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
64장 99만의 의지(2)
얼마 남지 않았던 마력이 바닥을 보이면서 데우스의 가호가 강제적으로 사용되었다. 운명을 거스르는 거대한 마력의 간섭이 일어났다.
-절실한 요청에 따라, 운명을 개척할 전생의 가호를 호출합니다.
-운명의 광대가 응답합니다.
-운명의 광대가 당신에게 모든 것을 건 도박을 제안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연이어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에 현준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당연히 수락하겠다.”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보이지 않는 기운이 현준에게 스며 들었다.
눈앞에 광대가 나타났다. 그는 익살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카드를 펼쳤다.
-지금부터 운명의 광대가 세 장의 카드를 뽑습니다.
-운명의 광대가 첫 번째 카드를 뽑았습니다.
-축하합니다. 종말의 황금왕의 카드를 뽑았습니다. 당신의 격이 상승합니다. 일시적이지만 종말급 신격의 경지에 오릅니다.
마력이 폭발했다.
“심상치 않다!”
“쳐라!”
신격의 경지에 오른 여덟의 인베이더들이 화려한 몸짓으로 강력한 마력을 퍼트렸다.
일순간에 완성된 수천의 마법과 권능, 그리고 참격이 현준을 노렸다.
-종말의 황금왕께서 종언을 고하자, 모든 것은 ‘무’가 되었다.
황금빛 기운이 폭발했다. 현준을 노렸던 모든 공격 의지가 녹아내렸다.
“무, 무슨…….”
“협공이다!”
“일제히 공격해!”
인베이더들이 일사불란하게 행동했다. 현준은 눈동자를 움직였다. 살기를 머금은 시선에 닿은 순간 그들의 몸이 폭죽 터지듯 폭발했다.
무려 신격의 경지에 오른 여덟 명의 인베이더들이 순식간에 전멸하자 특전대의 다른 이들은 크게 당황했지만, 현준을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후우!”
다시 한번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의 몸에서 황금빛 기운이 폭발하여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치명적인 살기를 머금은 기운에 닿은 인베이더들의 전신이 조각났다.
“이, 이럴 수가…….”
모선에서 전장을 지휘하고 있던 본군 소속 참모는 경악했다. 침략사령부의 본군이 자랑하는 직속 특전대가 전멸한 것이다.
“침략 사령관님! 십인대의 출격을 요청합니다!”
참모가 목소리를 높였다. 신속하게 적격자를 제압하고 상황을 정리하기 위하여 본군 소속에서도 가장 정예로 이름 높은 10명의 인베이더로 구성된 십인대를 출격시킬 생각이었다.
거듭된 요청에 중앙 함교의 통제단에 서있던 침략사령관, 코펜하겐이 두 눈을 떴다.
“모선으로 유인해라. 내가 십인대와 함께 적격자를 요격하겠다.”
“지,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모선으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대공포 사격과 마력 광선의 공격은 있었지만 인베이더들은 더 이상 현준의 앞을 막아서지 않았다.
‘단숨에 돌파한다.’
폭발적인 마력을 분사하며 일순간에 모선과의 거리를 좁혔다.
-운명의 광대가 두 번째 카드를 뽑았습니다.
-축하합니다. 비밀스러운 관측자의 카드를 뽑았습니다. 당신의 눈에 초월의 시선이 담깁니다. 시선이 닿는 곳에 길이 열릴 것이며, 그 어떤 존재도 당신의 비밀스러운 관측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길이 보였다. 눈앞에 드러난 경로의 끝에 침략 사령관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기에 있다!’
현준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모선의 중앙 함교를 향해 하늘을 박차고 단숨에 날아들었다.
앞을 막는 인베이더들도 없었다. 간혈적으로 빗발치는 대공포 사격을 뚫고 몸을 던지듯 파고들었다.
최대 전력의 속도였다. 운명의 광대가 뽑아 든 종말의 황금왕의 카드가 얼마나 유지될지 알 수 없었기에 더욱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듀렌달이 당신과 함께합니다. 찬란한 광휘가 정의로운 검에 깃듭니다.
