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
58장 하사신의 어둠(1)
다음 차원 도약을 위해서는 나흘 동안 마력을 회복해야 한다고 이시리아가 말했었다.
어차피 그동안은 다른 유물을 찾으러 가지 못하기 때문에 현준은 백두산 방어선에서 대기하면서 새롭게 배치된 알파팀과 초인맹의 강화 헌터들의 활약을 지켜보기로 했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강화 헌터들이 배치되고 바로 다음 날 솔저들로 구성된 지상군 3만과 전투선 9척으로 구성된 전투 부대의 공격이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 공격해왔던 부대에 비해서는 소규모 편성이었다.
“결론은?”
숙소의 지하실이다. 뜨거운 커피가 가득 담긴 머그컵을 입가로 가져가며 현준이 물었다.
그때, 아무도 없는 뒤편에서 푸른 로브를 입은 레비앙이 모습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강화 술식을 각인한 알파팀과 초인맹, 총 2,300여 명의 헌터들은 훌륭한 전력이 되었습니다. 이번 전투에서도 소규모이긴 하지만 공격에 동원된 침략사령부의 병력을 큰 피해 없이 격퇴했습니다.”
성과가 좋은 모양인지 보고하는 레비앙의 목소리에서 활기가 돌았다.
친위대와 길드 집행부, 그리고 추가로 합류한 실험체들을 동원하여 강화 술식을 각인하고 1천여 명 규모의 별동대를 편성했을 때도 백두산 방어선 유지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던가?
별동대의 2배 병력이 강화 헌터로 합류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성과였다.
“다행이네.”
현준은 안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대로라면 마음 놓고 ‘하사신의 어둠’을 찾으러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약속한 4일이 지났다.
“강현준 경. 저희는 준비가 끝났어요.”
이시리아가 레빌과 함께 현준을 찾아왔다. 며칠 동안 마력 회복에만 집중해서 그런지 이시리아의 컨디션은 좋아 보였다. 푸석푸석해 보이던 풀잎색의 머리카락도 자연의 상쾌한 내음을 흘리고 있었다.
“저도 준비가 끝났습니다. 바로 가시죠.”
“그럼 차원 도약을 준비할게요.”
이시리아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차원 도약이라는 수준 높은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마력이 모았다.
이윽고 허공에 갈라지면서 작은 차원 관문이 생성되었다.
“목표 좌표까지 차원을 연결했어요. 지금 바로 도약할 수 있어요.”
이시리아가 굵은 땀방울을 훔쳐내며 말했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열린 차원의 균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지난번처럼 시야가 검게 물들었지만,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았다. 곧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고 현준은 그 빛을 따라 걸었다.
빛은 점점 강해지다가 마침내 어둠이 걷혔을 때는 전혀 새로운 공간이었다.
“밤인가?”
하늘이 어두웠다. 그 흔한 별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사신의 가호 덕분에 어둠에 적응된 눈이 아니었다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둠이 가득했다. 균열을 통해 흘러들어온 빛의 근원이 궁금해질 정도로 사방이 칠흑 같았다.
“밤이 아니에요. 지금은 낮이랍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어느새 따라온 이시리아의 말에 현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어두운 데요?”
“지금은 낮입니다, 강현준 경. 데드락 차원은 암살자들로 유명하죠. 그들은 하사신이라는 가장 강력한 암살자를 잃고 점령당한 뒤, 소수 인원이 저항하기 위해 태양을 파괴하고 차원을 어둠으로 물들였습니다.”
현준의 질문을 받은 이는 레빌이었다.
“저항을 위해서, 태양을 파괴했다라…….”
암살자치고는 스케일이 크다.
“그래서, ‘하사신의 어둠’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리빌스 차원과 비교하면 난이도가 더 높을 겁니다, 주둔 부대 지휘부에서 보관하고 있거든요.”
“지휘부라……. 조금 곤란하네요.”
‘시든밀러의 휘장’ 같은 경우에는 지하에 주둔 병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침투가 쉬웠고 비교적 수월하게 유물을 빼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주둔 부대 지휘부에서 보관 중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저들도 ‘하사신의 어둠’의 가치를 알고 있으니까 보관 중일 것이다. 그렇다는 건 경비가 붙어 있을 확률도 높다고 볼 수 있다.
‘유물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평범한 경비를 붙여 둘 리는 없겠지.’
