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끼익-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문가에는 루카스와 또래이거나 그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한 소녀와 소년이 있었다.
서로 재밌게 얘기를 나누던 것도 잠시, 그들은 방에 있는 네 아이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죄, 죄송합니다! 도련님. 저희는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실수할 수도 있는 일인데 두 사람은 눈에 띄게 창백해지며 몸을 덜덜 떨었다.
“내가 없었더라면 이곳을 제 마음대로 쓸 생각이었나?”
난생처음 듣는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것이 거짓말처럼 헤르윈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야, 뭘 화내고 그러냐. 실수로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이상함을 느낀 루카스가 헤르윈을 툭 건드렸다.
“맞아, 다음부터 안 그러면 되지. 형, 누나 그만 가 봐.”
헨리도 루카스의 말에 동의하며 벌벌 떠는 이들을 돌려보냈다.
그들은 행여 루카스와 헨리가 마음을 바꿀까 싶어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루카스가 닫힌 문가를 보다가 헤르윈을 흘겨봤다. 헤르윈은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너, 갑자기 왜 그래?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것 없잖아.”
“……….”
“형아는 저 형, 누나들 싫어해. 마주치기라도 하면 미간이 이렇게 변해.”
헤르윈 대신 답한 헨리가 자신의 미간을 사정없이 구기며 헤르윈을 따라 했다.
“저 사람들이랑 뭔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아니야, 아무것도.”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말에 헤르윈은 겨우 얼버무렸다. 그리고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루카스와 헨리에게 장난치기 시작했다.
조용했던 공간이 순식간에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하하하하하-
활짝 웃는 이들 가운데에 오직 루시아만이 웃지 않으며 한데 뒤엉켜 노는 이들을 바라봤다.
한동안 그녀는 헤르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 *
“누나! 누나! 이것 봐라!”
“토끼풀이네.”
“이거를 이케이케 하면 반지 만들 수 있다고 했어! 내가 반지 만들어서 누나 줄게!”
“그거 기대되는걸.”
루시아가 생긋 웃어주자 헨리는 곧바로 기운을 얻으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반지 만들기에 집중했다.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은 공작성 뒤편에 위치한 작은 동산이었다.
행운이 찾아온다는 네 잎 클로버의 이야기를 들은 네 사람은 그것을 찾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우와, 진짜 찾기 힘들다.”
“그러게, 클로버가 이렇게 많은데 네 잎짜리는 하나도 안 보여.”
“그러니까 행운 아니겠어? 행운은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게 아니잖아.”
“그런가? 내가 꼭 찾고 만다.”
루카스가 열정을 불태우며 눈을 부릅떴다.
쭈욱-
그때, 누군가가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옆을 보자 헨리가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다.
“왜 그래?”
“헨리, 쉬야 하고 싶어…….”
“어?”
“누나, 헨리랑 같이 쉬야 하러 가면 안 돼?”
루시아의 눈동자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오, 오빠.”
“응?”
루시아는 결국 루카스에게 SOS를 청했다.
“헨리가 화장실 가고 싶대.”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해?”
“나한테 같이 가자고 하니까…….”
“그래? 그러면 하는 수 없네.”
루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헨리에게 다가왔다.
헨리는 허구한 날 자신을 놀리는 루카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헨리가 루시아 옆에 딱 붙어서 자신을 노려보자 루카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작은 아이를 안아들었다.
“으아아! 이거 놔아!”
“화장실 가고 싶으면 나나 네 형한테 물어야지. 왜 루시아한테 부탁해.”
“형아 싫어! 저리 가아!”
“싫어도 어쩔 수 없어. 자, 저쪽에 가서…….”
“으아아앙! 저기로 가란 말이야!”
어지간히도 싫은지 헨리가 울음을 터트렸다. 헨리의 울음소리가 커지자 헤르윈이 고개를 돌렸다.
“형, 내가 갈까?”
“아니야, 괜찮아. 헨리, 그만 울고……으앗!”
헨리를 토닥이던 루카스가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 여기서 싸면 어떡해!”
약간의 냄새와 함께 헨리를 안은 루카스의 옷이 젖기 시작했다.
울다가 긴장이 풀린 헨리가 실수를 한 것이다.
헨리는 서러운 것인지 아니면 창피해서 그런 것인지 더욱 자지러지게 울었다.
“오빠 미안해, 내가 그냥 같이 가줄걸…….”
