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누나 이름이 모야?”
“루시아 아그네스.”
“나는 헨리 페네우스야! 누나 나랑 결혼하자!”
“뭐?”
“헨리!”
“으아앗! 형아!”
루시아가 당혹스러워하기 전에, 헤르윈이 서둘러 헨리를 떼어냈다.
헤르윈에게 붙잡힌 헨리가 놓으라며 발버둥 쳤다.
그때, 루시아와 헤르윈의 눈이 마주쳤다.
어딘가 그리웠던 얼굴이 반갑고도 낯설어 기분이 이상했다. 헤르윈이 얼떨떨하게 입을 달싹일 때 루시아가 먼저 말을 건넸다.
“헤르윈, 오랜만이야.”
“어? 어어…그래, 오랜만이야.”
“헤르윈! 너 진짜 많이 컸다! 나도 작은 키가 아닌데!”
루시아 옆에 있던 루카스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헤르윈의 눈이 잠시 커지더니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형도 오랜만이야.”
“오, 나 기억나?”
“그럼, 기억나지. 제도에 1년 넘게 있었는데.”
“그래? 루시아는 잘 기억 못하던데. 네가 루시아랑 동갑이니까 너도 루시아처럼 잘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
반갑게 인사하길래 자신과 다르게 모든 것을 기억하는 줄만 알았다. 아니었던 건가?
헤르윈이 루시아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녀는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우으! 이거 놔아!”
헨리가 기어코 헤르윈에게서 벗어나 매미처럼 루시아에게 찰싹 붙었다.
“헨리-?”
헤르윈이 무서우면서도 상냥하게 말하자 헨리가 몸을 떨었다. 곱게 휘어져 있는 눈매 안의 붉은 눈이 날카로웠다.
“손님한테 이게 무슨 행태지?”
“우으, 그, 그러니까…….”
제아무리 고집부릴 나이어도 형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헨리가 헤르윈을 무서워하자 상황을 지켜보던 루시아가 헨리의 등을 감싸 안았다.
“난 괜찮아. 헨리, 나랑 놀고 싶어?”
“……응! 누나!”
“그러면 내가 재밌게 놀아줄 테니까 이러지 말고 손잡을까?”
헨리가 찰싹 매달려있는 자세론 중심잡기 힘들었다. 루시아가 웃으며 손을 내밀자 헨리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좋아! 좋아!”
헨리가 헤벌쭉 웃으며 연신 루시아에게 매달려있는 상황이 헤르윈은 영 못마땅했다.
헨리를 째려보던 헤르윈은 루시아와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과거 둘도 없는 소꿉친구였던 두 사람의 재회는 다른 사람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순조롭지 않았다.
어딘가 낯설고도 묘한 불편함이 깃들어 있는 광경.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서로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이 깃들어 있었다.
* * *
“우와, 너네 성 진짜 넓다. 나 이런 곳은 처음이야.”
“그러게, 북부를 다스리는 가문이라 그런가? 황궁 뺨치게 엄청 커!”
루시아와 루카스는 헤르윈과 헨리의 안내에 따라 공작성을 구경했다.
헤르윈이 앞서 걸으며 성을 안내했고, 헨리는 루시아의 손을 놓지 않으며 옆을 졸졸 따라다녔다.
“누나, 누나. 요기는 예전에 무시무시한 마녀가 살았대. 그래서 귀신도 나오고 그런대.”
“그래? 어쩐지 조금 으스스하더라.”
루시아가 괜히 몸을 부르르 떨자 헨리의 눈빛이 돌변했다.
“무서워? 걱정 마! 헨리가 누나 지켜줄게!”
“꼬맹이는 어쩜 변한 게 없냐. 옛날에도 루시아 옆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더니.”
“내 신부가 되면 누나한테 뭐든 다 줄 거야!”
“요 녀석! 결혼은 누가 결혼한다는 거야. 내 동생 너한테 줄 생각 없으니까 꿈 깨.”
“으우, 방해하지 마!”
