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아이들은 3일 연속 이어진 신년회를 마음껏 즐겼다.
신년회 첫날 선물을 뜯기도 하고, 제도에 펼쳐진 축제에 놀러 가기도 하며, 하루 종일 재밌는 놀이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신년회를 보내고 나자 루시아와 헤르윈의 사이는 더더욱 돈독해졌다. 처음에 헤르윈을 경계하던 루카스도 헤르윈이 그렇게 나쁜 애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서서히 친해졌다.
그리고 신년회가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난 오늘. 페네우스가 떠나기로 예정한 날이 찾아왔다.
루카스와 루시아, 그리고 헤르윈은 나란히 창틀에 앉아 점차 눈이 쌓이기 시작하는 풍경을 바라봤다. 예상보다 눈이 많이 쌓여 출발 시간이 늦어지고 있었다.
“가기 싫다.”
눈이 더 쌓이길 기도하며 헤르윈이 푸념했다.
“왜? 네 집으로 가는 거잖아.”
루카스가 물었다.
“……난 별로 안 좋아해.”
“집에 가기 싫은 이유라도 있어?”
이번엔 루시아가 물었다. 똑같은 얼굴로 말갛게 쳐다보는 아그네스 남매를 보자 헤르윈은 이것을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이 일을 부모님 외의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는 것은 처음이었다. 헤르윈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사실, 집에서 괴롭힘을 당했거든.”
“정말?”
“어떤 미친놈이 그런 간 큰 행동을…….”
“집에 가면 나보다 나이가 많은 형, 누나들이 있는데 나보고 맨날 여자 같다고 하고, 남자가 아니라고 놀리고, 바지 말고 드레스 입어야 한다고 그랬었어.”
태어나 3살 때까지 헤르윈은 단 한 번도 자신 나이 또래의 아이들을 본 적 없었다.
공작저에서 일하는 가신들도 아이들은 따뜻한 기후의 남부에서 키우곤 했으니까.
그러던 도중 공작 부부는 나날이 자라는 헤르윈에게 친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문득 가졌다.
그래서 가신들의 자식을 공작 성으로 불러들였다. 그들은 헤르윈보다 2살 내지 4살 정도 나이가 많으니 분명 헤르윈에게 좋은 말동무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의도는 좋았으나 그들의 선택은 헤르윈에게 있어서 그리 좋지 않았다.
당시 지금보다 더 어렸던 헤르윈은 그야말로 인형처럼 예뻤다.
어른들도 헤르윈을 보고 여자로 착각할 정도인데 아이들은 오죽하겠는가.
아이들은 처음엔 부모의 말에 따라 헤르윈에게 잘 보이려고 했으나, 그가 자신들보다 어리고, 무슨 짓을 해도 잘 받아주자 점차 헤르윈의 신분을 잊고 그를 만만하게 보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은 헤르윈의 예쁘장한 미모를 조롱거리로 삼았다.
놀리면 놀릴수록 배로 돌아오는 재밌는 반응에 아이들의 장난은 점점 도가 심해져만 갔다.
친구를 사귀는 것이 처음이라 어쩔 줄 몰라 하던 헤르윈은 계속해서 그들의 괴롭힘을 참고 참다가, 결국에는 그간 있었던 일을 부모님에게 이야기했다.
아이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줄로만 알았던 공작 부부에게는 당연히 큰 충격이었다.
그들은 헤르윈에게 모든 것을 듣고 난 뒤에 바로 조치를 취했다.
공작 부부가 가신들을 불러 모아 얘기를 한 것인지 아니면 아이들을 따끔하게 혼을 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놀랍게도 그날 이후로 아이들의 장난이 사라졌다.
오히려 지금은 헤르윈의 눈치를 보며 눈에 띄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헤르윈은 트라우마 수준으로 여자 같다는 말과 예쁘다는 말을 싫어하게 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을 지나치게 의식하게 되어 조금이라도 놀림을 받게 된다면 다른 아이들보다 과하게 반응했다.
루시아가 예쁘다라고 말한 것에 불같이 화를 냈던 것이 바로 이 이유였다.
헤르윈은 이제 그들이 자신을 건들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더 이상 그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북부보다 이곳이 더 편했다.
‘루카스 형이랑 루시아가 있으니까.’
처음엔 사이가 좋지 않던 루카스와는 의형제를 맺었고, 루시아는…….
헤르윈은 슬쩍 루시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동글동글한 눈으로 헤르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10초가 넘도록 이어진 눈 맞춤에 헤르윈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는 뜨끈하게 올라오는 열기를 느끼며 고개를 홱 돌렸다.