“아니야, 괜찮아. 이런 식으로 복수할 줄은 몰랐는데…….”
루카스가 허탈한 웃음을 내뱉으며 헨리의 등을 토닥였다.
“나는 성에 들어가서 헨리랑 같이 옷 갈아입고 올게. 너네는 여기 있어.”
“혼자 가도 괜찮겠어? 같이…….”
“괜찮대도.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헤르윈이 다가오려 하자 루카스가 손사래 쳤다. 루카스는 결국 헨리를 토닥이며 공작성으로 향했다.
헨리가 루시아와 헤르윈을 불렀지만, 그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졸지에 루시아와 헤르윈만 남게 되었다. 둘만 있을 때면 어딘가 불편했기에 두 사람은 괜히 다른 곳을 보며 어색해했다.
“우리 얼른 네 잎 클로버 찾을까?”
“응? 어어, 그렇게 하자.”
루시아의 제안에 두 사람은 다시 네 잎 클로버를 찾기 시작했다.
“저기, 헤르윈.”
어색한 침묵 속에서 묵묵히 클로버를 살피던 도중, 루시아가 헤르윈을 불렀다.
“응?”
“나 물어보고 싶은 거 있는데.”
“뭔데?”
“어제 어떤 언니 오빠들이 방에 잘못 들어왔었잖아.”
헤르윈이 멈칫했다.
“그때 왜 그렇게 화났던 거야?”
“……그게 왜 궁금한데?”
“음, 네가 그냥 아무 이유 없이 화낼 사람이 아니라서?”
헤르윈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너, 나 본 지 일주일밖에 안 됐어.”
“하지만, 예전에는 1년 반 정도 같이 살았잖아.”
“그것도 벌써 2년 전인데? 솔직히 말하면 난 그때 일 잘 기억 안 나. 너는 그때 나랑 있었던 일 다 기억나?”
“나도 다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그래도 네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건 알아.”
헤르윈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는 지금 루시아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뭘 보고 자신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걸까.
착하게 봐준다면 고마울 따름이지만, 그렇다고 감추고 싶은 비밀까지 다 털어놓을 정도는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절대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의 헨리보다 어렸던 자신이 가신의 자제들에게 온갖 조롱과 비아냥을 받았던 나날.
그것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절대 잊혀지지 않았다. 불쾌한 기억을 떠올린 헤르윈이 얼굴을 굳혔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
“……나 어디 가서 말할 사람 아닌데.”
“말하기 싫다고! 애초에 내가 왜 너한테 그런 걸 말해야 하는데?”
짜증이 솟구친 헤르윈의 말투에 날이 서기 시작했다.
“그야… 나는 네 친구니까…….”
“친구? 어렸을 때는 친하게 지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야. 서로의 속마음까지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친해지진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헤르윈이 서늘한 눈으로 루시아를 노려봤다. 그것은 명백한 거절과 경계심이었다.
루시아는 문득 서러워졌다.
‘예전에는 내 말 무조건 다 들어줬으면서.’
하도 오래전 일이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지금의 헤르윈과 과거의 헤르윈은 너무나도 달랐다.
그것이 서글프고도 화가 나 루시아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너 어디 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난 루시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야!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안 돼!”
“네가 뭔 상관이야!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처음으로 듣는 루시아의 호통에 헤르윈은 어안이 벙벙했다.
얼떨떨하던 것도 잠시 헤르윈의 표정도 심통해졌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숲으로 들어간 루시아가 소리를 빽 질렀다.
“헤르윈은 바보야!”
“뭐? 바보? 내가 바보면 넌 멍청이야!”
“아! 그래, 나 멍청이니까 따라오지 마!”
“흥, 따라가긴 누가 따라간다는 거야!”
씩씩 숨을 고르고 루시아가 있던 곳을 보니 그녀는 어느덧 숲으로 사라져 자취를 감춘 후였다.
“왜 자기가 성질이야.”
먼저 사람 성질 돋운 건 그녀면서 화를 내는 것이 어이없었다.
헤르윈은 그동안 자신이 그녀를 잘못 봤다며 루시아에 대한 불만을 툴툴 내뱉었다.
그렇게 짜증 부리기를 몇 분, 헤르윈은 루시아가 들어간 숲을 슬쩍 바라봤다.
