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200화 (200/217)

# 200

60장 연합 함대의 시작(1)

질드레의 일기장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잊혀진 차원이라 그런지 침략사령부의 군대도 없었다. 방황하는 변종들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현준이 변종들을 상대하는 동안 집정관 이시리아와 고위 기사 레빌이 질드레의 일기장이 있을 만한 곳을 수색했고 이틀 만에 찾아냈다.

그 위치를 보고 받은 현준이 직접 지하로 내려가서 ‘질드레의 일기장’을 찾아냈다.

낡은 검은색 표지의 작은 책이었다. 하지만 낡은 외관과는 달리 안에 기록된 술식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것들이었다.

현준은 전생의 방에서 질드레에게 술식을 배웠기 때문에 일기장에 기록된 내용이 공개될 경우 얼마나 파장이 클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일기장의 내용을 레비앙에게만 공유할 생각이었다.

애초에 일기장에 기록된 술식들은 암호화되어 있어서 질드레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현준이나 레비앙이 아니면 해석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다른 사람들한테 공유하기에는 조금 아깝지…….’

공유는 레비앙에게만 하는 거로 결정했다.

생각을 정리하고 지상으로 올라가니 지친 얼굴의 레빌이 보였다.

SSS급 중견 수준의 무력을 지닌 고위 기사라고는 하지만 수십의 변종을 상대하는 일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이시리아가 악몽급 신격에 해당하는 경지에 올랐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차원 도약을 위한 마력을 아껴야 했기 때문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찾으셨습니까?”

레빌이 먼저 물었다. 상당량의 마력을 소모한 것인지 목소리에서 피로가 잔뜩 묻어 나왔다.

현준은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시리아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원 도약을 위한 마력은 충분히 확보되었습니까?”

“조금만 더 쉬면 될 것 같아요.”

조금 전까지 전투가 있었던 곳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여유가 넘쳤다. 지쳐 있는 레빌과는 정반대였다.

“여기는 변종들이 더 몰려올 수도 있으니까. 지하로 내려가서 휴식을 취하죠.”

“좋은 생각입니다, 강현준 경.”

현준의 말에 레빌이 환한 얼굴로 동조했다.

당장 쉬고 싶다는 염원이 묻어나오는 듯한 몸짓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레빌이 바랐던 것만큼 휴식은 길지 않았다.

이시리아의 마력이 생각보다 빨리 회복되었고 4일 만에 그들은 다시 지구로 돌아가게 되었다.

차원 관문이 열린 곳은 극동 전선의 중앙 기지였다.

원래는 침략사령부의 39번 부대와 41번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곳으로 전진 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강화 헌터들의 활약으로 최전방이 북진하면서 중앙 기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현준은 부길드장, 김태민으로부터 간단한 전황을 보고 받은 뒤, 레비앙을 찾아갔다.

그는 신형 전투선의 설계도를 분석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돌아오셨군요.”

레비앙은 중앙 기지에 마련되어 있는 공방을 지키고 있었다.

익숙한 인기척을 느낀 그는 천천히 연구를 중단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현준은 그에게 다가가 실험대 위에 ‘질드레의 일기장’을 올려놓았다.

“이건…….”

아직 그에게 일기장에 대하여 설명하기 전이다.

하지만 레비앙은 눈앞에 놓인 작고 낡은 일기장이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잊혀 가는 아련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가 존경하는 스승이 늘 들고 다녔던 그것이었다.

“반응을 보니까 설명은 필요 없을 것 같네?”

“당연합니다. 제가 어찌 이걸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질드레의 일기장. 레비앙의 기억이 선명해졌다.

레비앙의 떨리는 목소리에서는 여러 감정이 묻어 나왔다.

그는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손을 뻗어 ‘질드레의 일기장’을 집어 들었다.

“읽어보셨습니까?”

“당연하지. 나한테는 그 자격이 있는 거로 알고 있는데…….”

“물론입니다.”

현준의 대답에 레비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쓸만한 술식이 많더라, 그중에는 지금 나의 경지로는 사용하기 힘든 것들도 많았어. 하지만 레비앙, 너라면 완벽하게 다룰 수 있을 거야. 너는 질드레의 한 명밖에 없는 제자니까.”

‘한 명밖에 없는 제자’라는 단어가 레비앙의 가슴을 흔들었다. 그는 결의에 찬 눈동자를 빛내며 미소 지었다.

“단언컨대, 스승님의 술식을 저보다 완벽하게 해석할 수 있는 마도학자는 없을 것입니다.”

자신감이 넘쳤다. 현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비앙이 의욕이 넘치고 술식을 해석할 방법도 알고 있으니 질드레의 일기장에 기록된 술식들을 이해하고 침략사령부의 신형 전투선 설계도를 이해하는 데에도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리라.

“레비앙, 질드레의 의지를 네게 맡기겠다.”

일기장을 맡긴다는 뜻이었다. 레비앙은 현준의 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고서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이틀이면 됩니다. 물론 완전 해석에 걸리는 시간입니다.”

레비앙의 대답은 감탄을 넘어서 경악할 정도였다. 잊혀진 차원에서 집정관, 이시리아가 마력을 회복하는 4일, 현준이 질드레의 일기장을 빠르게 훑는 데 걸린 시간이다. 해석을 하려면 3배의 시간이 걸릴 터였다.

완전 해석에 이틀을 언급한 것만 봐도 레비앙의 마도학에 대한 이해력과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었다.

“부탁할게.”

믿을 만한 마도학자에게 ‘질드레의 일기장’을 넘겼으니 이제 걱정은 없다.

