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29)
  • <4화>

    “예쁘다고 말해서 미안해. 헤르인이 진짜 천사처럼 예뻐…아니, 잘생겨서 한 말이었어…….”

    툭 내뱉은 말엔 헤르윈에 대한 미안함이 잔뜩 내포되어 있었다.

    절대 마음을 풀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던 헤르윈의 고집이 사르륵 녹아내렸다.

    “……나도 화내서 미안해. 네가 일부러 한 게 아니란 거 알고 있었어.”

    그는 루시아가 ‘예쁘다’라는 말을 놀리려고 한 것이 아니란 걸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기분이 확 나빠져서 고집부린 것이었다.

    “헤헤, 그럼 우리 화해한 거다?”

    루시아가 처음으로 환하게 웃어 보였다. 타원형을 그리는 하얀 눈매가 못내 사랑스러웠다.

    헤르윈은 제 볼이 달아오른 것도 알지 못하고 잡아당기는 손길에 따라 주저앉았다.

    “헤르인도 신년회 때문에 왔어?”

    “응, 맞아.”

    “원래는 어디 살아?”

    “마차 타고 몇 날 며칠을 저 멀리 가야 해. 여기보다 더 추워.”

    “엥? 이것보다 더 춥다고? 난 지금 이것도 추운데.”

    “춥긴 한데 이 정도야 뭐…….”

    언제 다퉜냐는 듯 그들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두 아이는 서로에 대해 알아가며 서서히 친해졌고, 나중에 어른들이 찾아왔을 때는 해맑게 웃으며 뛰어놀 정도로 사이가 진전됐다.

    “얘들아, 이제 화해한 거니?”

    “네! 헤르인이랑 친구 하기로 했어요!”

    “엄마, 엄마! 이거 루시아가 나 줬다?”

    두 아이는 각자의 부모에게 달려가 무슨 놀이를 했는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잔뜩 흥분한 채로 설명했다.

    루시아와 헤르윈 모두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운 것을 보고 두 부부 역시 미소를 지었다.

    * * *

    “우와아… 애기다.”

    “귀엽지? 내 동생이야.”

    “헨리라고 했던가?”

    “응, 헨리 페네우스. 오늘 밤만 지나면 2살이야.”

    다음 해로 넘어가기까지 단 하루가 남았다. 첫날 다퉜던 것이 무색하게 급속도로 친해진 헤르윈과 루시아는 함께 헤르윈의 동생인 헨리가 있는 방으로 놀러 왔다.

    첫날,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만 아주 잠깐 볼 수 있었던 헨리를 지금에서야 만난 것이다.

    이제 막 뛰어다니기 시작한 헨리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방 안을 열심히 돌아다녔다.

    루시아는 헤르윈과 똑같이 생긴 헨리가 신기했다.

    헨리의 얼굴에서 헤르윈과 하일을 떠올리던 루시아는 갑자기 붉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약간은 날카로운 헤르윈의 눈매보다 둥그스름한 것이 루시아를 지긋이 바라봤다.

    “뭐, 뭐지?”

    “네가 신기한가 봐.”

    “내가 왜? 그런 말 처음 들어…….”

    “너는… 신기하게 생겼어.”

    ‘요정처럼’, ‘귀엽다’라는 단어가 문득 떠올랐지만 헤르윈은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루시아가 울상 짓자 아차 싶었으나, 그보다 빨리 저 멀리 있던 헨리가 다가왔다.

    “아으!”

    “응?”

    짧은 팔다리를 휘저으며 빠르게 다가온 헨리가 루시아 앞에 멈춰 섰다.

    헨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루시아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헨리, 뭐해.”

    결국 보다 못한 헤르윈이 헨리를 부르자 헨리의 고개가 돌아갔다.

    “혀아!”

    “응, 루시아한테 볼일 있어?”

    “르시아? 르시아!”

    “맞아, 루시아야. 자, 따라 해 봐. 루시아!”

    “르시아!”

    “르시아가 아니라, 루시아.”

    “르시아!”

    헨리는 헤르윈의 말을 줄곧 잘 따라 했다. 그동안 자신보다 어린아이를 접해본 적 없던 루시아는 지금 이 광경이 신기했다.

    “말 잘한다.”

    “또래에 비해 조금 빠르긴 해.”

    “아브브, 아으!”

    헨리가 돌연 자리를 벗어났다. 어딘가로 간 그는 북부에서 가져온 짐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짐에 상체를 숙이고 씰룩거리는 엉덩이가 보였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 너랑 헨리랑 엄청 닮았다?”

    “그래? 난 모르겠는데.”

    “아냐, 엄청 닮았어! 공작님이랑도 똑같이 생겼어!”