‘숲에는 절대로 혼자 들어가면 안 된다. 몬스터는 없지만, 들짐승이 있어서 위험해. 그러니 어른 없이 혼자서 숲에 들어가서는 안 돼.’
일전에 하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멍청이가 아니라면 깊숙이 안 들어가겠지.”
경고도 했으니 웬만하면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헤르윈은 그렇게 생각하며 신경질적으로 클로버를 뜯기 시작했다.
“……….”
한참 동안 애꿎은 클로버에 화풀이하던 헤르윈은 뚝 멈춰서 고개를 슬쩍 들었다.
그의 시선은 루시아가 들어간 숲으로 향해 있었다.
“……진짜, 신경 쓰이게.”
루시아가 연신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이 좀 더 부드럽게 대응했다면 그녀가 화낼 일도, 숲으로 들어갈 일도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남이 어떻든 신경 쓰지 않을 텐데 루시아만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옛날에 같이 지내서 그런가…….”
기억하지 못하는 옛 추억이 발목이라도 붙잡는 건가 싶었다.
햇살처럼 화사한 웃음만 보여주던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져 눈물로 뒤덮이는 상상을 하자 가슴이 괴로워졌다.
“아아, 정말!”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말린 그는 홧김에 아무 풀이나 잡아 뜯었다.
뽑아낸 풀들을 내팽개치려던 헤르윈은 손가락 사이에 껴있는 커다란 이파리를 보고 우뚝 멈췄다.
“……어? 네 잎 클로버다.”
손에 뜯겨진 클로버 중에는 정말 우연하게도 네 잎 클로버가 있었다.
다른 클로버보다 큰 크기를 자랑하는 네 잎 클로버는 어느 하나 찢어진 것 없이 멀쩡했다.
“우와! 진짜 네 잎 클로버네!”
네 잎 클로버를 찾아냈다는 사실에 헤르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감정이 벅차오르던 것도 잠시 조용한 주변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봤다.
루시아가 있었더라면 자신의 일인 것마냥 기뻐해 줬을 텐데.
헤르윈의 입꼬리가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들떴던 기분이 순식간에 축 가라앉았다. 복잡한 심경으로 네 잎 클로버를 보던 헤르윈이 클로버가 상하지 않게 주먹을 조심스레 쥐었다.
“하는 수 없지. 내가 찾으러 가는 수밖에.”
분명 이 클로버를 주면 루시아의 기분도 풀릴 것이다.
겨우 찾아낸 네 잎 클로버라 조금, 아주 조금 아깝기는 하지만 그녀의 기분을 풀 수만 있다면 이까짓 것 얼마나 줘도 상관없었다.
‘우와, 이거 나 주는 거야?’
네 잎 클로버를 줬을 때 기뻐할 루시아의 얼굴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정말, 루시아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몰라.”
투덜거리고는 있어도 그의 얼굴은 이전보다 밝았다.
루시아와 다시 사이좋게 지낼 생각에 들뜬 헤르윈은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르며 루시아가 들어간 숲 안으로 들어갔다.
* * *
“바보, 똥개, 말미잘, 오징어……!”
숲으로 들어온 루시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나쁜 말들을 내뱉었다.
그녀는 거센 콧김을 내뿜으며 있는 힘껏 발을 굴렀다.
쿵쿵-!
“헤르윈은 바보 멍청이야.”
말하기 싫으면 싫다고만 하면 되지 그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킁, 훌쩍.
꾹 참으려 했는데 어느덧 눈물과 콧물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런 일로 눈물을 보이면 헤르윈에게 지는 것만 같아 울고 싶지 않았다.
루시아는 서둘러 그렁그렁 매달린 눈물을 소매로 닦았다. 그럼에도 애꿎은 눈물은 주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눈치 없이 나오기 시작했다.
“흑, 헤르윈은 바보야…….”
그가 화를 낸 것보다 자신을 친구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실이 더 섭섭했다.
그동안 루카스와 더 어울린 것도 자신을 친구로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 건가 싶어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나도, 나도 헤르윈 같은 친구 필요 없어!”
헤르윈을 미워하리라 결심하고, 그 결심을 말로 내뱉어도 응어리진 마음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에 대해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슬픔이 몰아닥칠 뿐이었다.
“훌쩍, 흐으, 흐으응…….”
눈물만 퐁퐁 쏟아내던 그녀는 결국 목을 놓아 울고 말았다.
으아아앙-
크지 않은 울음소리가 숲속에 메아처럼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