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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12/129)

<12화>

“어? 네잎클로버네? 네가 찾은 거야?”

“아니, 헤르윈이 줬어.”

“그래?”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루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너 왜 갑자기 헤르윈을 좋아한다고 한 거야? 그전까지 그런 말 없었잖아.”

루카스는 제 동생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상황이 영 불편했다. 그래도 상대가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인지라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동생의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가 궁금했다.

“……헤르윈이 나 구해줬어.”

“그때 그 개로부터 구해줬다는 거지?”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이 어느덧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진심으로 헤르윈을 좋아하는 것만 같아 루카스는 큰 충격이었다.

“허… 이거 참…….”

루시아는 옆에서 제 오빠가 이상한 반응을 보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헨리가 가지고 노는 오르골을 쳐다봤다.

네잎 클로버를 보고 있으면 영웅처럼 등장하던 헤르윈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루시아한테서 떨어져!’

자신을 지켜주던 듬직한 등과 긴장으로 물들어있던 그의 얼굴, 그리고 전의를 불태우던 붉은 눈까지.

이제는 헤르윈이란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 얼굴에 열이 올랐다.

루시아는 괜히 몸을 배배 꼬다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헤르윈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많이 아프지 않아야 할 텐데…….”

어제 자신의 고백을 듣고 낯빛이 하얗게 질린 헤르윈이 마음에 걸렸다.

처음엔 고백을 거절당했단 사실에 너무나도 가슴 아프고 눈물 날 것 같았지만, 그보다도 겁에 질린 듯한 그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헤르윈이 부디 아프지 않기를 바라며 루시아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 루카스와 헨리가 자리를 이탈해도 루시아만은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 * *

“……그런 일이 있었구나.”

출입이 통제된 헤르윈의 방.

방에는 의사와 공작 부부, 그리고 헤르윈이 있었다.

그들은 오랜 시간 회유와 설득 끝에 그간 헤르윈이 앓고 있던 트라우마를 직접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헤르윈은 자신이 직접 말해놓고도 혹시 질타가 날아오지 않을까 걱정됐다.

여태껏 제 고통을 숨겨온 건 저를 괴롭혔던 이들이 가신의 자제들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좋든 나쁘든 그들과는 계속 마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언젠가 자신이 공작위를 물려받을 테고, 자신을 괴롭혔던 이들 또한 제 부모의 뒤를 따라 페네우스 가의 가신이 될 터이니 섣불리 관계를 악화시킬 수 없었다.

이제는 그들도 더 이상 예전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고, 전과는 달리 자신을 어려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쑥불쑥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에 너무나도 괴로웠다.

그러나 헤르윈은 여태껏 그들과 마주해도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해왔다.

물론 반사적으로 그들에게 까칠하게 대하곤 했지만,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방어기제에 불과했다.

모두 자신만 참으면 해결될 일.

헤르윈은 자신이 이해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겨우 이런 일로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을 알면 부모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그까짓 일로 힘들어한다며 미래의 페네우스를 통솔할 자격이 없다고 비판할 것만 같았다.

공작가의 후계자인 이상, 절대 유약해선 안 된다. 하일과 스칼렛이 누누이 말하지 않았던가.

제게 날아올 말들을 각오하며 헤르윈이 눈을 질끈 감았다. 여린 어깨가 파들파들 떨렸다.

“그동안, 혼자서 고생 많았구나.”

문득 온기가 느껴졌다. 눈을 뜨자, 바로 코앞에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평소 무뚝뚝한 아버지였던 하일이 자신을 안아오자 헤르윈은 크게 당황했다. 그러자 이번엔 좀 더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엄마랑 아빠가 너무 늦게 알아채서 미안해. 많이 힘들었지?”

스칼렛이었다. 졸지에 헤르윈은 부모님 사이에 끼게 되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든든한 손과 등을 토닥이는 따뜻한 손길. 별다른 위로가 없어도, 헤르윈에겐 충분했다.

헤르윈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눈물이 방울방울 흘렀다.