‘눈을 못 마주치겠어.’
어느 순간부터 루시아만 보면 심장이 요동쳤고, 왠지 모르게 볼이 뜨거워졌다.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오빠, 헤르인 또 아픈가 봐.”
“응? 그래? 헤르윈, 너 어디 아파?”
“아니야, 괜찮아…….”
헤르윈은 심장을 진정시키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요 근래 그는 부쩍 말을 하다 만다거나, 얼굴을 붉히는 일이 늘었다. 이러한 그의 이상행동에 두 남매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쿵쾅쿵쾅-
“큰일 났습니다, 공작님!”
“이게 웬 소란이냐.”
요한과 이야기를 나누던 하일이 날카롭게 째려보자 황급히 들어오던 기사가 허리를 굽혔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소란스럽게 하여 죄송합니다, 백작님.”
“나는 괜찮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러지?”
“북부에 몬스터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몬스터라는 단어가 나오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하일이 얼굴을 굳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른 곳에서 얘기를 나누도록 하지.”
하일이 기사와 함께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스칼렛이 떠나는 하일을 보며 낮게 읊조렸다.
“몬스터라니… 이 시기에 몬스터가 나타난 적은 없었는데.”
“스칼렛, 괜찮은 거야?”
“글쎄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부터 먼저 파악해야 할 것 같아. 요 몇 년간 잠잠했는데…안 되겠다. 나도 한번 가봐야겠어.”
초조하게 있던 스칼렛은 결국 하일의 뒤를 따랐다.
“몬스터? 책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괴물을 말하는 건가?”
“그런가 봐. 헤르윈, 너 몬스터에 대해서 아는 거 있어?”
“……아니. 나도 잘 몰라.”
루카스와 루시아는 헤르윈에게 다시 말을 건네려다가 심각하게 굳어진 그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헤르윈은 부모님이 떠나간 방문을 한참동안 바라봤다.
* * *
“아무래도 먼저 가봐야겠어.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으니 당신은 당분간 아이들과 같이 이곳에 있도록 해.”
“……여보, 조심해야 해요.”
“그래.”
하일은 서둘러 북부로 갈 채비를 했다.
긴급하게 날아온 전보에는 몬스터 무리가 북부를 헤집고 있다는 소식이 적혀있었다.
게다가 전보 마지막에 적혀있는 피해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근 6년간 몬스터의 출현은 전무했기에 경계가 느슨해지기도 했고, 북부를 덮친 몬스터 수가 예상했던 수치를 훨씬 웃돌고 있어서 피해 규모가 점차 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백작, 당분간 부인과 아이들을 부탁하겠소.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으리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디 하루빨리 사태가 진정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이해해주어 고맙네.”
하일은 요한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가족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그는 스칼렛과 그녀의 품에 안긴 헨리의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남기고 헤르윈을 꼭 껴안았다.
“아빠…….”
“헤르윈, 아빠 대신 네가 엄마와 동생을 잘 지켜야 한다. 알겠지?”
“네, 제가 엄마랑 헨리를 꼭 지켜낼게요!”
“그래, 우리 아들 장하다.”
하일은 헤르윈을 꼭 끌어안고 나서야 머나먼 길을 떠났다.
* * *
하일이 북부로 떠난 날로부터 1년하고 반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1달이면 모든 몬스터를 소탕할 것이라 여겼던 하일은 1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북부 곳곳에 남은 몬스터들을 사냥했다.
하필이면 겨울, 그것도 폭설이 몰아칠 시기에 몬스터들이 몰려온 것이 문제였다.
하일은 모든 몬스터를 소탕하기 전까지 북부로 올라오지 말라는 연락을 보냈다.
애타게 기다리던 하일의 편지를 처음으로 받은 날, 스칼렛은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제도에 머물러야 하는 시간이 무기한으로 늘어나자 스칼렛은 따로 집을 마련하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아그네스 가문에 머물면서 북부로 돌아갈 타이밍을 잡고 있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더는 아그네스 가문에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집을 구한다고? 우리는 괜찮으니까 공작님께 연락이 올 때까지 여기서 지내.’
‘아니야, 더 이상 피해를 끼칠 수는 없어. 그이가 제도에 묶어놨던 돈이 있으니 그걸로 어떻게든 묵을 곳을 마련해볼게.’
‘페네우스 부인, 그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인이 이렇게 떠나시면 제가 공작님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부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요한과 줄리안은 스칼렛의 이사를 반대했다.
