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29)

<15화>

입학식이 끝나고 루시아와 헤르윈은 배정받은 반으로 향했다.

“같은 반이라 다행이다. 그치?”

“그러게 이런 우연이 다 있네.”

두 사람은 다행히도 같은 반이었다.

‘한 달간 빈 소원이 이루어졌어!’

루시아는 속으로 환호했다.

같은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부터 오늘이 오기 전까지 매일매일 헤르윈과 같은 반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었다.

하늘이 제 소원을 이루어준 것만 같아 날아갈 것처럼 기뻤다.

“어? 공녀도 우리랑 같은 반인가 보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자리에 앉아있는 리디아 공녀가 눈에 띄었다.

입학식에서도 그랬지만, 그녀는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저걸 다 받아주다니. 참 대단하군.”

헤르윈이 안타깝단 투로 리디아 공녀를 동정했다.

사실 헤르윈이 냉정히 굴지 않았다면 그 또한 공녀와 같은 신세였을 것이다.

입학식 전에 이미 한차례 저런 일을 겪지 않았던가.

“어?”

그때, 사람들 사이에 있던 리디아 공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루시아를 보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너무 뚫어져라 쳐다봐서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루시아, 안 오고 뭐 해.”

“어? 어어, 가.”

헤르윈이 부르고 나서야 루시아는 리디아 공녀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헤르윈은 어느새 뒷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남들 눈에 띄기 싫어하는 그의 성격이 잘 반영된 선택이었다.

“꺄악!”

루시아가 돌연 비명을 내질렀다. 발에 무언가가 걸려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진 것이다.

어떻게든 넘어지지 않기 위해 팔을 버둥거리던 찰나 누군가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괜찮아?”

“고, 고마워…….”

“뭘, 예쁜 얼굴에 상처 나지 않아서 다행이야.”

루시아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저를 잡아준 사람을 확인했다.

그 사람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의 남색 머리카락과 금안이 묘하게 어우러진 미남이었다.

헤르윈만큼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뛰어난 외모에 루시아는 내심 속으로 놀랐다. 잠시 그를 감상하던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저기… 손 좀…….”

그는 아직도 루시아의 손과 허리를 안고 있었다. 그가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 손을 뗐다.

“이런, 나도 모르게 계속 붙잡고 있었네. 불쾌했다면 미안해.”

보통 다른 사람이 이런 행동을 했다면 불쾌했을 텐데, 이상하게도 그런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난 브라이언 체르시스라고 해. 같은 반인데 앞으로 잘 지내보자.”

브라이언이 자신을 소개하자 루시아도 덩달아 이름을 밝혔다.

“나는 루시아 아그네스야. 나야말로 잘 부탁해.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줘서 고마워.”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 뭐. 그런데… 뒤에는 네 친구?”

브라이언의 말에 뒤를 돌아보자 헤르윈이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어? 헤르윈, 언제 왔어?”

분명 넘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저 멀리 앉아있었는데.

“방금 전에. 넘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응, 체르시스 영식이 날 잡아줬어.”

해맑은 루시아를 사이에 두고 남자들의 눈이 마주쳤다.

그들 사이에 묘한 긴장감과 함께 아주 작은 스파크가 튀었다.

눈을 가늘게 뜨던 브라이언은 이내 유순하게 웃으며 헤르윈에게 손을 내밀었다.

“브라이언 체르시스야. 너도 앞으로 잘 부탁한다.”

“……헤르윈 페네우스.”

“오, 역시 페네우스 가문이었구나. 어쩐지 기백이 남다르더라니.”

브라이언이 작은 감탄사를 날렸다. 그저 농담이었을 뿐인데 헤르윈은 기분 나쁜지 콧잔등을 찌푸렸다.

“루시아, 가자. 곧 교수님 오시겠어.”

“응! 체르시스 영식, 우리 나중에 봐.”

루시아는 헤르윈의 손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자리로 향했다.

“조심 좀 해. 아카데미에 와서도 덜렁댈 거야?”

“더, 덜렁대기는 누가! 가방에 발이 걸린 걸 어떡해.”

자리에 앉자마자 헤르윈이 잔소리를 퍼부었다. 창피해진 루시아가 얼굴을 붉혀도 그는 여전히 마땅찮은 눈치였다.

