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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3/129)

<3화>

“자, 헤르윈. 여기는 아그네스 가문의 루카스 아그네스 영식과 루시아 아그네스 영애란다. 루시아는 너와 동갑이라고 하니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잘 지내보렴.”

헤르윈은 조용히 제 어머니를 쳐다보다가 앞에 있는 아그네스 남매를 바라봤다.

“안녕, 난 루카스 아그네스야. 앞으로 잘 부탁해.”

“헤르윈 페네우스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루카스와 인사를 마친 헤르윈이 루시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루시아를 본 헤르윈의 눈이 놀란듯 커졌다. 하지만, 이내 원래대로 돌아오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안녕?”

“……….”

“루시아, 뭐해? 악수해야지.”

상대방이 무안하게 가만히 있던 루시아는 옆에서 건넨 오빠의 말을 듣고 허둥지둥 헤르윈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아, 안녕…….”

방금 전에 시선을 마주했던 것과 달리 루시아는 가까이 다가온 헤르윈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곁눈질로 그를 훔쳐보자, 그 시선을 눈치챈 헤르윈이 무미건조했던 입가를 위로 올렸다.

일순 헤르윈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루시아는 천사가 강림하는 줄만 알았다.

“예쁘다아…….”

위로 올라갔던 헤르윈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밑으로 내려갔다. 굳어진 헤르윈의 얼굴을 보고 루시아가 몸을 움찔 떨었다.

“예쁘다고 하지 마.”

“으응……?”

“난 예쁜 게 아니라 잘생긴 거야.”

헤르윈이 돌연 화를 내자 루시아는 당황했다.

천사처럼 아름다워서 예쁘다고 말한 것인데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인가?

루시아는 우물쭈물 헤르윈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천사 같아서 예쁘다고 한 건데…….”

“씨이, 예쁘다고 하지 말라니까!”

헤르윈이 루시아와 마주 잡았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야, 왜 갑자기 화를 내고 그래!”

옆에서 기묘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루카스가 루시아를 감쌌다.

저보다 머리가 한참이나 큰 루카스가 루시아를 두둔하자 헤르윈이 뒤로 주춤 물러섰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멍하니 있던 루시아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방울방울 맺혔다.

“우, 으우… 처, 천사가 나를 싫어해…….”

아그네스의 고명딸로 무조건적인 사랑만 받고 자란 루시아. 그런 그녀가 태어나서 난생처음으로 거절이란 것을 당했다.

그것도 마음에 들었던 상대가 화를 내며 손을 뿌리치자 그녀는 몰려오는 서러움을 이기지 못했다.

으아아앙.

결국, 루시아가 울음을 터트리자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어른들이 화들짝 놀라며 다가왔다.

“루시아, 갑자기 왜 그러니?”

“착하지, 우리 딸. 뚝 그치자.”

줄리안과 요한이 루시아를 달래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달래주면 더욱이 서러워져 울음을 그칠 수 없는 법.

루시아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대체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알 길이 없는 어른들은 루카스와 헤르윈에게 사건의 경위를 물었다.

“쟤가 루시아를 울렸어!”

루카스가 씩씩거리며 헤르윈을 가리켰다. 순식간에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에 헤르윈이 움츠러들었다.

“공자가?”

요한과 줄리안은 의아한 얼굴로 헤르윈을 바라봤고, 하일과 스칼렛은 헤르윈이 처음 만난 아이를 울릴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얼떨떨했다.

“아들, 정말로 네가 아그네스 영애를 울렸니?”

“나, 나는…….”

스칼렛이 상냥하게 물었다. 그럼에도 헤르윈은 그녀의 말이 무서웠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과 더불어 자신을 질책하는 것만 같은 눈빛에 헤르윈은 억울했다.

결국 제대로 된 해명도 하지 못하고 헤르윈이 울먹거렸다.

“쟤, 쟤가 먼저 시작했단 말이야……!”

으허어엉.

그 말 뒤로도 헤르윈이 뭐라 뭐라 말을 하긴 했지만, 울음이 뒤섞여 있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일은 그저 서럽게 우는 아들을 달래기 위해 그를 안아 들 뿐이었다.

루시아와 헤르윈의 울음소리가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똑같이 자식을 안아 든 하일과 요한의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누구 할 것 없이 머쓱하게 웃으며 제 자식의 등을 쓰다듬었다.

두 아이가 울음을 그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 * *

“아하, 그렇게 된 거였구나.”

“난 또 뭐라고. 별것도 아니었네.”

“하지만, 저는 예쁘지 않다고요.”