    “크흠! 아빠랑은… 당연히 닮았지.”

    하일과 닮았다는 소리에 헤르윈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어느새 저 멀리 있었던 헨리가 동화책 한 권을 들고 다가왔다.

    “이거!”

    “책?”

    헨리가 루시아에게 책을 건넸다. 얼떨떨하게 그것을 받아든 그녀는 헤르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헨리, 책 읽고 싶어? 내가 읽어줄게.”

    “시러! 르시아! 르시아!”

    헤르윈이 루시아의 손에 들린 책을 가져가려 하자 헨리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처음으로 동생에게 거절당한 헤르윈이 큰 충격을 받고 얼어붙었다.

    기어코 헤르윈의 손에서 책을 뺏어온 헨리가 그것을 루시아에게 다시 건넸다.

    “르시아! 르시아!”

    “나 책 읽을 줄 모르는데…….”

    최근 글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유창하게 읽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곤란해하고 있을 때, 헨리가 루시아의 품에 안겼다.

    아이 특유의 부드러운 분내와 검은 머리카락이 코끝을 스쳤다.

    헨리는 루시아의 손에 들린 책을 휙휙 넘기더니 한 장면에 멈춰 섰다.

    “르시아!”

    그리고 그 페이지에 그려진 그림을 짤막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 숲속 한가운데에 앉아서 꽃향기를 맡고 있는 그림.

    “이게 나라는 거야?”

    “으응! 르시아!”

    헨리가 방긋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는 흥미롭다는 듯 그림에 그려진 여인을 바라봤다.

    비록 그림이지만, 이리 아리따운 여인을 자신이라고 말하니 기분 좋았다.

    루시아가 배시시 미소 짓자 헨리에게 상처받은 헤르윈도, 헨리도 모두 그녀를 멍하니 쳐다봤다.

    쪽.

    그때, 말랑하고 축축한 것이 볼에 내려앉았다. 루시아가 화들짝 놀라며 앞을 보자, 헨리가 방긋 웃고 있었다.

    “르시아! 내 꺼!”

    헨리가 루시아에게 뽀뽀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지켜본 헤르윈이 입을 쩍 벌렸다.

    순간 그의 가슴에서 알 수 없는 불꽃이 확 튀었다.

    “헨리!”

    “꺄르르르! 내 꺼! 내 꺼!”

    “루시아는 네 거가 아니야! 이리 와!”

    “우으, 시러, 시러.”

    “씁, 형아한테 혼난다?”

    헨리의 발버둥에도 헤르윈은 기어코 동생을 루시아에게서 떼어놓았다.

    루시아는 볼을 만지작거리며 투닥거리는 페네우스 형제를 지켜봤다.

    “난 괜찮은데…….”

    루시아의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우으으 혀아 미어!”

    “울지 마세요, 우리 아가. 헤르윈, 대체 뭘 했길래 헨리가 이렇게 울어?”

    스칼렛의 물음에 헤르윈은 입을 쭉 내밀며 뾰로퉁하게 고개를 돌렸다.

    “몰라요.”

    “얘가 요즘 들어서 이상하네. 응, 응, 우리 헨리 착하지?”

    스칼렛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것도 잠시 헨리가 다시 칭얼거리자 얼른 그를 달래기 바빴다.

    헨리의 눈가가 어느새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불과 몇 분 전, 헨리가 루시아 볼에 뽀뽀를 하자 헤르윈은 기어코 헨리를 루시아에게서 떼어놓았다.

    결국 서러움을 참지 못한 헨리가 울음을 터뜨리자 바로 옆방에 있던 스칼렛이 달려온 것이다.

    스칼렛은 현재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다툰 적 없을 정도로 헨리와 헤르윈 사이는 돈독했다.

    헤르윈이 워낙 헨리를 잘 챙겨주기도 했고, 헨리도 그런 형이 좋다고 매우 잘 따랐다. 그런데 제도에 오고 나서 이런 일이 생기다니.

    스칼렛이 묘한 한숨을 내쉴 때, 그녀의 시야에 루시아가 들어왔다.

    “루시아, 혹시 괜찮으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네가 얘기해 주겠니?”

    꿋꿋하게 스칼렛과 눈을 마주치지 않던 헤르윈이 눈에 띄게 놀라며 안절부절못했다.

    그것을 알아본 스칼렛은 제 아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부드러운 미소로 루시아를 바라봤다.

    “어, 그러니까…….”

    루시아는 우물쭈물 스칼렛과 헤르윈의 눈치를 봤다.

    스칼렛은 부드럽고도 강인한 분위기를 뿜으며 말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보냈고, 헤르윈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스칼렛에게 답하자니 헤르윈이 삐질 것 같고, 그렇다고 말 안 하자니 어른을 무시하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다.