황금의 검이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힘차게 휘두르자 짙은 청색의 광휘는 힘차게 앞으로 뻗어 나가 중앙 함교로 향하는 길목을 열었다. 동시에 현준은 앞을 향해 몸을 던졌다.
중앙 함교의 투명한 벽을 뚫고 단숨에 내부로 침투했다. 일순간 흔들렸던 시야가 회복되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드는 인베이더들의 모습이 보였다.
일시적이지만 종말급 경지에 오르면서 날카로워진 본능이 먼저 검을 휘두르게 만들었다.
번개와 같이 휘둘러진 검이 달려드는 인베이더들의 머리와 가슴을 쪼갰다.
“커, 커헉!”
“크아아악!”
인베이더들이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현준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고 중앙 함교 안에 있던 수십의 인베이더들은 순식간에 모두 시체가 되었다.
더 이상 달려드는 적들이 없을 때 현준은 스산한 느낌에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바로 눈앞에 붉은 눈에 검은 제복을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침략사령관이 분명하다.’
내부는 기동요새의 지휘탑과 구조가 비슷했다. 통제단 뒤편의 의자에 앉아 있는 셈이다.
거리는 1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충분히 기척을 느낄 수 있는 거리였지만 현준은 작은 마력 반응조차 느끼지 못했다.
침략 사령관, 코펜하겐. 그는 눈앞에 있었지만 마치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기세가 은밀했다.
“반갑다, 적격자. 나는 침략 사령관, 코펜하겐이라고 한다.”
짧은 소개였다. 코펜하겐이 입을 여는 순간 날카로운 기세가 날아와 칼날처럼 파고들었다.
현준은 전신에서 두려움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억눌러야만 했다.
‘이 정도일 줄이야.’
공포를 이기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운명의 광대가 뽑아 든 황금왕의 카드 덕분에 일시적으로 종말급 신격의 경지에 오른 상태였지만 침략 사령관, 코펜하겐의 기세를 받아낼 때 숨이 턱! 하고 막히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설마, 여기까지 올 줄이야.”
코펜하겐이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길을 내어준 부하들을 탓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신기하다는 감정이 더 많이 섞여 있었다.
현준은 리퍼의 살기를 슬며시 끌어 올렸다. 코펜하겐의 강렬한 기운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효과는 있었다.
리퍼의 살기가 방패가 되어 코펜하겐의 기운을 막아준 덕분에 현준은 흩어진 정신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선공을 해야 하나.’
그러기 위해서는 빈틈을 찾아야 한다. 현준은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여 코펜하겐을 살폈다.
그는 허술하게 앉아 있는 것 같으면서도 흔들림 없는 거대한 장벽과도 같았다.
혼잡한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침략 사령관이 먼저 움직였으니까. 무거운 긴장 속에서 코펜하겐이 먼저 발을 떼자 현준도 황급히 두 개의 검을 움직였다.
하지만.
‘늦었다!’
본능이 경고했다.
-카르타고의 정의로운 방패가 당신을 수호합니다. 위대한 수호가 함께하는 한, 당신을 위협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전방에 분사된 전생의 기운이 뭉쳐 카르타고의 가호, 푸른 오러 실드의 형태를 갖추기 무섭게 뭔가가 직격했다.
어지럽게 튄 마력 파편이 가라앉자 오러 실드에 꽂힌 거대한 도끼가 보였다.
인지하기 힘들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호오, 제법인데?”
잔뜩 긴장한 현준과 달리 코펜하겐의 목소리에서는 여유가 넘쳤다.
조금 전의 기습도 전력을 다한 게 아닌 일종의 가벼운 탐색전이었던 모양이다.
‘쉽게 볼 수 없는 적이다.’
현준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전투 자세를 취했다.
코펜하겐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가 손을 뻗자 허공에 칠흑의 칼날이 생성되었다. 그런데, 하나가 아니었다.
허공에 검은빛을 머금은 수십 개의 무기가 공간을 찢고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위험할 수도 있겠는데…….”
자신도 모르게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현준은 조심스럽게, 하지만 망설임 없이 앞으로 전진했고 코펜하겐은 말없이 자리를 지켰다.