모든 사태가 진정되고, 저택으로 들어온 두 가족은 그제서야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루시아가 헤르윈을 예쁘다고 말한 것이 원인이었다.

“루시아, 헤르윈은 예쁘다는 말을 싫어한단다. 아마도 그 말 때문에 화를 낸 것 같아. 네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야.”

스칼렛이 줄리안 품에 안긴 루시아에게 친절히 설명했다.

엄마 품에 고개를 숙였던 루시아가 얼굴을 슬쩍 드러냈다.

“천사님이 저를 싫어하지 않아요……?”

천사라는 말에 당황하던 스칼렛은 천사가 헤르윈을 지칭한다는 것을 깨닫고 목을 가다듬었다.

“천사? 큼, 그래. 싫어하는 게 아니야. 그치? 헤르윈.”

“흥, 몰라요. 저는 쟤랑 친해지기 싫어요.”

헤르윈은 이미 루시아에 대한 평가를 끝냈다.

자신을 기분 나쁘게 한 아이.

그는 루시아와 친해지지 않으리라 다짐한 뒤였다.

또다시 거절당하자 루시아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우으… 싫어하는 거 맞잖아…….”

스칼렛이 도끼눈을 하고 헤르윈을 째려보자 헤르윈은 모른 척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루시아, 남자한테 예쁘다는 말하는 거 아니야. 잘생겼다고 해야지.”

루시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트리기 전, 루카스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우응?”

“나도 예쁘다는 말보다 잘생겼다는 말이 더 좋은걸? 쟤는 남자잖아. 그러니까 예쁘다는 말 말고 잘생겼다고 해야 돼.”

“그런 거야……?”

“응. 뭐, 그렇다고 해서 예쁘다는 말을 듣고 울지는 않지만 말이야.”

헤르윈이 루시아에 대해 정의를 내린 것처럼 루카스도 헤르윈에 대한 평가를 끝낸 뒤였다.

동생을 울린 쪼잔한 놈.

동생 바보에게 있어 헤르윈은 주의해야 할 요주의 인물이었다.

헤르윈은 자신을 저격하는 말을 듣고 울컥한 심정을 느꼈다.

“울긴 누가 울었다고 그래!”

“네가 방금 전까지 엉엉 눈물 콧물 다 쏟았잖아. 남자가 돼서 쪼잔하게 그런 거 가지고 우냐?”

“쪼, 쪼잔?”

“응. 너 완전 쪼잔해.”

약이 바짝 오른 헤르윈이 부들부들 떨었다. 루카스는 그의 심기를 더욱 자극하듯 어린이 특유의 얍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루카스! 형이 돼서 그러면 못써!”

요한이 경고하자 루카스는 입술을 쭉 내밀며 헤르윈을 약 올리는 것을 멈췄다.

“죄송합니다, 제 아이들 때문에 공자께서…….”

“백작님이 사과하실 일은 아닙니다. 무릇 아이들은 다투면서 자라는 것이지요.”

“그래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잘못은 헤르윈도 했는 걸요.”

“엄마! 나는……!”

“씁, 어른끼리 대화하고 있잖니.”

헤르윈은 제 감정을 무시하는 스칼렛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제 부모를 흘겨보던 헤르윈은 시선을 돌리다가 아그네스 남매와 눈이 마주쳤다.

루시아는 헤르윈에 대한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힐끔힐끔 쳐다봤고, 루카스는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남은 시간 동안 서로 사이가 좋아지겠죠.”

하지만 어른들의 말을 듣고 헤르윈은 생각했다.

‘절대, 절대! 친해지지 않을 거야!’

헤르윈과 루시아의 길고 긴 인연의 시작은 그리 좋지 않았다.

* * *

“저, 저기…….”

“……….”

“헤르인…….”

타닥타닥-

불분명한 발음으로 루시아가 그를 여러 번 불렀지만 헤르윈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놀이방에 단둘이만 남은 이 상황은 헤르윈과 루시아가 바란 자리가 아니었다.

헤르윈은 하루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길 원했다.

그러나 아무리 헤르윈과 아그네스 남매 사이에 다툼이 있더라도 페네우스 가문은 아그네스 백작가에 머물기로 이미 결정했다.

이제 와서 새 숙소를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곳에 머무는 동안 계속 사이가 나쁜 채 있을 수도 없으니 어른들은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빨리 화해하기를 바랐다.

결국 세 아이는 어른들의 등쌀에 못 이겨 놀이방으로 쫓겨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루카스는 가정교사의 수업을 들으러 자리를 떠났다.

