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195화 (195/217)

# 195

58장 하사신의 어둠(3)

현준이 눈을 떴을 때는 무수히 많은 전생과 이어진 공간, 전생의 홀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수십, 수백 개의 문이 붙어 있는 벽이 보였다.

벽에 붙어 있는 문들은 모두 다른 모양새였다. 이제는 익숙해진 이 광경에 현준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배후의 그림자.]

칠흑과도 같은 색의 나무로 만들어진 문을 보는 현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았다.

가벼운 긴장과 들뜬 마음을 숨기고 천천히 문을 열자 눈앞에 깊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문턱을 넘자 이내 희미한 조명이 켜졌고 그걸 따라 발걸음을 옮기자 귀족의 예복을 갖춰 입은 암살자, 하사신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하사신.”

현준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하사신이 희미한 조명 아래로 한 걸음 다가왔다. 짙은 어둠이 물러나면서 드러난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재회의 인사를 주고받기 전에, 우선 박수를 쳐 드리고 싶군요.”

하사신은 두 손을 들어 올려 손뼉을 쳤다. 갈채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지만, 의미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조율자에 의해 반쯤 봉인 당할 때만 해도 다시는 강현준을 보지 못할 줄 알았다.

반영구적인 유폐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 시간이 절대 짧지 않기 때문이다. 현준이 자신의 유물을 찾음으로 인해 해방이 앞당겨질 줄은 몰랐다.

“제가 남긴 어둠을 찾을 줄이야, 이건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얼굴에서는 피로가 묻어 나왔지만, 목소리는 암살자답지 않게 활기가 넘쳤다. 유폐에서 벗어난 직후라서 그런 것 같았다.

“‘하사신의 어둠’을 얻었으니, 그 기술을 배울 최소한의 조건을 갖추셨군요.”

“그 기술이요?”

현준의 물음에 하사신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암살에 특화된 검술, 일격 즉살의 검. 그걸 오늘 전수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눈앞에 깊은 어둠이 펼쳐졌다.

* * *

침략사령부 제 13침략군단은 백두산 방어선의 연합군 병력이 휴식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교대로 부대를 배치하여 공격을 퍼부었다.

부대 하나가 공격에 나서고 재정비를 하는 동안 다른 부대가 2차 공격을 감행하는 방식이었다.

불안정한 차원 도약 과정에서 제 13침략군단은 8할 이상의 전투 병력과 물자를 잃었기 때문에 침략사령부 특유의 인해 전술을 펼칠 수도 없었고 손상을 입은 장비의 정비도 오래 걸렸다.

“왜 32번 부대가 돌아오지 않는 거지?”

“귀환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백두산 방어선을 공격하기 위해 나섰던 32번 부대가 시간이 한참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11번 부대의 인베이더들이 동요했다.

11번 부대의 책임 지휘관, 라인켈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투가 끝나고 후퇴하고 있다는 연락을 마지막으로 통신이 연결되고 있지 않아서 더욱 불안했다.

전투 중이라면 방해 술식이 작용하여 통신이 불안정할 수도 있지만, 이동 중에 연락이 안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기습을 받은 건가?”

가장 유력한 경우의 수였다. 적들이 한반도 공격 지휘부로 물러나고 있는 32번 부대를 기습하면서 방해 술식을 펼쳤다면 지금 그들과 연락이 두절된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정찰 부대를 보낼까요?”

고뇌하고 있는 라인켈의 뒤로 그의 부관이 조심스럽게 다가오며 건의했다. 라인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32번 부대의 이동 경로는 전달받았나?”

“전투가 끝나고 후퇴 명령이 떨어졌을 때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서 전달받아 두었습니다.”

“해당 이동 경로에 고속정 부대와 전투기 편대를 광범위하게 정찰 보내라, 그리고 부대에는 대기 명령을 전파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책임 지휘관님.”

부관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주둔지에서 고속정과 전투기들이 이륙했고 11번 부대 곳곳에서는 책임 지휘관의 명령이 전파되면서 병력이 대기 상태에 돌입했다.

“32번 부대의 지휘선과 비행선단의 잔해를 발견했습니다. 정밀 분석을 해봐야 알겠지만 아마 적의 공격을 받고 격추당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찰 임무를 지휘하던 장교가 함교 안으로 황급히 걸어 들어오며 말했다.

10분 넘게 백두산 지역의 전술 지도를 뚫어지게 보고 있던 라인켈이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찰 부대를 보낸 것이었는데, 설마 지휘선의 잔해를 발견했다는, 이런 절망적인 내용을 들고 와서 보고할 줄은 몰랐다.

“추락 지점과 잔해의 규모로 볼 때 백두산 방어선 공격에 나선 32번 부대 전체가 당한 것 같습니다.”

라인켈의 착잡한 마음을 모르는 것인지 정찰 부대의 장교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보고가 이어지는 동안 책임 지휘관, 라인켈은 심각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쥐새끼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했던가……?”

불안정한 차원 도약으로 8할의 전력을 잃었지만 그런 상태에서도 여전히 제 13침략군단의 병력이 우세했기 때문에 폭풍처럼 백두산 방어선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제 13침략군단의 거센 공격 때문에 백두산에 주둔한 연합군은 지금까지 방어에만 집중했고 제대로 된 반격은 시도할 수 없었다.

물론 전혀 시도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오늘처럼 부대를 전멸시키는 수준의 성과는 없었다.

“쥐새끼가 문 것치고는 피해가 심각하군.”