루카스가 킬킬 웃으며 헨리의 머리를 눌렀다.
헨리는 진지하게 팔을 휘두르며 루카스에게 덤비려 했지만, 5살인 아이가 10살 소년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드디어 헨리에게서 벗어난 루시아가 헤르윈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루시아가 다가오자 헤르윈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저 앞에서 장난치는 루카스, 헨리와는 다르게 두 사람은 가벼운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다.
루시아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불편했다. 괜히 자신만 불편한 건가 싶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자.
딱-
헤르윈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 모두 화들짝 놀라며 몸을 파드득 떨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도 잠시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어 루시아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기…….”
“응?”
루시아와 같은 심정인지 헤르윈이 어색하게 답했다.
“음, 그동안 잘 지냈어……?”
“어? 어어, 뭐, 그렇지…….”
말이 이어지지 못하고 뚝 끊겼다. 다시 침묵이 흐르자 이번엔 헤르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도 잘 지냈고?”
“나? 나야 뭐…나는 최근에 피아노 선생님 새로 모시고 피아노를 배우고 있어. 너는 어때?”
“음…그냥, 평범하게 가정교사에게서 이런저런 수업이랑 교양을 듣고 있지. 검술을 하고 있고.”
“검술? 기사가 꿈이야?”
“기사라기보다는 우리 아빠처럼 훌륭한 검사가 되고 싶어.”
약간은 경직되어 있던 헤르윈의 얼굴이 풀렸다.
“하긴, 페네우스 공작님은 엄청 유명한 검사라고 들었어. 분명 소드, 소드… 뭐였는데…….”
“소드 마스터. 모든 검사의 우상이지. 아빠만 있다면 어느 적군이 와도 전부 무찌를 수 있어! 그뿐만이 아니라 소드 마스터는 오라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거든! 우리 아빠는 오라가……!”
갑자기 흥분한 헤르윈이 하일의 얘기를 막 쏟아냈다. 그러다가 중간에 동그랗게 커진 벽안을 보고 뚝 멈췄다.
“아, 미, 미안… 내가 좀 흥분해서…….”
“으응, 아니야. 보니까 공작님을 엄청 좋아하나 보네?”
“뭐… 누구나 그렇지.”
“나도야! 나도 우리 아빠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던 헤르윈은 씩 웃는 루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어색함이 어느덧 많이 사라지고 편안함이 조금씩 깃들기 시작했다.
“으아아앙! 형아야!”
중간에 들려오는 울음소리가 산통을 깼다.
헨리가 서럽게 울며 루시아에게 달려와 안겼다. 분명 헤르윈을 불렀던 것 같은데 정작 찾는 사람은 루시아였다.
“누, 누나! 누나가 저 나쁜 형아 혼내줘!”
헨리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며 뒤에 있는 루카스를 가리켰다.
“으음…우리 오빠가 뭐라고 했어?”
“내가 너무 어려서 누나랑 결혼 못 한대! 나는 누나랑 결혼할 건데!”
“내가 틀린 말 했니? 그리고 난 내 동생 다른 사람한테 안 줄 거라니까?”
루카스가 헨리를 잔뜩 놀리며 루시아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헨리가 다시 약이 올랐는지 하지 말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오빠, 그만 좀 놀려. 아직 어린데…….”
“하하하, 미안, 미안. 얘 반응이 오죽 재밌어야지.”
“형아가 제일 싫어!”
“흥, 싫으면 어쩔 건데. 내가 루시아 오빤데.”
루카스가 루시아 옆에 얼굴을 갖다 대자 남매라는 것이 단번에 납득할 만큼 두 사람은 상당히 닮아 있었다.
헨리도 그것을 인정하는지 똑같이 청량한 벽안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아, 좀 있으면 저녁 시간이네. 슬슬 식당에 갈까?”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헤르윈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지금 몇 시야?”
“6시 반.”
“엥 그것밖에 안 됐어? 근데 왜 이렇게 배고프지?”