놀이방에는 헤르윈과 루시아만 남겨진 것이다.

날이 워낙 추워 벽난로 앞에 있어야 하는 것만 아니라면 헤르윈은 루시아 근처로도 가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헤르윈의 강경한 태도에 루시아의 통통한 볼이 축 늘어졌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한 쌍의 인형을 꼭 끌어안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벽난로에서 장작 타는 소리와 복도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제외하고 놀이방은 조용했다.

루시아에 대해 아직도 응어리가 풀리지 않은 헤르윈은 제 무릎을 꼭 끌어안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않는 거였는데.’

난생처음으로 북부를 벗어나 수도로 오는 것이라 기대를 많이 했었다.

또래 친구도 사귈 수 있을 거란 말에 과연 어떤 친구를 만나게 될지 상상도 했다.

그런데 보자마자 저더러 예쁘다고 하다니.

어른들은 예쁘다는 말이 칭찬이라고 하지만, 헤르윈에게는 그 말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나는 남자라고. 왜 맨날 예쁘다고 하는 거야. 잘생겼다는 말도 있잖아.’

예쁘다고 한 말 뒤에 꼭 ‘여자 같네’라는 말이 따라오는 것 같았다.

‘어머, 남자아이라고요? 그런 것치고 상당히 곱상하네요. 여자였다면 엄청난 미녀로 자랄 텐데.’

‘에이, 네가 남자라고? 거짓말하지 마! 딱 봐도 여잔데 왜 남자라고 거짓말하는 거야?’

‘너는 바지보다 드레스가 더 잘 어울리겠다. 드레스 한번 입어 봐.’

그동안 숱하게 들어왔던 말들이 귓가에 맴돌며 헤르윈을 계속해서 괴롭혔다.

루시아가 예쁘다는 말만 안 했으면 친한 친구가 됐을지도 모를 텐데.

헤르윈은 괜히 입술을 삐죽거렸다.

마차에서 내려 아그네스 일가를 처음 마주했을 때, 헤르윈은 루시아를 보고 내심 속으로 놀랐었다.

‘요정 같다.’

통통한 볼까지 내려오는 짧은 갈색 단발과 푸르른 하늘보다도 맑게 느껴지는 푸른 벽안, 그리고 장미를 연상케 하는 분홍색 드레스까지.

헤르윈은 루시아를 보자마자 요정을 떠올렸다.

드레스 뒤에 달린 커다란 리본이 요정의 날개처럼 보일 만큼 그녀는 상당히 귀여웠다.

첫인상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는데 그녀가 내뱉은 단 하나의 단어로 인해 모든 것이 망가졌다.

훌쩍-

속으로 투덜투덜하고 있을 때,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헤르윈이 멈칫하며 뒤를 슬쩍 돌아봤다.

주위를 맴돌며 어떻게든 말을 건네려던 루시아가 어느새 등진 채 앉아있었다. 어쩐지 작은 어깨가 축 처져 보였다.

훌쩍- 훌쩍-

계속해서 코를 들이켜 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헤르윈은 자신이 상관할 바 아니라고 생각하여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몇 분이 지나도 끊이지 않는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 또 우는 거야? 너 울보야……!”

자신이 울린 건가 싶어 그녀 앞으로 다가가려는데-

“훌쩍, 킁! 으응……?”

루시아는 울고 있지 않았다. 그저 콧물이 나오는지 계속해서 코를 들이켜 마실 뿐. 헤르윈이 말을 내뱉다 말고 얼어붙었다.

“헤헤, 화 다 풀렸어?”

헤르윈의 속도 모르고 루시아가 배시시 웃었다.

루시아의 귀여운 얼굴에 순간 열이 오른 헤르윈이 고개를 홱 돌렸다.

“푸, 풀리긴 누가 풀려!”

“하지만, 나한테 왔잖아.”

“그건 네가 우는 줄 알고… 아니다, 됐다.”

헤르윈은 더 이상 그녀를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가 방금 전처럼 등을 돌리려 하자, 맹하니 있던 루시아가 헤르윈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왜?”

“미안해.”

불퉁하던 헤르윈의 입술이 조금이나마 들어갔다.

그녀가 순순히 사과할 줄은 몰랐다. 사과한대도 다른 사람들에게 등 떠밀려 겨우 할 거라 생각했는데…….

헤르윈은 감았던 눈을 살짝 뜨며 밑을 내려다봤다.

푸르른 벽안에 거울처럼 제 모습이 비쳐 보이는 것 같아 헤르윈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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