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
64장 99만의 의지(1)
“이, 이 정도일 줄이야…….”
제7침략군단장, 하스웰이 피를 토하며 비틀거렸다. 왼팔이 잘렸고 전신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했다.
현준과의 전투가 시작되고 30분 만에 이 지경까지 몰린 것이다.
당황한 표정의 하스웰을 보며 현준은 그저 씨익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신격의 힘을 상징하는 황금의 검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고 왼손에는 상대방으로부터 마력을 수확하는 지옥참마도가 들려 있었다.
-놈은 지쳤다.
지옥참마도가 설명했다. 굳이 그가 보고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하스웰의 상태는 피폐했다.
초월검의 유지 시간도 있기 때문에 현준은 곧바로 하스웰을 향해 강한 공세를 퍼부었다. 폭풍처럼 쏟아지는 검격의 연속을 견디기에 하스웰은 너무 지쳐 있었다.
결국, 곧 오른팔마저 잃었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하스웰의 심장에 지옥참마도가 꽂혔다.
“커, 커헉!”
다시 한번 붉은 피를 흩뿌리는 하스웰을 향해 현준이 황금의 검을 휘둘렀다.
심장과 목, 그리고 복부에 치명상을 입은 하스웰이 칠흑의 날개를 접고 힘없이 지상으로 추락했다.
“파이어 캐논.”
확인 사살이라도 하는 것처럼 하스웰이 추락한 곳을 향해 수십 개의 마법을 퍼부었다.
현준은 마력 반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에서야 마법 폭격을 멈췄다.
“적장이 죽었다!”
마력을 담아 외쳤다. 혼전 속에서도 인베이더들의 시선이 하스웰이 추락한 곳으로 향했다.
그들은 곧 자신들의 수장이 쓰러졌다는 걸 인식했다. 혼란은 없었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인베이더들은 다음 지휘관을 찾아 뭉쳤다.
“놈들의 반응이 이상합니다.”
인베이더들이 부대를 재편성하는 동안 생긴 잠깐의 여유에 플레임이 조심스럽게 찾아와 말했다. 현준도 같은 생각이었다.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현준은 통신 장비를 입가로 가져갔다.
“레비앙, 전황을 보고해.”
현준이 말했다. 기동요새의 지휘탑에서 상황을 전체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레비앙이라면 전장의 흐름을 어렵지 않게 읽어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던진 질문이었다.
-주군, 심상치 않습니다. 우선 물러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7침략군단은 군단장인 하스웰과 고위 지휘부를 잃었지만, 여전히 와해하지 않고 강력한 집결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이 후퇴하는 것을 불명예로 아는 침략사령부의 군세라고는 하지만 비정상적일 정도로 침착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뭔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잠깐만, 기다린다고?”
느낌이 좋지 않았다. 현준은 다시 통신 장비를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전군, 즉시 후…….”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쿠우우우웅!
강력한 마력의 파동이 현준을 덮쳤다. 하늘이 찢어지고 수백을 넘어서 일천 척에 달하는 대군세가 모습을 드러냈다.
“치, 침략사령부의 본군입니다!”
현준의 곁에서 함께 싸우고 있던 차원 동맹의 고위 기사, 레빌은 하늘을 찢고 나타난 대군세의 깃발을 알아보고서 안색이 창백해졌다.
“강현준 경! 당장 피해야 합니다!”
활짝 열린 차원 관문이 침략사령부 본군의 군세를 꾸역꾸역 토해냈다. 레빌은 현준의 옆에 바짝 다가와 물러나야 한다고 외쳤다.
“저들은 침략 사령관이 직접 지휘하는 본군입니다! 평범한 군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적입니다!”
“물러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현준이 차갑게 말했다. 어느새 침략사령부 본군의 병력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전후와 좌우를 장악하고 천천히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적격자를 넘기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침략사령부 본군 쪽에서 마력을 담은 외침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소환자에 대한 깊은 충성심으로 무장한 무한의 군단 소속의 승무원들이 흔들릴 리가 없었다.
