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
58장 하사신의 어둠(4)
“크아아악!”
“으아아악!”
여기저기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인베이더들은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 하고 쓰러져갔다.
공격은 보이지도 않았다. SS급에 근접한 무력을 지닌 인베이더들이 무력하게 당할 정도면 마력을 사용하는 게 분명한데 기척을 읽히지 않았다.
“적이 완전 은신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말도 안 돼!”
함교의 인베이더들은 대혼란 속에서 한 명씩 죽어갔다. 완전 은신 상태에서 마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이점이었다. 기척 하나 흘리지 않고 일격 즉살의 검을 사용하여 인베이더들을 학살할 수 있었다.
신격의 힘까지 사용해도 ‘하사신의 어둠’ 덕분에 완전 은신은 풀리지 않았다. 다만 마력 소모가 황금의 검을 꺼내 들기 전과 비교하면 2배 정도 더 심해졌다.
“어, 어디에 있는…… 커헉!”
옆을 지키고 있던 부관의 머리가 사라졌다. 라인켈은 힘없이 쓰러지는 부관의 몸뚱이를 보며 이를 꽉 악물었다. 아무리 기척 감지를 끌어 올려도 도대체 보이지도 않고 마력이 느껴지지도 않으니 무력하게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현준은 그들의 반응을 살피며 차분하게 일격 즉살의 검으로 한 명씩 처리했다.
“집결하라! 산개해 있으면 전부 죽는다!”
라인켈이 외쳤지만, 지시에 응답하고 주위로 모여든 인베이더들은 다섯에 불과했다.
‘함교에만 서른 명이 넘는 인베이더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모두 당하고 이제 겨우 다섯 명이 남았다. 라인켈은 보이지 않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크아아악!”
“화력 집중!”
집결하여 방진을 갖추고 있던 인베이더 한 명이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이번에도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라인켈은 현준의 위치를 대강 짐작하고 마법과 권능의 화력을 집중시켰다.
칠흑을 머금은 창과 칼날, 그리고 화염이 함교의 절반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해, 해치웠나?”
누군가 불안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방어 술식으로 도배된 함교의 절반이 손상될 정도로 화력을 집중시켰다.
‘설마 아직도 살아있을까?’
그는 부디 적의 숨이 끊어졌기를 희망했지만, 그의 본능은 아직도 위험이 남아 있다고 경고했다.
아니나 다를까, 현준은 그들로부터 불과 3m쯤 떨어진 곳에서 싸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
강력한 권능이 현준에게 집중되었지만, 카르타고의 방패를 사용할 수 있는 그에게 큰 위협은 되지 못했다.
“커헉!”
다시 학살이 시작되었다. 함께 방진을 유지하고 있던 인베이더들이 모두 쓰러졌다.
이제 함교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 5급 인베이더로 SSS급 최상위의 무력을 보유하고 있는 라인켈뿐이었다.
“나와라.”
“완전 은신이 풀리면 상황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라인켈의 말에 현준이 완전 은신을 해제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마력을 아끼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자신감의 표현에 가까웠다.
“제기랄, 신격이라니…….”
현준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신격의 힘을 감지한 라인켈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악몽급이라고 해도 신격은 드높은 존재다.
SSS급 최상위의 경지로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 있다. 제대로 싸우기도 전이었지만 라인켈은 절망을 느꼈다.
완전 은신만 없으면 해볼 만할 것 같다고 생각한 자신이 갑자기 우스워졌다.
인제 보니 그건 자만이었다.
“이제 격의 차이가 느껴지나?”
현준이 차갑게 내뱉었다. 라인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패배가 결정되어 있었지만, 그는 침략사령부의 인베이더다. 적격자를 앞에 두고 물러날 수는 없다.
‘단숨에 끝낸다.’
현준은 황금의 검을 뽑아 들었다. 동시에 마력을 끌어 올려 가호를 호출했다.
-라이키리의 빛이 당신을 아득한 저편으로 인도합니다. 빛과 함께 한줄기의 섬광이 되어 적을 꿰뚫으세요.
빛의 군마에 탑승한 현준이 한 줄기 빛이 되었다. 라인켈은 황급히 권능을 사용하여 칠흑의 방패를 소환했지만 검은 기운이 방패의 모양을 갖추기도 전에 선명한 빛줄기가 그의 심장을 관통했다.
“커, 커헉?”
현준은 라인켈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린 걸 보았다. SSS급 최상위와 악몽급 신격 사이에 높은 벽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로 허무하게 당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이, 이게 신격…….”
“이기어검.”
일정 수준 이상의 인베이더들에게는 초고속 재생이라는 귀찮은 특성이 붙어 있으니까 방심할 수 없다. 현준은 이기어검의 마력으로 도살자 단검을 움직였다. 위로 솟구친 도살자 단검의 끝이 라인켈의 미간을 노렸다.
“크억!”
그가 마력을 일으키기도 전에 도살자 단검이 미간에 꽂혔다.
* * *
“침략사령부 병력의 전멸을 확인했습니다. 깃발과 지휘선에 각인된 문장을 보니까 제 13침략군단 휘하의 11번 부대인 것 같습니다.”
레비앙이 보고했다. 그의 뒤로 11번 부대 비행선단의 잔해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현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에 도열해 있는 초인맹 헌터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조국을 멸망시킨 침략사령부에 한 방 먹였다는 것에 들떠 있었다.
“강현준 공! 이 기세를 몰아서 북진합시다!”
“우리가 목숨 바쳐 돕겠소!”
초인맹 헌터들이 잔뜩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현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도 북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11번 부대를 전멸시키느라 너무나 많은 마력을 소모했다.
