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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만 전생이 날 도와줘-217화 (완결) (217/217)

# 217

64장 99만의 의지(4)

“현준아, 오늘 컨디션은 어때?”

차가운 온도가 감도는 듯한 병실, 노크와 함께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온 소진이 물었지만, 병상에 누워 있는 현준은 대답이 없었다.

소진의 입가에 머금고 있던 미소가 슬프게 물들었다.

“오늘도 다른 곳을 보고 있네.”

그날 이후, 늘 똑같다.

레비앙은 현준의 정신을 케어하기 위해서는 사소하더라도 최대한 기억에 자극을 자주 주는 게 좋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소진은 매일 같이 현준을 찾아와 말을 걸었다. 하지만 늘 그의 반응은 똑같았다.

공허한 눈동자로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팠다. 오늘도 소진은 3시간 넘게 옆을 지키며 계속해서 말을 걸었지만, 현준은 대답은커녕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내일 또 올게.”

내일은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작은 기대와 또 혼자 떠들게 되지는 않을지, 그런 두려운 마음을 품고 소진은 현준을 두고 병실을 나왔다.

복도로 나오기 무섭게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힘없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자 앞에 레비앙이 있었다.

“좀 어떻습니까?”

“어떨 것 같아요?”

소진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그녀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레비앙은 그 어떤 말도 덧붙일 수 없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겁니다.”

과연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을까?

평소 현준이 레비앙을 신뢰했던 만큼 소진 또한 그의 능력을 믿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쉽게 확신할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소진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녀의 말에 레비앙은 확신은 없지만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강한 자신감을 담아 말했다. 하지만 소진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으니, 효과는 크게 없었던 모양이다.

* * *

꿈.

매일 밤 꿈을 꾼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꿈에 대한 기억은 신기루처럼 흩어졌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악몽은 아니야…….”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감정은 악몽을 꿨을 때 특유의 찝찝함이 아니었다. 굳이 형용하자면 아련한 그리움에 가까웠다.

“기억이 안 나…….”

기억의 파편을 잡으려고 손을 뻗으면 안개처럼 흩어진다.

매일 같은 꿈을 꾸지만 늘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떠오르지 않는다.

답답함 속에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며칠이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평소처럼 잠에 빠져들고 정신을 차린 순간, 낯선 공간에 와 있었다.

“여긴…….”

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은 ‘전생의 홀’이다. 현준에게 있어서 그 어떤 장소보다 익숙한 곳이었지만 ‘망각’ 이후, 낯선 공간이 되어 버렸다.

“일단 걸어볼까…….”

마치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혼잣말을 흘리며 걸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전생의 홀에는 많은 방이 있었다.

예전보다 자물쇠로 잠겨 있지 않은 방이 많아져 있었다. 물론 현준은 그것까지 기억하지는 못했다.

분주히 걷고 있던 현준의 발걸음이 어떤 문 앞에서 멈췄다.

“정의로운 방패……?”

낯설면서도 왠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명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습관처럼 문고리를 잡은 순간 본능적으로 문을 열어젖히게 되었다.

그 뒤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정신을 차렸을 땐 자신도 모르게 내부로 깊숙이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불이 켜지고 중세 분위기의 수련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중앙에는 방패와 창을 든 남자가 서 있었다.

망각의 회귀가 있었지만 현준은 그가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카르타고…….”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반갑다, 강현준.”

측면을 보이고 있던 남자가 현준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는 뭐가 그리 기쁜 것인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다시 만나서 기쁘다, 강현준. 나는 카르타고라고 한다.”

그는 차분한 표정으로 창을 들어 올렸다. 곧은 시선은 현준에게 향했고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맴돌고 있었다.

그는 분명 창을 겨누고 있었지만 현준은 가까운 친구를 맞이하는 것 같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강현준, 너의 전생이다. 지금부터 너의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흠씬 두들겨 패주마.”

카르타고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리고 수련이라는 이름의 잔혹한 수업이 시작되었다.

“허억, 허억.”

“이제 기억이 나는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스스로를 카르타고라고 소개한 남자가 물었다. 현준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벌써 몇 번이나 창에 찔렸는지 모르겠다. 전신에 고통이 남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가……. 아직인가?”

카르타고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무신경한 목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걱정이 가득 묻어 나왔다.

현준은 이해할 수 없었다. 눈앞에 있는 저자는 누구길래 이렇게 간절한 것일까? 고민을 거듭했지만, 해답은 나오지 않았고 공격은 다시 시작되었다.

“크윽!”

비명이 터져 나오면서도 자연스레 방패를 움직여 카르타고의 공격을 받아내는 현준의 모습을 보며 카르타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봐라, 강현준! 네 몸이 우리들의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

카르타고가 외쳤다. 현준은 그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의 몸은 본능적으로 카르타고의 빈틈을 찾아 검을 휘두르고 목을 노리고 찔러오는 창을 방패로 막아내고 있었다.

“기억해내라! 강현준! 잊지 마라!”

“커헉!”

카르타고의 창이 복부를 관통했다. 현준은 붉은 피를 쏟아내며 비명을 토해냈다.

“넌 늘 이겨왔다! 이번에도 넌 이겨낼 수 있다! 망각에게 무너지지 마라!”