“그야 성을 3시간씩이나 둘러봤으니까.”
어색했던 루시아와 달리 헤르윈은 스스럼없이 루카스와 이야기를 나눴다.
루시아는 서서히 멀어지는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봤다.
“누나 안 가?”
“응? 으응, 가야지.”
헨리의 부름에 정신 차린 루시아가 그의 손을 꼭 잡고 서둘러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 * *
공작성에 온 지도 어느덧 5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아그네스 남매와 페네우스 형제는 과거, 제도에서 같이 지냈던 것처럼 가까워져 첫 만남에 비해 어색함 없이 지낼 수 있었다.
다만, 과거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헤르윈은 더 이상 루시아 곁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과거의 기억이 모두 떠오르지 않은 건지, 아니면 저보다 나이가 많은 루카스가 어울리기 편한 건지, 그는 루시아보단 루카스와 자주 어울리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루시아를 따돌리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같이 있으면 잘 지냈고, 장난도 곧잘 쳤으나 예전처럼 둘도 없는 친구라고 부르기에는 어색함이 있었다.
“누나! 누나! 나 이거 읽어주라!”
루시아가 루카스와 대화를 나누며 활짝 웃는 헤르윈을 멍하니 보던 찰나, 헨리가 그녀를 불렀다.
“그래, 뭐 읽어줄까?”
“이거! 여기에 누나 나온다?”
“응? 내가 나온다고?”
“응! 요기 봐봐!”
자연스럽게 루시아의 무릎에 앉은 헨리가 책을 펼치며 한 장면을 보여줬다.
그곳에는 루시아처럼 갈색 머리카락과 푸른 벽안을 가진 여인이 숲속 한가운데에서 꽃향기를 맡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분명 처음 보는 그림과 동화책인데도 이상하리만큼 지금, 이 순간이 익숙했다. 언젠가 겪어본 것처럼.
루시아는 문득 드는 기시감이 신기하여 저와 닮은 그림을 지긋이 바라봤다.
조잘조잘 떠들던 헨리는 뒤가 조용하자 의아함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아름다운 벽안이 우수에 젖어 있었다.
헨리는 가슴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엄마가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침부터 발라놓으랬어.’
남들이 채가기 전에 제가 먼저 흔적을 남기리라 헨리는 생각했다.
쪽-
떠드느라 시끄러웠던 공간이 하필 그 순간에 갑자기 조용해졌다. 덕분에 헨리의 뽀뽀 소리가 크게 들렸다.
갑작스레 뽀뽀를 받게 된 루시아는 물론이고, 저들끼리 재밌게 얘기를 나누던 루카스와 헤르윈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헨리를 바라봤다.
“누나는 이제 내 꺼야.”
“……이것도 어딘가 익숙하네.”
루시아가 떨떠름하게 제 볼을 쓰다듬으며 헨리를 내려다봤다.
“저, 저…꼬맹이가!”
루카스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변하며 서둘러 헨리를 루시아에게서 떼어냈다.
루시아는 지금 이 순간도 꿈에서 겪은 것마냥 오묘한 기시감을 느껴졌다. 그러면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헤르윈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 제게서 헨리를 떼어내는 사람이 루카스가 아닌 헤르윈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이 귀찮게 해서 미안해. 네가 엄청 마음에 들었나 봐. 보통은 저러지 않거든.”
“어? 어어…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뭐.”
“내가 따끔하게 혼낼게.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헤르윈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느새 다투고 있는 루카스와 헨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이게 아닌데.”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상실감이 조금씩 밀려왔다.
동생을 타이르는 헤르윈의 행동은 지극히 당연한 건데도 어째서인지 그것이 서운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좋게 타이르는 것이 아니라, 화를 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이상한 걸까?
두근, 두근, 두근……!
고요했던 심장이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점점 커진 고동은 불쾌감과 함께 기묘한 감정을 몰고 왔다. 루시아는 현재 느껴지는 자신의 감정을 뭐라 정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