공중에 부유하는 칠흑의 무기들 만이 현준을 향해 날붙이의 끝을 겨누고 탐색하듯 흔들릴 뿐이었다.
“라이키리.”
조용히 이름을 읊조리자 전생이 응답했다. 몸에서 마력이 피어오르면서 가호가 발동되었다.
-라이키리의 빛이 당신을 아득한 저편으로 인도합니다. 빛과 함께 한줄기의 섬광이 되어 적을 꿰뚫으세요.
단숨에 거리가 좁혀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무미건조한 목소리. 코펜하겐은 그저 손가락 하나를 까딱였을 뿐이었지만 7개의 무기가 빛의 군마를 관통했다.
“큭!”
설마 빛의 군마를 직접 공격할 줄은 몰랐다. 현준은 넘어지기 직전에 낙법을 취하면서도 당황한 나머지 짧은 신음을 흘렸다.
“라이키리의 가호인가? 아이모스 차원에서 당시 제8침략군단장에게 살해당했지. 섬광의 창기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빠른 녀석이었지만 ‘신속’이라고 불렸던 제8침략군단장을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던 거였어.”
코펜하겐이 이죽거렸다. 분명한 도발이었고 현준도 그걸 알고 있었지만,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코펜하겐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고 있었다.
“단순한 놈이군.”
콰앙!
굉음이 터지고 현준의 몸이 뒤로 내던져지듯 날아갔다. 어디서 공격이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날카로운 것에 베인 게 아니라 둔기에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일순간 시야가 흐릿해지고 조각난 갈비뼈가 장기를 찔렀다.
종말급 신격의 권능 중 하나인 초고속 재생이 발동하면서 부서진 뼈가 맞춰지기는 했지만 잠시나마 오싹한 느낌이었다.
“쿨럭!”
입 밖으로 핏물이 쏟아졌다.
“일격에 쓰러질 줄 알았는데, 의식을 잃지 않을 걸 보니……. 그건 단치히의 가호인가?”
코펜하겐이 물었다. 현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코펜하겐은 더욱더 많은 무기를 불러들이며 섬뜩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단치히, 지키지 못한 자. 그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잃었지. 그리고 그 사념은 전생 시스템에 기록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도 지키지 못했다.”
날카로운 눈매에 머금은 살기가 은은하게 퍼졌다. 코펜하겐은 여전히 앉아 있었지만 무거운 위압감은 점차 전진하는 듯하더니 마침내 현준에게 닿았다.
“가호를 믿고 설치지 마라, 그들은 너를 지켜줄 수 없을 테니까.”
수십 개의 무기가 회전하면 날아들었다. 동시에 위압감 또한 강해졌다. 마치 속박의 저주처럼 전신을 강하게 짓눌렀다.
움직이기 힘들 정도였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가호를 발동하기 위해 마력을 끌어 올렸다.
-카르타고의 정의로운 방패가 당신을 수호합니다. 위대한 수호가 함께하는 한, 당신을 위협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전방에 오러 실드가 생성되었다.
“카르타고 역시 너를 지켜주지 못할 것이다.”
수십의 무기가 전신을 찢고 지나쳤다. 종말급 신격의 경지에 올랐지만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제기랄!”
욕설과 함께 무기를 뽑아 들며 저항했다. 하지만 코펜하겐은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로 부유하는 무기들로 현준을 공격했다. 완전한 방어는 불가능했다.
발밑은 붉은 피로 물들었고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단치히의 가호가 아니었다면 이미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끝이다. 다시 한번 날붙이의 파도가 몰려오고 있었으니, 현준은 그걸 막아낼 힘이 없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순간, 광대가 나타났다.
-운명의 광대가 세 번째 카드를 뽑았습니다.
-축하합니다. 무한의 회귀자의 카드를 뽑았습니다.
-무한의 회귀자가 당신에게 손을 내밉니다. 영겁의 고통을 견딜 각오가 되어 있는지 묻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목소리의 제안에 현준은 씨익 웃어 보였다. 처음부터 선택지는 정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