11번 부대가 차원 도약 과정에서 전력 대부분을 상실했고 백두산 방어선과의 계속된 전투로 전투 피로가 누적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수가 10만 가까이 되었다.
그들을 상대하려면 신격의 힘이 필요했고 기습을 위해 완전 은신 상태에서 전투를 펼치느라 현준의 소모도 컸다.
“레비앙, 설명을 부탁한다.”
“예, 제게 맡겨 주시지요.”
초인맹 헌터들에게 사정을 일일이 설명하기 귀찮았던 현준은 레비앙을 대리인으로 내세웠다.
짧은 한숨을 내뱉으며 앞으로 나선 레비앙이 초인맹 헌터들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동안 현준은 통신 술식을 사용하여 백두산 방어선에 수송 헬기를 요청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현준과 레비앙, 그리고 2천 명의 초인맹 헌터들을 백두산 방어선으로 데려다줄 수송 헬기 편대가 하늘의 끝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군.”
“설득은 끝났나?”
설득이 통하지 않는다면 세뇌 술식을 사용할 생각이었지만 레비앙은 초인맹 헌터들이 조건을 내거는 것으로 물러날 것을 합의했다고 말했다.
“조건?”
“별거 아닙니다. 북진할 때 선봉에 서게 해달라고 하더군요.”
그 정도야 어렵지 않다. 어차피 전투가 발생하면 선봉에 설 부대가 필요하고 강화 술식 각인이 끝난 초인맹의 헌터들은 가장 위험한 최전선에서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
“강현준 위원장님! 어서 헬기에 탑승하셔야 합니다!”
레비앙과 짧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앞에 착륙한 수송 헬기에서 승무원이 달려 나와 탑승을 재촉했다.
그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어보면 백두산 방어선에 무슨 일이 생겼다고 짐작되었다.
현준과 레비앙이 탑승한 수송헬기가 먼저 출발했다.
백두산 방어선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착륙과 동시에 헬기에서 내리기 무섭게 두꺼운 판금 갑옷을 입은 남자가 달려왔다.
영국의 SS급 헌터, 듀크였다. 표정이 잔뜩 굳어 있는 걸 보니 무슨 일이 터진 게 분명했다.
그가 여기까지 온 걸 보니 백두산 방어선이 아니라 유럽 전선의 문제였던 모양이다.
“유럽 전선이 무너졌습니까?”
현준은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수를 먼저 말했다.
그의 물음에 듀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큰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듀크는 물론이고 그의 옆을 지키고 있는 근위대 헌터들의 분위기가 정말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직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곧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 같군요.”
“위원장님께서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시는군요. 예, 유럽 전선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듀크가 잠시 대화를 중단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현준과 레비앙은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이 따라붙은 걸 확인한 듀크는 제 2지휘통제실이 있는 곳으로 향하며 중단되었던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입을 열었다.
“연합군의 병력 소모가 심각합니다. 유럽 전선은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약해져 있습니다.”
듀크의 말에 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했다. 백두산 방어선에는 초인맹과 알파팀의 헌터들이 강화 술식을 받고 합류하면서 상황이 크게 좋아졌다.
유럽 전선이 백두산 방어선에 비해 광범위한 지역에 구축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강화 술식을 받은 영국 근위대 헌터들의 수가 적지 않다.
“강화 술식을 각인한 근위대 헌터들이 전선에 합류한 게 맞습니까?”
합리적 의심이다. 아니나 다를까, 듀크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 모습을 보이는 듀크를 향해 현준은 언성을 높였다.
“듀크 경! 똑바로 말하세요.”
“실은 영국 근위대의 헌터 병력은 전부 본토 방어를 위해 투입된 상태입니다.”
“유럽 전선이 있는데 굳이 본토 방어를 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저는 이해하기 힘드네요.”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현준의 시선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그걸 고스란히 느낀 듀크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드레이크 경께서는 영국 근위대를 유럽 전선에 배치할 것을 거듭 요청했지만, 수상 각하께서 뜻을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여론도 그랬고요.”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러라고 제가 강화 술식을 지원해준 게 아니었을 텐데요.”
“죄, 죄송합니다.”
서슬 퍼런 살기를 내뿜자 듀크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날카로운 살기를 받아내느라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오면 강화 술식을 회수할 수도 있습니다.”
질드레의 술식 지식을 가지고 있는 현준은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듀크를 겁주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을 들은 듀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지금 강화 술식이 회수당하면 유럽 전선에는 절망밖에 남지 않는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수상 각하께 거듭 요청하겠습니다.”
“일주일 안에 유럽 전선에 영국 근위대를 배치하세요.”
“지금 즉시 드레이크 경에게 연락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가보세요.”
현준이 진중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듀크는 드레이크에게 연락하기 위해 양해를 구하고서 황급히 자리를 이탈했다.
“우리는 이시리아 집정관한테 간다.”
“예, 알겠습니다.”
지금 시간이면 숙소에 있을 시간이다. 현준은 이계인들이 머무르는 숙소가 있는 구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숙소를 지키고 있는 고위 기사들은 현준과 레비앙의 얼굴을 알아보고서 옆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초소에서 대기하고 있던 레빌이 달려 나왔다.
“이시리아 집정관은 어디에 있지?”
“안내하겠습니다.”
이시리아는 숙소 건물 옥상에 있었다. 현준은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다음 차원 도약은 언제 가능합니까?”
“당분간은 힘들어요. 마력로에 무리가 가서 조금 쉬어야 해요.”
속으로 팔자 좋다고 생각하며 현준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초인맹이 원하는 대로 북진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