“길드장님…….”
태민이 가까이 다가왔다. 현준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새로 모습을 드러낸 적들의 수가 너무 많았고 그 수준 또한 결코 낮아 보이지 않았다.
-기동요새가 퇴각을 지원하겠습니다.
짧은 생각의 조각이 흩어지기도 전에 통신 장비에서 레비앙의 음성이 흘러나왔고 기동요새가 침략사령부 본군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제기랄! 레비앙!”
본능적으로 욕설을 내뱉었지만, 통신은 단절된 뒤였다. 기동요새에 탑재된 모든 마동포가 불을 뿜었다.
수십 척의 비행선이 격추당하면서 침략사령부 본군의 진형이 미약하게나마 흔들렸으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인베이더들로 구성된 특전대가 투입되었다. 기동요새에서도 공전형 골렘들을 미친 듯이 사출했지만 인베이더들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공전형 골렘들이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우수수 격추당했다. 순식간에 제공권을 장악한 인베이더들이 실드를 뚫고 기동요새에 침투를 시도했다.
“친위대! 집결하라!”
보다 못한 현준의 외침에 사혈과 사혁이 이끄는 친위대가 집결했다.
“지금부터 기동요새를 구원한다!”
차원 동맹의 집정관, 이시리아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고위 기사들을 이끌고 기동요새를 구원하기 위해 쏜살같이 기동요새와의 거리를 좁혔다.
“먼저 갈게요!”
단거리 차원 도약을 연발하여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녀는 곧 침략사령부 본군 직속의 인베이더 특전대와 교전을 시작했다.
그녀는 신격의 경지에 오른 실력자였지만 인베이더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크아아악!”
“으아아악!”
고위 기사들이 피를 흩뿌리며 추락했다. 그들의 수가 절반 이상 줄어든 순간 현준과 친위대가 합류했다.
황금의 검을 휘두를 때마다 인베이더들이 피를 흩뿌리며 추락했다. 하지만 적은 계속 늘어만 갔다. 곁을 지키고 있던 친위대원들의 수는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주인아, 승산이 없다! 적들의 수준이 너무 높다!
또다시 침략사령부 본군의 전투선단에서 일단의 인베이더 특전대가 쏟아져 나오자 지옥참마도가 격렬하게 반응했다.
현준은 황금의 검과 지옥참마도를 회수하며 눈알을 굴려 전방을 빠르게 훑었다.
“최소 SSS급인가…….”
허탈한 표정으로 웃었다. SSS급의 경지를 넘어서는 인베이더들만 해도 삼백이 넘으니, 정신이 아득해지는 숫자였다.
저들을 모두 죽인다고 해도 그 뒤로 일천 척을 우습게 넘기는 숫자의 비행선단이 버티고 있으니 승산이 있는 싸움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물러설 수는 없다.
현준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다가오는 침략자들을 향하는 시선에 살기가 가득했다. 오른손과 왼손의 오러 블레이드에서는 충만한 마력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고 있었다.
눈앞의 인베이더들을 상대하려면 이 정도의 마력을 소모할 수밖에 없었다.
지속된 전투로 인해 마력이 빠른 속도로 소모되고 있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마력 소모를 중단하고 초월검과 신격의 힘을 사용하는 걸 그만두는 순간, 침략자들의 먹잇감이 될 게 뻔했으니까.
“저기 적격자가 있다!”
“쳐라!”
본군 특전대 소속의 인베이더들이 몰려들었다. 물량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솔저들과 하위 인베이더들이 앞으로 나섰던 조금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방패가 된 적들 대부분이 강력한 마력을 품은 이들이라는 것이다.
-온다!
지옥참마도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인베이더들이 전후좌우에서 포위해왔다. 절반은 현준에게 붙었고 나머지 절반은 기동요새로 향했다.