온전치 않다고는 하지만 하나의 침략 부대가 증발했다. 이건 결코 작은 피해가 아니었다.

라인켈은 방어에만 전념하던 연합군에게서 32번 부대를 전멸시킬 정도의 전력이 어디에서 튀어나왔나 싶어 고민했지만,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책임 지휘관님. 어떻게 하실 겁니까?”

부관이 질문했다. 라인켈은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출진한다.”

“괜찮겠습니까?”

“어차피 이틀 뒤에 백두산 방어선을 공격할 계획이었고 제 13침략군단장님께서 보내신 명령서도 있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32번 부대가 당한 건 상부에서도 예상하지 못했으니 이 정도 변동은 이해해줄 것이다.”

“즉시 전파하겠습니다.”

출진 명령이 떨어졌다. 대기 중이던 11번 부대의 병력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주둔지에서 비행선단이 이륙했다.

“백두산 방어선으로 고속 항행한다.”

라인켈의 명령에 비행선단이 백두산 방어선을 향해 속력을 올렸다.

“정찰대를 보내라.”

“예!”

라인켈은 방심하지 않았다. 32번 부대를 기습한 연합군 부대가 근처에 남아서 기회를 엿보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정찰대를 운용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찰대 운용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제 8고속정 부대가 수상한 마력 파동을 포착하고 이를 지휘선에 전달했다.

“은신 장막의 흔적이 분명합니다.”

제 8고속정 부대가 전송한 자료의 분석을 끝낸 장교가 보고했다. 초인맹에는 꽤 수준 높은 은신 장막을 사용했지만 광범위하게 사용한 탓에 흔적이 조금 남게 된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부관이 물었다.

“우리도 암살 부대를 내보낸다.”

“적 기습 부대의 후방을 공격할 계획이십니까?”

“그래, 11번 상륙선에 있는 암살 부대를 모두 동원한다. 배후를 공격당한 적들이 혼란에 빠졌을 때 재차 공격해서 이점을 취한다.”

계획은 완벽했다. 함교의 부관과 참모 장교 중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정도였지만 라인켈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11번 상륙선에서 암살 부대가 탑승한 강습정 5대가 사출되었습니다.”

부관의 힘찬 목소리에 라인켈은 걱정과 잡념을 잠시 접었다. 곧 전투가 터질 테니, 지금부터 집중해야 한다.

“강습정의 은신 술식이 성공적으로 작동했습니다.”

다른 장교가 부관을 대신하여 보고했다. 강습정 다섯 대가 하늘에서 모습을 감췄다. 함교의 장교들은 연합군의 마법 실력으로는 강습정과 암살 부대의 은신 술식을 알아채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레비앙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초인맹의 기습 부대가 은신 장막의 흔적을 남긴 것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처음부터 11번 부대는 레비앙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었다.

“슬슬 때가 되었습니다.”

레비앙의 말에 초인맹 헌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전기를 입가로 가져갔다. 어딘가와 교신을 끝낸 뒤, 그는 레비앙에게 한 걸음 다가가 입을 열었다.

“강현준 공께서 친위대와 함께 직접 움직이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차례는 오지 않겠군요.”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레비앙은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하늘의 끝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먼 곳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나는 게 보였다.

“시작된 것 같습니다.”

초인맹의 헌터가 말했다. 레비앙은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암살 부대를 태운 다섯 대의 강습정을 사출하고 그들이 은신 술식을 작동하는 걸 확인한 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폭발음은 예상했던 곳이 아닌, 비행선단의 중심에서 터져 나왔다.

콰아아앙!

“무슨 일이냐!”

“4번 전투선에서 폭발입니다!”

부관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그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함교를 다그쳤고 관측 장교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피해 상황 보고해.”

라인켈이 차분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통신 장교가 4번 전투선으로 연락을 보냈지만, 답신은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함교가 폭발한 것 같습니다.”

관측 장교가 보고했다.

“피탄된 건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마력 레이더 최대로 돌리고 방어 병력을 함교 주위에 배치해.”

“예!”

함교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명령을 내린 라인켈은 굳은 얼굴로 좌측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함교의 투명한 벽 너머로 연쇄 폭발을 일으키며 추락하는 4번 전투선의 모습이 보였다.

‘저건 내부에서의 폭발이다. 누가 안에서 함교와 기관실을 공격한 게 분명하다.’

오랜 실전 경험으로 만들어진 날카로운 육감이 그에게 지금 당장 여기서 도망치라고 경고하고 있었지만 라인켈은 책임 지휘관답게 굳건하게 통제단을 지켰다.

쿵!

“방금 선체가 조금 흔들린 것 같은데?”

미약한 흔들림이었다. 부관이 눈살을 찌푸리며 마력 레이더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라인켈 역시 선내 탐색 술식을 담당하는 인베이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침입자가 있나?”

“선내에 마력 반응은 없습니다.”

인베이더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라인켈은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불안은 곧 현실이 되었다.

콰아앙!

폭발과 함께 함교의 문이 날아갔다.

“총원 전투태세!”

인베이더들이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들은 훌륭한 승무원이자 장교이기 전에 악랄하고 전투력 높은 침략자들이었다.

“마력 탐색 최대로!”

“아무것도 없습니다!”

탐색 마법은 물론이고 육안으로도 적을 찾을 수 없었다. 흙먼지가 가라앉은 그곳에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크아아악!”

“으아아악!”

죽음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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