“그게 덜렁거리는 거지. 나 참, 네가 이러니까 나랑 루카스 형이 눈을 못 떼지.”

“……….”

애 취급하는 것 같아 루시아는 기분이 상했다.

헤르윈에게는 여자로 보이고 싶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자신을 헨리 취급했다.

어떨 때는 헨리보다 어린아이로 대하는 것 같아 속상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그가 계속 자신을 주시했다는 사실이 마음을 들뜨게 했다.

헤르윈 한정으로 변덕스러운 제 감정이 야속하기만 했다.

얼추 시간이 지나고 하나둘 학생들이 각자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대다수의 사람이 이곳을 힐끔거렸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루시아와 헤르윈 주변에 남아있는 빈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저 자리만 차지하면 헤르윈과 친해질 기회가 생기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용기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한 명이라도 올 법한데 왜 망설이나 싶어 옆을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헤르윈, 인상.”

헤르윈의 얼굴이 꼭 화난 사람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남들의 눈에는 그가 화난 것처럼 보이겠지만, 루시아는 잘 알았다. 그가 간혹 아무 생각 없이 얼굴을 찌푸린다는 것을.

“인상 피라니까?”

루시아가 다시 한번 말하자 그의 인상이 조금이나마 펴졌다.

“오, 여긴 자리 비었네.”

활기찬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헤르윈 앞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이마가 훤히 드러나는 빨간 머리카락과 평범한 갈색 눈동자를 지닌 그는 명랑한 목소리에 걸맞게 개구진 인상이었다.

“실례지만, 혹시 여기 자리가 비었나요?”

“응? 그럼, 그럼. 아무도 없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의 옆으로 한 여학생이 다가왔다.

단아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여학생이었다.

연한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는 단정히 늘어뜨린 긴 머리를 뒤로 살짝 남겼다. 가느다란 눈매가 잘 어울리는 미녀였다.

“고맙습니다, 자리가 없어서 곤란하던 참이었어요.”

“아니야, 고맙긴 뭘. 난 에단 벨루나! 벨루나 자작가 출신이야.”

“저는 크리스틴 디오레스입니다. 벨루나 영식,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그래! 앞으로 잘 지내보자! 뒤에 너도!”

크리스틴과 대화를 나누던 에단이 뒤를 돌았다.

저도 모르게 둘의 대화를 엿듣던 루시아는 에단이 자신을 가리키자 화들짝 놀랐다.

“나?”

“응! 계속 쳐다보길래 대화라도 하고 싶은 건가 했는데. 아니야?”

“아, 그건… 미안. 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어.”

“괜찮아, 괜찮아. 방금 내 이름 들었지? 너는 이름이 뭐야?”

“루시아 아그네스. 여기 옆에는 헤르윈 페네우스고.”

“오! 둘이 친구였어? 나랑 크리스틴처럼 처음 보는 사이인 줄 알았어.”

“우리는 소꿉친구야.”

“그래? 친구랑 같은 반이 되다니 운이 좋았네?”

에단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어색함 없이 대화를 이끌었다. 그의 분위기에 크리스틴은 물론이고 루시아까지 녹아들었다.

조용히 있던 헤르윈도 에단이 꽤나 마음에 드는지 어느새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런데 페네우스라면 분명 북부 공작가, 맞죠?”

어느 정도 어색함이 많이 사라졌을 때, 크리스틴이 물었다.

헤르윈과 친해지려고 건넨 질문보다는 순전한 궁금증에서 나온 말에 가까웠다.

헤르윈도 그 점을 느꼈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렇군요, 설마 페네우스 영식께서 저희 나이대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는 너야말로 꽤나 유명한 가문으로 알고 있는데.”

“저 말씀인가요? 저희야 페네우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죠.”

“그럴 리가, 디오레스라면 제국 내 유명한 대상단을 이끄는 것으로 유명한 것을.”

“어머,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리스틴이 부드럽게 웃었다.

“이야, 이렇게 유명한 사람들이랑 친해지게 되다니 가문의 영광이네! 사실 나는 완전 깡시골 출신이라 귀족사회에 대해 잘 모르거든!”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는 부분을 에단은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실제로 귀족 간의 계급 차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인지 그는 크리스틴이나 헤르윈의 정체를 알았음에도 일관된 태도를 보였다.