    끊임없이 작은 머리로 고민을 거듭하던 루시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헤, 헤르인이 저한테 뽀뽀했어요!”

    “응?”

    “무, 무슨! 내, 내가 언제!”

    순간 당황한 스칼렛과, 그녀보다 더 당혹스러워하는 헤르윈이었다.

    빽 소리 지른 루시아처럼 헤르윈의 볼도 어느덧 빨갛게 달아올랐다. 급히 부정하는 헤르윈의 말에 루시아가 제 실수를 깨닫고 입을 벌렸다.

    “아, 아, 그, 그게 아니라. 헨리가 저한테 뽀뽀했어요. 그래서 헤르인이 헨리를 떼어내다가…….”

    “아아, 그렇게 된 거구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스칼렛은 금세 파악했다. 그녀는 꿍꿍이 가득한 음흉한 표정으로 제 아들을 내려다봤다.

    헨리야 아직 어리니 루시아가 마음에 들어서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헤르윈의 반응은 지극히 놀라웠다.

    어린아이가 뽀뽀도 할 수 있는 건데 그걸 굳이 하지 말라고 떼어냈다고?

    ‘호호, 그렇게 싫다고 할 때는 언제고.’

    “그걸 왜 말해.”

    “그렇지만 어른이 물어보는데 말 안 할 수는 없잖아.”

    어느새 루시아에게 다가간 헤르윈이 그녀에게 따지려 하다가, 축 늘어진 루시아의 눈꼬리를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북부에 있었을 때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반응이었다.

    동갑내기가 이번이 처음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루시아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걸까?

    ‘어찌 됐든 귀엽네.’

    스칼렛이 뿌듯하게 웃으며 두 아이를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장난기가 샘솟았다.

    “어머, 우리 헨리는 루시아가 엄청 마음에 들었나 봐. 나중에 커서도 루시아만 쫓아다니는 거 아냐?”

    “아으, 르시아! 르시아!”

    스칼렛의 말에 동요하듯 때마침 헨리가 옹알이했다.

    “루시아, 우리 헨리 어떻니? 네가 내 며느리로 들어오는 건 언제든 환영이란다.”

    “네? 네…저도 좋죠.”

    루시아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좋다고 말하긴 했지만, 아직 어린 그녀로서는 스칼렛의 말을 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분위기의 흐름상 좋다고 해야 할 것 같아서 내뱉은 것뿐.

    하지만, 루시아와 달리 헤르윈은 제 엄마의 말을 충분히 이해했다.

    “엄마! 루시아가 왜 우리 집으로 들어와!”

    “왜긴 왜야. 우리 헨리가 좋아하니까 그렇지. 나중에 훌륭한 어른이 됐을 때도 두 사람이 서로 좋다고 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 아니겠어?”

    “루시아는 절대 안 돼!”

    “어머, 왜 네가 난리니. 두 사람이 좋다고 하는데. 혹시 너도 루시아를 좋아해?”

    스칼렛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헤르윈을 장난기 담긴 눈으로 쳐다봤다.

    씩씩거리던 헤르윈은 입을 꾹 다물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루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조, 좋아하긴 누가 좋아한다는 거야! 나는 루시아 안 좋아해!”

    쑥스러워서 거짓말을 내뱉은 것이 스칼렛의 눈에 훤히 보였다. 그러나 루시아에게는 아니었다.

    “헤, 헤르인은 나 싫어……?”

    “아니, 그게 아니라…….”

    미처 루시아를 생각하지 못한 헤르윈이 당황할 때 루시아가 굵은 눈망울을 보였다.

    “나, 나눈 헤르인 좋은데… 헤르인은 내가 싫대……!”

    후에에엥.

    루시아가 서럽게 엉엉 울자, 헤르윈은 서둘러 그녀를 달랬다.

    “그런 거 아니야! 내, 내가 미안해. 울지 마아…….”

    그러다가 문득 스칼렛에게 놀림당한 게 서러운 건지 헤르윈도 울먹이기 시작했다.

    결국, 두 아이가 엉엉 울자, 전염이라도 됐는지 헨리까지 울기 시작했다.

    도미노처럼 와르르 시작된 울음의 행보에 스칼렛이 당황했다.

    “얘, 얘들아 장난이야, 장난. 그러니까 울지 말고 뚝…….”

    “흐에에엥, 헤르인이 내가 싫대……!”

    “아, 아니야. 나, 루시아 좋아한단 말이야. 엄마 미워……!”

    “으아아아앙!”

    “아이고, 두야.”

    사방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스칼렛이 이마를 짚었다.

    그녀는 인과응보라고 생각하며 줄리안이 오기 전까지 세 아이를 달래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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