“엄마… 아빠…….”

닭똥 같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하일과 스칼렛은 그간 자신의 아들이 이토록 힘들어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헤르윈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꼭 끌어안아 주었다.

시간이 지나, 좀 진정이 된 후, 헤르윈은 의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꽤나 오랫동안 앓아온 트라우마입니다. 하루아침 만에 사라질 일이 아니라는 거죠. 저와 상담을 통해서 점차 극복해나가기로 해요.”

“응, 알겠어.”

“지금 몸은 좀 어떠십니까? 어제처럼 심장이 빨리 뛴다거나, 속이 울렁거리지는 않으신가요?”

“지금은 괜찮아.”

“그렇군요, 그러면 아그네스 자제분들과 만나도 괜찮으실까요?”

“어…….”

헤르윈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는 루카스와 루시아의 얼굴을 떠올렸다.

루카스까진 괜찮았다. 하지만 루시아를 떠올리니 다시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걸 딱 잘라서 불쾌하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기분이 좋은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불편한 것이, 뭐라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모르겠어…….”

“혹시 어제처럼 불편한 느낌이 드시나요?”

헤르윈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면, 만나도 괜찮으실까요?”

그는 잠시 고민한 뒤에 겨우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일단 오늘은 푹 쉬시고 혹시 갑자기 불안감을 느끼신다면 저를 불러주십시오.”

“응, 그렇게 할게.”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의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일은 의사와 같이 복도로 빠져나왔다.

“상태는 괜찮은가?”

“네, 도련님께선 강한 분이십니다. 분명 꾸준히 상담을 받으신다면 금방 극복해내실 겁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다행이네.”

“다만 당분간은 도련님과 마찰이 있었던 아이들과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게 뭐지?”

“예상대로 도련님께서 쓰러지신 계기가 아그네스 영애의 고백 때문인 것 같습니다.”

루시아를 언급하자 하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도련님께서 아그네스 영애를 많이 꺼리시지 않아 다행이지만, 이번과 같은 일이 또 일어날 수 있으니 주의를 기울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흠, 그렇군…….”

“제가 왜요?”

두 사람의 대화에 앳된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시선을 밑으로 내리니 루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서 있었다.

“헤르윈 많이 아파요?”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거니?”

화들짝 놀란 의사를 뒤로하고 금세 평정을 되찾은 하일이 루시아에게 물었다.

“아까 전에요. 화장실 갔다가 왔어요.”

루시아는 순진하게 자신이 나온 곳을 가리켰다.

“헤르윈 많이 아파요? 그래서 저랑 못 만나는 거예요?”

루시아가 오르골을 꼭 껴안으며 물었다. 커다란 벽안에는 그 나이대에 맞지 않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일은 잠시 루시아를 내려다보다가 무릎을 굽혀,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헤르윈이 많이 걱정되니?”

“네, 어제 얼굴이 안 좋았잖아요. 혹시… 저 때문에 그런 거예요?”

루시아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신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음을 알아챘다.

“그런 거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내일이면 다시 건강해질 거야.”

“정말요? 다행이다…….”

어두웠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얼굴에 감정이 훤히 드러나는 아이가 귀여워 하일은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시아, 혹시 나와 약속 하나 할 수 있을까?”

“약속이요?”

“그래, 어제 네가 사람들이 다 보는 곳에서 헤르윈에게 고백했잖니?”

“네.”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

“왜요? 헤르윈이 제가 싫대요?”

루시아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에 당황한 하일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란다.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지 모르겠는데…….”

“도련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집중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일을 대신하여 의사가 설명했다.

“어제 아가씨께서 고백하는 모습을 많은 사람이 봤었죠. 하지만 도련님은 많은 사람에게 관심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십니다. 그러니 도련님이 좋으셔도 부디 그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헤르윈이 저를 싫어하는 건 아닌 거죠?”

“그렇지, 헤르윈이 왜 너를 싫어하겠니. 소중한 친구인데.”