“자, 모두 모였겠지?”

교수님의 등장으로 어수선했던 교실이 정리되었다. 교수는 자기소개를 시작으로 앞으로 학급 일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아카데미는 나름 순조롭다고 말할 수 있었다.

* * *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도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처음엔 어색했던 것도 잠시 아이들은 각자 성격에 맞는 친구들끼리 모여 무리를 형성했다.

삼삼오오 짝지어 형성된 무리 중에서는 헤르윈의 무리가 가장 컸다.

외모, 실력, 재력 등 모든 것을 갖춘 헤르윈은 누구나 친해지고 싶어 했다.

그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리디아 공녀의 인기또한 하늘을 치솟았지만,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그녀에 비해 헤르윈은 곁을 잘 내주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친해지기 어려운 유명인이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말을 걸어보고 싶은 게 사람 심리이지 않은가.

사람들은 헤르윈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그들 무리에 끼었지만, 헤르윈이 정해둔 일정 선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했다.

그의 선 안에 들어온 사람은 학기 첫날, 이야기를 나누었던 에단과 크리스틴, 브라이언, 그리고 뒤늦게 친해지게 된 비앙카 로렌스 정도였다.

처음에는 헤르윈이 브라이언을 탐탁잖게 여기는 것 같더니 지금은 사이좋게 지내는 편이었고. 비앙카 로렌스는 그녀가 먼저 다가와서 친해지게 된 케이스였다.

그녀는 크리스틴처럼 헤르윈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점 때문에 헤르윈 역시 그녀를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물론 루시아도 헤르윈 무리의 대표 일원이었다.

헤르윈과 가장 친한 사람이 바로 그녀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학기 초에는 루시아와 헤르윈에 대해서 수군거리는 사람도 많았다.

두 사람이 맨날 붙어있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둘이 사귀는 줄로만 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오해였다는 것을 깨닫고 많은 사람이 루시아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귀여운 외모와 유순한 성격에 매료되어 친해지려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녀를 통해 어떻게든 헤르윈과 인연을 만들어 보려는 아이들이었다.

특히 헤르윈이 애인이 없다는 것을 안 여학생들이 루시아에게 소개 좀 해달라 조르는 경우가 많았다.

마치, 이처럼 말이다.

“저기, 루시아. 혹시 페네우스 공자 좀 소개해줄 수 있어?”

“너희 둘이 엄청 친하다고 들었어. 우리도 페네우스 공자랑 친해지고 싶은데 아무래도 말 걸기가 쉽지 않아서…….”

“응? 이렇게 부탁할게!”

루시아가 웃는 얼굴로 앞에 있는 이들을 바라봤다. 이런 부탁만 벌써 20번째였다.

헤르윈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한 여학생들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부담스럽게 루시아를 바라봤다.

“미안해, 아무래도 그건 좀 힘들 것 같아.”

“아…….”

아쉬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왜? 둘이 소꿉친구라며. 이런 부탁쯤이야 너한텐 쉽지 않아?”

“그래도 안 될 것 같아. 미안해. 헤르윈이 이런 걸 싫어하거든. 정 친해지고 싶으면 직접 말해보는 게 어때? 헤르윈은 웬만하면 잘 받아줄 거야.”

부드러우면서도 유한 어조로 다시 한 번 그들의 부탁을 거절했다.

아무리 부탁해도 그녀가 들어주지 않을 것이란 걸 직감한 여학생들이 얼굴을 굳혔다.

“쳇, 페네우스 공자랑 친하다고 잘난 척하는 거야, 뭐야.”

기분이 상했는지 한 여학생이 대놓고 다 들리게 말했다. 순간 루시아가 표정관리를 하지 못하고 얼굴을 굳혔다.

“야, 너 지금 뭐라 그랬어.”

그녀를 대신하여 옆에 있던 비앙카가 화를 냈다.

“내가 뭘? 혼잣말한 건데. 얘들아, 우리 이만 가자.”

“가긴 어딜 가! 너희 거기 안 서!”

비앙카가 화를 내며 멀어지는 여학생들을 붙잡았지만, 그들은 이미 떠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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