으려고 하는 에단이 브라이언을 붙잡고 늘어졌다.
“알겠으니 잠시만 기다려.”
브라이언은 뚜껑을 열고 물을 마시기 위해 물병을 기울였다. 그의 입술이 물병 입구에 닿으려는 찰나.
“아!”
갑자기 누군가가 물병을 가로챘다.
고개를 돌리니 언제 왔을지 모를 헤르윈이 서 있었다.
그는 브라이언이 마시려고 했던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브라이언과 에단이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크, 살 것 같네.”
“이건 대체 무슨 경우야.”
“그걸 다 마시면 어떡해!”
태평하게 한숨을 돌리는 헤르윈 옆으로 브라이언과 에단이 그를 째려봤다.
헤르윈은 붉은 눈을 슬쩍 굴려 자신을 원망하는 둘을 보다가 루시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물병을 그녀의 손에 들어가게끔 가볍게 던졌다.
“먼저 마시는 사람이 임자지.”
“이거 완전 생양아치 아냐.”
“이 나쁜 자식! 하나밖에 없는 물을 어떻게 다 마실 수가 있어!”
헤르윈은 날 것 그대로의 비난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화낸들 어찌하리 이미 물은 사라지고 없는데.
“헤르윈이 잘못했네. 자, 이거라도 마실래?”
헤르윈의 뒤쪽으로 아리스타가 나타났다. 그녀의 손에 물병이 들려있자 에단이 환호했다.
“역시 아리스타! 속 좁은 저놈이랑 비교도 안 된다니까?”
“고마워, 아리스타.”
에단이 벌컥벌컥 물을 마시고 있을 때, 옆에서 브라이언이 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리스타가 피식 웃으며 하지 말란 의미로 브라이언을 툭 쳤다. 그리고는 승부욕 가득한 시선으로 헤르윈을 쳐다봤다.
“오늘은 비록 졌지만, 다음번엔 반드시 이기고 만다.”
“어디 열심히 노력해봐. 그래봤자 나한테는 안 되겠지만.”
헤르윈이 도발하듯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무뚝뚝한 성격상 그가 이렇게 농담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리스타와 꽤나 친하다는 증거였다.
아리스타 리디아. 그녀와 같은 반이지만, 별다른 접점이 없어서 이렇다 할 얘기를 나눠본 적은 없다.
남학생은 검술 수업으로 그녀와 친해졌지만, 나머지 세 여자는 아니었다. 그냥 오가며 인사하는 같은 반 친구 정도?
아리스타를 보고 있자니 그녀가 왜 남녀불문하고 인기가 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예쁘고, 머리 좋고, 운동 잘하고 성격이 털털하기까지. 뭐하나 모난 구석이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아리스타를 보고 있던 그때, 눈이 딱 마주쳤다.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라일락처럼 부드러운 보랏빛 눈과 마주칠 때면 왠지 모르게 그녀에게 빨려드는 것 같았다.
보통 눈이 마주치면 서로 시선을 돌리거나 무안하게 웃는데 그녀는 이상하게도 눈이 마주칠 때마다 늘 뚫어져라 보곤 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아리스타가 자신을 응시하자 결국 참다 못한 루시아가 물었다.
“저기…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어?”
“아니, 계속 쳐다보길래 뭐가 묻었나 싶어서…….”
루시아가 무안하게 웃어보였지만, 아리스타는 멀뚱히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괜히 더 어색해진 것 같아 진땀이 흘렀다.
“사실 입학 첫 날부터 느꼈는데.”
가만히 있던 아리스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루시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아는 사람이랑 많이 닮았어.”
“아는 사람? 누구……?”
“음, 사실 이름은 잘 모르고, 그냥 한 번 마주친 적 있던 사람인데… 왠지 모르게 너랑 닮은 것 같아. 특히 이 눈이.”
아리스타의 손이 루시아의 눈가로 다가갔다.
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아리스타의 보랏빛 눈동자가 온몸을 샅샅이 훑는 것 같았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눈 진짜 예쁘다. 꼭 맑은 호수 같아.”
“고, 고마워…….”
칭찬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가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서 그런 것인지 괜히 부끄러워져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리스타! 우리 이제 슬슬 가자!”
그때, 저 멀리서 아리스타의 일행이 그녀를 불렀다.
“아, 나는 이만 가봐야겠다. 나중에 또 얘기하자.”
아리스타는 루시아에게 인사를 남기고 일행이 있는 곳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