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응? 뭔가 시끄럽네?”
문득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레스의 시선을 따라 아그네스 남매도 고개를 돌렸다.
“유명 인사라도 들어왔나?”
“그러게. 사람이 모여 있네.”
아레스의 말처럼 사람들이 누군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저거 보니까, 꼭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가 생각난다.”
“으, 그런 얘기 하지 마. 상상만 해도 끔찍하니까.”
루카스와 아레스가 신입생 시절을 회상하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눴다.
오직 루시아만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주인공이 누구인지 살폈다.
“헤르윈!”
루시아가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의 말에 루카스가 반응을 보였다.
“뭐? 헤르윈?”
“……헤르윈? 그게 누구야?”
“오빠, 저기 헤르윈이 있어!”
루시아는 서둘러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분명 인파에 파묻혀 있던 사람은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루시아는 고개를 여기저기 빼며 어떻게든 파고들 구멍을 찾으려 했다.
“자, 잠시만요……!”
어찌 저찌 들어가는 건 성공했는데 도무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루시아! 너 어딨어!”
뒤에서 루카스가 루시아를 불렀다. 그런데 이미 그녀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였다.
“아, 아앗! 밟지 마세요.”
또래 중에서도 작은 편에 속하는 루시아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 파묻히고 말았다.
“어, 어떡하지?”
괜히 나선 건가 싶은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헤르윈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싫어하니 어떻게든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앗!”
갑자기 주변의 압박이 더욱 강해졌다. 몇몇 학생들이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에게 손목이 붙잡힌 루시아는 강한 힘에 이끌려 순식간에 인파 속에서 빠져나왔다.
“웁!”
“역시 너였네. 여기서 뭐 해?”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쳐 코를 문지르던 루시아가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활짝 웃었다.
“헤르윈!”
루시아보다 한참이나 큰 헤르윈이 황당하단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뭐야, 저 여자는.”
“페네우스 공자랑 아는 사이인가?”
“설마 애인?”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헤르윈이 혀를 찼다.
그는 겉옷을 벗곤 루시아의 머리에 덮었다.
갑자기 앞이 가려져 루시아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헤르윈이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그의 주위에 짙은 살기가 넘실거렸다. 어떻게든 친해져 보려 접근했던 사람들이 창백해진 안색으로 슬금슬금 물러섰다.
사람들이 떼거지로 몰려왔을 때부터 헤르윈은 몰려오는 짜증을 애써 참아오던 참이었다.
아무리 짜증이 나도 웬만하면 좋게 넘어가려 했는데, 루시아가 그들 사이에 껴서 괴로워하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헤르윈이 루시아의 손을 잡고 느슨해진 사람들 사이를 지났다.
“어? 형.”
뒤늦게 루카스를 발견한 헤르윈이 서늘했던 표정을 풀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너, 이 자식. 누군가 했더니 너였구나? 제도엔 언제 내려왔어?”
“어제저녁에 도착했어. 좀 더 일찍 도착했으면 형네 놀러 가는 거였는데.”
“그래? 그나저나 못 본 사이에 키가 또 컸네. 분명 저번에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루카스가 입을 삐죽이며 헤르윈 옆에 나란히 서서 키를 대봤다. 그래도 아직 루카스가 더 크긴 했다.
“나는 한창 자랄 나이인데 뭐. 무릎이 아픈 걸 보면 여기서 더 클 것 같기는 해.”
“그만 커. 징그럽다, 이제.”
“형을 따라잡으려면 여기서 멈출 수는 없지.”
헤르윈과 루카스는 상당히 오랜만에 만나는지라 그간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졸지에 옆에 남겨지게 된 루시아는 시야를 가리는 헤르윈의 블레이저를 벗고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했다.
바로 앞에는 루카스와 이야기를 나누며 크게 웃는 헤르윈이 보였다.
‘또 멋있어졌네.’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그는 한층 더 멋있어졌다.
턱선이 날렵해지고, 적당하게 자른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따라 찰랑거렸으며, 붉은 눈을 품은 날카로운 눈매는 루카스와 대화를 나누면서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어쩜 날이 가면 갈수록 더 멋있어지는 걸까. 헤르윈이 너무나도 잘나서 도저히 이 마음을 접을 수가 없었다.
두근두근, 기분 좋은 울림이 점점 퍼지며 마음을 들뜨게 했다.
“혹시, 저 신입생이 페네우스 공자인가?”
“꺄악!”
루시아가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어느새 다가온 아레스가 귓가에 속삭인 것이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두 남자의 고개가 동시에 홱 돌아갔다.
루시아는 애써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네? 네, 맞아요. 헤르윈 페네우스에요.”
“역시, 맞구나. 전에 페네우스 공작님을 뵌 적 있었는데 공작님과 똑같이 생겼네.”
“공작님과 많이 닮긴 했죠.”
기우뚱.
아레스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 갑자기 무게가 뒤로 쏠렸다. 누군가가 뒤에서 끌어당긴 것이다.
그와 동시에 루카스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희번뜩 뜬 눈으로 아레스를 노려봤다.
“너, 어디서 은근슬쩍 내 동생한테 접근해!”
“이런 들켰나?”
“내 동생에게서 떨어져! 아니, 너는 이제 앞으로 접근금지다.”
처음에 그리했던 것처럼 루카스는 아레스를 잔뜩 경계했고, 아레스는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로 허허 웃으며 루카스에게서 요리조리 도망쳤다.
“저 사람은 대체 누구야?”
귓가에 나직한 미성이 들렸다.