창을 회수하며 카르타고가 뒤로 물러났고 현준은 비틀거리면서도 입가를 잔뜩 물들인 피를 닦아냈다.

전생의 방의 회복 술식이 작동하면서 복부의 관통상이 치유되었다.

“기억해라!”

카르타고는 다시 거리를 좁히며 창을 휘둘렀다. 그리고 창에 꿰뚫리는 게 다시 수천 번, 만약 전생의 방이 아니었다면 수천 번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시간은 얼마나 흘렀을까?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공간이지만, 체감상 최소 수년은 흐른 것 같았다.

어느 순간, 카르타고의 창을 받아내는 현준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단순히 방어하는 거로 멈추지 않고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격은 점차 변칙적으로 변하더니 카르타고조차 막아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푸욱!

현준의 검이 카르타고의 흉부를 관통했다.

“드디어 때가 되었는가?”

흉부를 관통당했지만, 목소리에서는 고통 대신 기쁜 감정이 묻어 나왔다.

“이제야 기억을 되찾았구나, 강현준.”

“9년 정도인가요?”

“이곳이 아니었다면 10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거다.”

카르타고의 말에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 * *

정신을 차렸을 땐 병실이었다.

“기동요새 안인가…….”

창 밖으로 시선을 옮기자 사막이 보였다. 바깥의 풍경만으로는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없었지만, 지구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지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질적인 풍경이었으니까.

고개를 두어 번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잠에서 깨기 위해 옆에 있는 생수병을 집어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냉수가 목을 타고 넘어가니 잠이 완전히 깨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밖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현준은 고개를 돌렸고 이윽고 시선이 닿은 곳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실례할게.”

조용한 목소리와 함께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 온 이는 소진이었다. 그동안 마음 고생이 많았는지 그녀는 많이 야위어 보였다.

오늘도 힘을 내서 병문안을 오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무관심과 불확실함에 젖어든 나머지 절망감이 짙은 다크 서클에 깃들어 있었다.

소진은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양이었지만 그 깊은 절망감은 20대가 감당하기에는 힘든 것이었으니, 조금이나마 얼굴에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조금 더 기억을 잃은 척하면서 놀려주려고 했지만 그녀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자 그런 어린 아이 같은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현준아, 오늘 컨디션은 어때?”

“괜찮은 것 같아요. 누나.”

“그래, 오늘도……. 잠깐, 너 방금 뭐라고 했니?”

소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현준이 기억을 잃고 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를 보며 ‘누나’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누나라고 했죠.”

“너…….”

눈물을 글썽이는 소진에게 다가가 말없이 안아 주었다.

그날 소진은 울었다. 아주 서럽게 울었다. 어쩌면 자신이 알고 있는 현준을 영원히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갑작스럽게 소중한 사람을 되찾게 되었으니, 그 감정의 파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렸다.

현준을 강하게 끌어 안은 소진의 손아귀는 이제 다시는 다른 곳으로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는 것만 같았다.

소진은 한참이나 현준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결국에는 그녀가 감정의 격류를 이기지 못하고 실신한 뒤에서야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혀 두고 복도로 나올 수 있었다.

“돌아오셨군요.”

복도에 기대어 있던 레비앙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현준은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주군이 자리를 비우셔서 그렇습니다. 김태민 경이 도와주기는 했지만 제가 할 일이 너무 많았어요.”

레비앙은 고개를 저었다.

“우선 지휘탑으로 가시죠.”

굳이 워프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지휘탑으로 가는 길에 레비앙으로부터 침략사령관, 코펜하겐이 목숨을 잃은 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코펜하겐이 죽고 난 뒤, 침략사령부의 병력 대부분이 와해되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애초에 침략사령부의 지휘 체계는 코펜하겐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그의 강력한 권한이 병력을 다스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와해하지 않은 병력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잔당’이라고 규정짓고 토벌 중입니다.”

“잔당의 규모는?”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차원 동맹이 협조해주고 있어서 토벌 자체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약 세 달 동안 절반 이상의 잔당을 토벌했고, 지금은 잠시 차원 동맹의 전투 부대와 교대하여 후방에서 휴식 중에 있습니다.”

“얼마나 더 걸릴까?”

현준의 물음에 레비앙은 씨익 웃어 보였다.

“주군께서 합류하셨으니, 조금 더 빨리 진행되지 않을까, 싶네요.”

레비앙이 말했다. 현준은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나를 그렇게 혹사시키고 싶어? 나 방금 정신 차렸는데?”

“일이 많이 밀렸습니다. 주군도 일을 하셔야죠.”

“정말 한숨만 나온다.”

고개를 저으면서도 지휘탑에 들어서기 무섭게 자연스레 통제단에 다가가 섰다.

“연합 함대 사령관님께서 복귀하셨다! 지금부터 잔당 토벌 전선에 재합류한다!”

레비앙이 힘차게 외쳤다.

“얼마나 걸릴까?”

“주군께서 합류하셨다고는 하지만 한 달은 걸릴 겁니다.”

“한 달 동안 차원을 떠돌아다녀야 한다는 말이네.”

대답은 없었다. 대신 레비앙이 쿡쿡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고작 한 달이야.”

현준은 불평 조금 섞인 중얼거림을 흘리며 기동요새의 동력을 올렸다. 그로부터 정확히 한 달 후, 그들은 그리워하던 지구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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