페네우스의 재력이라면 제도의 저택 하나 구하는 것쯤은 쉬운 일이겠지만, 지금은 한 푼, 한 푼이 아쉬운 시기였다.
게다가 스칼렛은 몬스터가 북부를 헤집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날부터 단 하루도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이렇게 떠나보내면 그녀는 분명 심적으로 망가질 것이 분명했다. 친구 된 도리로서 줄리안은 스칼렛을 가만둘 수 없었다.
한참동안 진지한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결국 스칼렛이 두 손을 듦으로써 막을 내렸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백작. 고마워, 줄리안.’
거뭇한 눈으로 스칼렛이 고개를 푹 숙였다. 심신이 지친 그녀를 아그네스 부부는 위로해줄 뿐이었다.
이것이 스칼렛과 헤르윈, 그리고 헨리가 오랜 기간 아그네스 가문에 의탁하게 된 사연이었다.
“루시아! 너 거기서 뭐해!”
그리고 현재로 돌아와, 지금.
루시아는 제 가족, 그리고 헤르윈 네와 함께 공원으로 나들이를 나왔다.
잔디 위에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보던 루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턱 언저리에 오던 단발이 어느새 등까지 내려와 있었다.
“루시아.”
“헤르윈.”
이제는 헤르윈의 이름을 똑바로 부를 수 있게 된 루시아가 입을 헤 벌리며 제게 다가오는 헤르윈을 바라봤다.
“혼자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헤르윈, 이것 봐라? 개미다?”
“……너 또 이상한 거에 꽂혔지?”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개미 구경하고 있었어.”
“거짓말하지 마, 일주일 전에는 메뚜기를 잡더니 그제는 귀뚜라미를 잡아왔고, 어제는 매미껍질을 주워왔잖아. 어쩐지 곤충 사전을 유심히 본다 했어.”
1년 넘게 한 집에서 같이 생활하게 된 두 사람은 첫 만남 때보다 더욱더 친해져 지금은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친해지게 되면서 헤르윈은 루시아에 대해 알아낸 것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그녀가 한번 무언가에 꽂히면 질릴 때까지 파고든다는 것이다.
누구나 그런 점이 하나씩 있을 수 있지만, 루시아는 유독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 정도가 심했다.
한 번 빠져들면 질릴 때까지 그것을 수집하거나 모았고, 질리면 냉정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른 것으로 관심을 옮겼다.
요 1년 반 동안 그녀가 흥미를 가진 것 중에는 곰 인형 모으기와 꽃 관찰하기, 나뭇잎을 종류별로 수집하기 등이 있었고, 현재 그녀의 관심사는 바로 곤충이었다.
루시아가 일주일 전에 메뚜기를 잡아 저택으로 들고 갔을 때처럼 이번에도 개미를 잡아간다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 것이다.
헤르윈은 루시아가 사고 치기 전에 그녀를 이끌고 저 멀리 일행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날씨가 좋아 피크닉을 나왔건만, 백작 부부와 공작부인을 알아본 사람들이 근처에 바글거렸다.
많은 인파에 헤르윈은 멈칫했다.
“우리, 조금만 늦게 갈까?”
“좋아!”
개미를 구경할 생각에 신난 루시아가 얼른 대답하며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헤르윈은 못 말린다며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그녀 옆에 꼭 붙었다. 그리고 개미를 구경하는 루시아를 지긋이 쳐다봤다.
그렇게 있기를 한참, 갑자기 누군가 루시아가 구경하는 개미들을 짓밟았다.
충격적인 광경에 루시아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개미를 짓밟은 것은 심술궂게 생긴 한 사내아이였다. 그의 뒤로는 일행처럼 보이는 두 명의 아이들도 있었다.
“네가 페네우스냐?”
그 사내아이가 말했다.
“내 개미…….”
울먹이는 루시아의 목소리를 듣고 헤르윈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넌 누구지?”
“이 몸으로 말하자면 트래빈 백작가의 안토니오 트래빈 되시겠다!”
이곳에 놀러 온 귀족 자제 중 한 명인 모양이었다.
“너! 특별히 내 친구가 될 자격을 주도록 하마!”
안토니오는 다짜고짜 헤르윈을 가리키며 오만하게 나왔다. 어리둥절한 헤르윈은 안중에도 없는 듯 안토니오의 일행들은 안토니오에게 멋지다며 추임새를 넣었다.
트래빈 백작가에서 귀하게 얻은 아들로, 오냐오냐 자라온 안토니오는 그 오만이 하늘을 찔렀다.
여태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