습격하듯 들려오는 헤르윈의 목소리에 루시아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오빠 친구분이셔. 아레스 리디아. 너랑 같은 공작 가문인 리디아야.”
헤르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불편했던 심기를 조금 풀며 아레스를 빤히 쳐다봤다.
“리디아라. 그래서 보라색 눈동자였군.”
“응, 나도 설마 오빠가 리디아 공자님이랑 친할 줄은 몰랐어.”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루시아가 키득거리며 웃자, 헤르윈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
“아무리 루카스 형 친구라고 해도 조심해.”
“응? 왜?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그냥 내 말 들어. 착하고 나쁜 거를 떠나서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아.”
“음…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얘들아, 너희 이제 슬슬 입학식 치르러 가야 할 것 같은데.”
루카스에게서 도망치던 아레스가 시계를 가리켰다. 좀 있으면 입학식이 시작할 시간이었다.
“그렇네, 우린 이만 가자.”
“응.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오빠 나중에 봐.”
헤르윈과 루시아가 떠나려고 하자 루카스가 소리 질렀다.
“루시아!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나한테 찾아와! 알겠지?”
루카스에게 붙잡힌 아레스도 덩달아 루시아를 불렀다.
“혹시 내 동생 만나면 안부 인사 좀 대신 전해줘! 내 이름 대면 받아줄 거야! 심심하면 날 찾아오고!”
“루시아가 왜 널 찾아가!”
루카스가 길길이 날뛰며 아레스에게 덤벼들었다.
“……루시아, 가자.”
상황을 지켜보던 헤르윈은 인상을 찌푸리다가 루시아의 어깨를 감싸고 입학식 장소로 향했다.
* * *
“사람 엄청 많다.”
루시아가 입을 벌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입학식이 진행되는 강당에는 많은 학생으로 북적거렸다.
“우린 저기로 가자.”
“응.”
루시아는 헤르윈과 같이 적당히 서 있을 장소를 물색했다.
그런데 헤르윈과 같이 움직이니 주변의 시선이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부담스러운데, 당사자인 헤르윈은 오죽할까.
“헤르윈.”
“왜?”
“너, 이제 그건 괜찮아?”
주변에서 들을까 싶어 루시아가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헤르윈이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였다.
“사람들 시선 말이야. 집중 받는 거 싫어하잖아.”
“아아, 그거 말이지.”
헤르윈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은 지가 언젠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아.”
“그래도 오늘은 평소보다 사람들 시선이 더 쏠리잖아.”
헤르윈이 오랜 상담과 치료로 예전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루시아의 고운 이마에 주름이 생기자 헤르윈이 무심하게 허리를 폈다.
딱.
“으앗! 아파!”
경쾌한 소리와 함께 루시아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앞이나 봐. 곧 있으면 시작할 것 같으니까.”
“그냥 말로 하지. 꼭 때려야겠어?”
루시아는 괜히 입술을 삐쭉 내밀며 욱신거리는 이마를 문질렀다.
뒤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렸지만, 헤르윈은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씨이, 웃지 마.”
“큼, 웃긴 누가 웃었다고 그래.”
덤덤한 말투와 달리 그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루시아가 한 번 더 불만을 표했지만, 헤르윈은 시치미를 뚝 뗐다.
그리고는 앞이나 보라며 루시아의 고개를 돌렸다.
‘다람쥐 같기는.’
또다시 웃음이 나올 것 같아 헤르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에도 루시아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오랜만에 루시아와 루카스를 만나서 그런지 이처럼 실없이 웃음이 나오는 건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또다시 작게 웃던 헤르윈은 앞에 루시아가 가만히 있지 않고 좌우로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너 뭐해?”
루시아의 행동을 지켜보던 헤르윈이 물었다.
“헤르윈, 혹시 저기 금발 여자 보여?”
“금발 여자가 한둘이어야지. 누굴 말하는 건데?”
“음, 저기!”
루시아가 까치발을 들며 저 멀리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헤르윈은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며 금발의 여자를 찾았다.
“혹시,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여자?”
“응! 저 애가 혹시 리디아 공녀 아닐까?”
“확실히 보라색 눈동자이긴 해.”
“아! 역시! 리디아 공자님이랑 닮았다 했어!”
방금 전에 마주친 아레스의 얼굴이 문득 보인 것 같더니, 역시 그의 동생이 맞았다.
“대신 안부 인사 전해달라고 했는데… 가서 말이라도 걸어봐야 하나?”
“아서라. 다른 사람들 말 들어주느라 정신없어 보여.”
헤르윈이 큰 키를 이용해 리디아 공녀의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그래?”
“그리고, 그건 그냥 한 말인 것 같던데 굳이 들어줄 필요가 있을까?”
“그래도 오빠 친구분인데…….”
루카스가 그렇게 스스럼없이 대한 것을 보면 상당히 친한 사이일 것이다.
“이왕이면 친하게 지내는 게 좋잖아.”
“……그냥 얌전히 있어. 인연이면 언젠가 닿겠지.”
루시아가 걸음을 옮기려 하자 헤르윈의 커다란 손이 작은 어깨를 잡았다.
아주 사소한 행동에도 심장이 무너질 듯 뛰었다. 루시아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아닐까 싶어 서둘러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다행히 어깨에 닿은 헤르윈의 손이 떨어졌다.
[아, 아. 제49회 황실 아카데미 입학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신입생 여러분들은…….]
음성 증폭 마도구를 이용해 커진 목소리가 강당에 울려 퍼졌다.
입학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