“음… 그러면 남들이 없는 곳에선 고백해도 괜찮은 거네요?”

“……어?”

“좋아요, 다음부터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할게요. 약속.”

루시아는 무안하게 공중에 떠 있는 하일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했다.

“그럼, 저는 내일 다시 올게요. 헤르윈한테 꼭 제 안부 전해주세요.”

루시아는 공손하게 인사를 한 뒤 총총걸음으로 멀어졌다.

“……이게 아닌데.”

하일의 입에서 허탈한 말이 튀어나왔지만, 정작 그걸 들어야 할 사람은 그곳에 없었다.

* * *

“형아야 보고 싶었어!”

한참 놀이방에서 놀던 아이들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헤르윈을 반갑게 맞이했다.

특히 헨리가 가장 먼저 헤르윈에게 안겨들었다. 헤르윈은 처음에 놀랐지만, 이윽고 제 동생을 능숙하게 안아 들었다.

“어제 나 없이 재밌게 놀았어?”

“아니! 형아가 없으니까 엄청 심심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어제 나랑 재밌게 퍼즐 맞추기 했잖아.”

중간에 루카스가 장난스럽게 반박하자 헨리가 그를 째려봤다.

“몸은 어때? 많이 좋아졌어?”

“응, 이제 괜찮아.”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던 헤르윈은 루카스 뒤로 나타난 루시아를 보고 잠시 멈췄다.

헨리가 알아챌 정도로 그는 크게 동요했다.

루시아도 평소와 다른 그의 행동에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괜찮아? 이제 아픈 곳은 없지?”

“응? 어어, 으응…….”

헤르윈은 눈에 띄게 루시아의 눈을 피하며 어색하게 굴었다.

루카스와 헨리가 의아해하던 때 루시아가 헤르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리 와! 우리 재밌는 놀이 하자!”

“어? 잠깐……!”

헤르윈이 루시아의 손에 이끌려 나갔다. 덩그러니 남게 된 루카스와 헨리가 두 사람을 보고 눈을 멀뚱멀뚱 떴다.

“쟤네 왜 저래?”

“형아 오늘따라 이상해.”

저 멀리서 루시아가 자신의 장난감을 헤르윈에게 안겨주는 것이 보였다.

루카스와 헨리는 서로를 쳐다보다가 이내 두 사람에게 합류했다.

예전과는 미묘하게 다르지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 * *

“그래서 이거는…….”

루시아는 헤르윈의 옆에 붙어 재잘재잘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던 헤르윈은 문득 루시아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다시 루시아를 마주했을 때, 헤르윈은 자신이 쓰러졌던 날이 떠올랐다. 솔직히 혼란스러웠고, 혹시 그녀가 또 고백할까 노심초사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녀는 고백한 적 없는 것처럼, 이전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을 보였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이상했다.

“그리고, 얘를 이렇게 하면…….”

쉴 새 없이 얘기하던 루시아가 돌연 입을 꾹 다물었다.

고개를 돌리니 누군가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 사람이 멀리 떨어지고 나서야 루시아는 하던 말을 마저 이었다.

가장 눈에 띄게 변한 걸 말하라고 한다면 바로 이 점이었다.

근처에 누군가가 있으면 루시아는 여지없이 입을 꾹 다물거나 잠시 헤르윈과 거리를 두는 특이한 모습을 보였다.

헤르윈도 처음엔 누군가가 자신이 루시아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볼까 불안했지만, 그보다도 루시아가 더 숨는 듯한 행동을 보이니 도리어 자신의 불안감이 사그라들었다.

그 일이 있고 5일이 지난 지금. 헤르윈은 안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헤르윈, 내 말 듣고 있어?”

“응?”

“안 듣고 있었지?”

루시아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헤르윈이 말없이 쳐다만 보고 있자 루시아는 머쓱한 듯 고개를 돌렸다.

“네가 이제 날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헤르윈이 피식 웃으며 안도했다.

“다행이다. 역시 그때 한 말은 거짓말…….”

헤르윈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루시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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