현준은 이틀 동안 레비앙에게 술식과 연구에 관련된 모든 것을 맡기고 다른 곳에 신경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공방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제 1지휘통제실이었다. 김태민에게 대략 전달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의식 불명 상태인 에릭을 대신해 사실상 위원장 위치가 공식화된 현준은 전황을 조금 더 자세히 보고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극동 전선은 안정되고 있지만, 유럽 전선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소령 계급의 장교가 보고했다. 영국의 근위대가 투입되었다고는 하지만 전황이 크게 나아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극동 전선에 강화 헌터들이 배치되면서 침략군이 밀리기 시작하자 제 13침략군단장 인저블이 유럽 전선을 공략하기 시작한 탓이다.

침략사령부 입장에서 볼 때는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들의 전력으로는 극동 전선을 압도할 수 없었다. 남하하려면 도박에 걸거나 많은 전력의 손실을 감내해야 하는데, 인저블은 점령군이 도착할 때까지 제 13침략군단의 병력을 어느 정도 보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과도한 손실을 피해야만 했다.

“그래서 증원군의 7할을 유럽 전선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이에 대한 승인을 요청드려도 되겠습니까?”

“참모부에서 검토한 다음 저한테 결론을 이야기해 주세요.”

“예, 위원장님.”

최종 결정권은 현준에게 있었지만, 그는 전문 군사지식이 없었다. 그래서 분석은 참모부에 맡겼다.

그들이 현준이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생기는 파급 효과를 분석해서 보고를 올리면 현준이 최종 결정을 내리는 방식이다.

현준의 요청에 참모 장교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참모부에는 뛰어난 인재들이 많으니 분석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브리핑이 끝난 다음 날, 참모부에서 연락이 왔다.

현준은 그들의 분석을 바탕으로 보충병력 일부를 유럽 전선으로 우선 지원하기로 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레비앙이 약속했던 이틀째가 되었다.

“동행하시려고요?”

중앙 기지의 공방으로 향하는 길, 현준은 뒤편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발걸음을 멈췄다.

일부러 기척을 감추려는 노력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천천히 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차원 동맹의 집정관, 이시리아가 그곳에 있었다.

늘 데리고 다니는 호위역의 고위 기사, 레빌은 보이지 않았다.

“들켰네요.”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들킬 수밖에 없죠. 그것보다…….”

다시 정면으로 몸을 돌리고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시리아가 뒤따르는 기척이 느껴졌다.

“레비앙의 공방에 관심이 있나 봅니다?”

“원래는 없었는데, 강현준 경의 말을 들어보니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죠?”

이시리아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현준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분주히 걸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둘은 레비앙의 공방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와 엉망으로 널브러져 있는 각종 자료였다.

현준은 조심스럽게 진입로를 확보하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레비앙은 구석진 곳에서 뭔가를 열심히 분석하고 있었다.

한참이나 열중하고 있던 그는 뒤늦게 기척을 느끼고서 고개를 들었다.

“아, 오셨군요. 이시리아 경이 동행일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있어서 곤란해요?”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시리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레비앙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훌륭한 성과를 보고할 때 구경꾼 한 명 정도는 더 있어도 상관없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윽고, 레비앙의 시선이 현준에게 향했다. 자신의 성과를 당장이라도 보고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느낀 현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결과를 보고해도 좋다.”

현준의 말에 레비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흡사 질드레를 묘사하는 듯한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위대하신 스승, 질드레……. 그분께서 남기신 모든 술식의 분석을 끝냈습니다.”

그리고 설명이 시작되었다. 현준은 질드레에게서 술식 지식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레비앙의 수준에 비하면 많이 부족했기 때문에 절반 정도만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당장 건조를 시작할 수 있나?”

“스승님의 일기장에 마도학자의 정신을 쪼개는 분신 술식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걸 사용하면 중요 작업은 제가 할 수 있지만 술식과 부품의 양산 작업은 다른 마도학자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지구의 마법계 헌터들로는 힘든가?”

“예, 적어도 S급 이상의 마법계 헌터들의 보조가 필요한데……. 그들은 지금 바쁘다고 알고 있습니다.”

레비앙의 말에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존재하는 S급 이상의 마법계 헌터들은 당장 전선에서 싸워야 한다.

“스승님의 일기장에 마도학자 급속 양성 계획이 적혀 있습니다. 이걸 활용하면 양산 부품 제작에 쓸 수 있는 마도학자 수천을 단기간에 양성할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 얼핏 설명을 들은 것 같다.

“계획에 참가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격은?”

“C급 이상의 마법계 헌터면 됩니다. 하지만 이걸로는 어디까지나 임시 방편의 의미가 커서……. 중간 감독을 맡아줄 마도학자들을 수급하지 못하면 대규모 전투선단을 편성하는 건 힘들 겁니다.”

레비앙이 우려를 표했다. 그 순간, 가만히 듣고 있던 이시리아가 손을 들었다.

“중견급 마도학자들이라면 차원 동맹에서 지원해 줄 수 있어요.”

그녀는 차원 도약의 능력자, 소수 인원이라면 아무런 제약 없이 차원 관문을 통해 데려올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가 해결되었군요.”

레비앙이 미소를 지었다. 이시리아와 차원 동맹의 지원으로 인력 문제가 해결되었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현준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신형 전투선이 건조되면 공중에서도 우리가 우위를 점하겠군.”

“그렇게 될 것입니다. 주군.”

현준의 말에 레비앙은 강한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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