기동요새에 설치된 마동포와 대공포가 쉬지 않고 불을 뿜으며 저항했지만 인베이더들에 의해 실드는 빠른 속도로 마모되어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동요새가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기동요새에 달라붙었던 백오십의 인베이더들 중에 절반 이상이 마동포와 대공포의 집중 사격에 당해 추락하거나 큰 부상을 입고 물러났다.
-기동요새는 안전합니다! 저희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절되었던 통신이 회복되면서 레비앙의 음성이 들려왔다. 현준은 피식 웃으며 두 개의 검을 들어 올렸다.
신경 쓰지 말라고는 했지만 그게 쉽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검을 휘둘렀다.
매섭게 달려드는 인베이더들을 향해 황금의 검과 지옥참마도를 휘두르고 찔렀다.
쉬지 않고 팔을 휘둘렀다. 아끼지 않고 마력을 쏟아부었다.
리퍼의 직감이 적을 일격에 절명시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약점으로 칼날의 끝을 인도했고 인베이더들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허억!”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백오십이 넘는 인베이더들을 죽이고 피로 물든 눈앞을 닦아내고 주위를 살폈을 땐 곁을 지키고 있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사혈과 사혁, 태민과 플레임, 그리고 소수의 친위대원이 전부였다. 현준은 이를 악물고서 마력을 끌어 올렸다.
-단치히의 의지가 깃듭니다. 지켜야 할 사람이 있는 한, 당신은 쓰러지지 않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단치히의 가호가 사용되었다. 현준의 몸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체력이 회복되고 희미해졌던 시야가 조금이나마 회복되었다.
가호가 발동되었으니, 이제 그는 지켜야 할 사람이 있는 한,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친위대는 집결하라!”
목이 터져라 외쳤으나, 간신히 모인 이들은 이십이 되지 않았다.
그들마저도 피투성이거나 팔이 하나 없는 등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기 때문에 현준은 피가 터져 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모선까지 단숨에 돌파한다.”
현준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은 음성이었지만 모여든 친위대원들은 분명하게 알아들었다.
“돌진!”
멀리 보이는 모선을 향해 전속력을 냈다. 단숨에 거리가 좁혀졌다. 본군 특전대 소속의 인베이더들이 앞을 막아섰지만, 현준은 검을 휘둘러 그들을 떨쳐냈다.
황금빛 참격이 뻗어 나가자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엘빈의 호령에 맞춰 군대가 진군합니다. 가호가 함께하는 한 그들은 멈추지 않을 것이며, 패주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가호가 발동했다.
군은 전진했고 곁에서 친위대원들이 하나둘씩 피를 쏟아내며 추락했으나 현준은 멈추지 않았다.
모선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수준 높은 인베이더들이 몰려들었으며, 나중에는 신격의 경지에 오른 이들도 여럿이 달라붙었다.
‘뚫을 수 없다.’
절망적인 현실이 앞을 가렸다.
-악몽급 신격만 셋, 그리고 재난급이 다섯이다. 이건 힘들어.
지옥참마도가 설명을 덧붙였다. 황금의 검을 뽑아 들어 신격의 힘을 해방하고 초월검까지 사용하여 재앙급 신격의 경지에 올랐지만, 저 방어선을 넘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들 여덟이 전부가 아니었다.
SSS급 이상의 인베이더들, 수백이 넘는 숫자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고 곁을 지키고 있는 이들은 이제 없었다. 기동요새의 도움을 받기에는 너무 깊숙이 들어왔다.
“적격자여, 포기하고 얌전히 운명을 받아들여라.”
“수십만 번의 환생을 거듭해도, 너희는 우리의 의지를 막을 수 없다.”
신격의 경지에 오른 여덟 명의 인베이더들이 현준을 비웃었다.
“사용할 수밖에 없나…….”
현준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그리고.
-절실한 요청에 따라, 데우스의 절대적인 의지가 운명에 간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