최소 SSS급 상위에 해당하는 6급 이상의 인베이더, 대전사나 그와 비슷한 직위에 있는 자를 수호자로 붙여뒀을 것이다.
“여기서 얼마나 가야 합니까?”
“마법으로 현재 위치의 좌표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레빌이 대답했다.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뜻이겠지.’
현준은 말없이 기다렸다. 10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짧은 한숨과 함께 레빌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도 운이 좋군요. ‘하사신의 어둠’이 보관된 장소는 여기서 가깝습니다.”
“이시리아 집정관도 지친 것 같은데, 조금 쉬었다가 갈까요?”
며칠간 마력 회복에 집중했다고는 하지만 연이은 차원 도약은 그녀에게 있어서 강행군이었다.
지금도 상당히 지친 얼굴이었기 때문에 현준이 제안했지만 레빌은 고개를 저었다.
“리빌스 차원과는 다르게 위치를 특정할 수 없어서, 마법을 사용했습니다. 저희의 위치가 조금 드러났을 겁니다.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레빌의 말에 현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당장 추격자가 붙은 것도 아니니 부드럽게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고속 비행정을 사용합니까?”
“여기는 주둔 부대 지휘부와 가깝습니다. 방공망이 강력할 테니, 도보로 이동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 있는 이들은 인간의 신체 한계를 아득히 초월한 이들이다. 도보라고는 하지만 단시간이라면 스포츠카의 전력 질주 수준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을 정도였다.
“좋습니다. 그럼 주둔 부대 지휘부까지 안내해 주겠습니까?”
현준이 말했다. 그는 앞서가는 레빌과 이시리아를 뒤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전속력으로 달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천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하는 레빌을 보면서 현준은 주둔 부대 지휘부 인근에 진입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거의 다 왔습니다.‘
레빌이 더욱 속도를 줄이고 3명이 숨을 수 있는 은신 장막을 펼치기 무섭게 머리 위로 전투기 편대가 지나갔다.
마치 뭔가를 찾으려는 것인지 저공비행하는 모습에 현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전투기 몇 대를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로 인해 몰려올 적들이 문제였다.
시선을 과하게 끌면 귀찮아진다. 안전하게 유물을 확보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요란하게 나서는 건 지양할 필요가 있다.
‘눈치 못 챘나……?’
현준은 안도했다. 레빌의 은신 장막은 하사신의 가호로 끌어낸 어둠보다 수준이 낮았지만 솔저 전투기의 마력 레이더에 탐지될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
“언덕 쪽으로 올라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집정관님.”
이시리아와 레빌이 정찰 위치를 논의했다. 이윽고 레빌이 고개를 돌려 현준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고지대로 이동하겠습니다.”
주둔 부대 지휘부는 절벽 아래에 있었다. 교묘하게 위치를 숨기려고 절벽 아래를 선택한 것 같았다. 어쩌면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현준이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하지만 오히려 절벽이라서 고지대로 가면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현준은 레빌의 말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사람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가 적당할 것 같네요.”
고지대에 도착하자 레빌이 말했다. 이시리아는 마력을 아끼기 위해 넓적한 바위에 걸터앉았고 현준은 레빌의 옆에 가서 섰다.
절벽 아래로 주둔 부대 지휘부의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절벽이 상당히 높았지만, 신체의 한계를 벗어던진 SSS급 헌터의 눈에는 순찰 중인 솔저들의 모습까지 보일 정도였다.
“‘하사신의 어둠’이 정확히 어디쯤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현준이 물었다.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있다면 침투 작전이 수월해진다. 하지만 레빌은 현준이 원한 대답 대신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럼 침투해서 찾아야겠네요.”
“지휘부를 둘러싼 결계가 보이십니까?”
레빌이 손가락 끝으로 지휘부를 가리켰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희미하지만 투명한 막 같은 게 얼핏 보이는 것 같았다.
현준은 마법 능력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술식에 대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저 투명한 막이 내부의 마력이 새어나가지 않게 하는 결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지휘부 어딘가에 잠들어 있는 ‘하사신의 어둠’이 가진 특유의 기운 또한 저 결계에 갇혀서 밖으로 흘러나올 수 없었을 터. 이렇게 된 이상 결계 안으로 침투해서 찾을 수밖에 없다.
“정보는 단 하나도 없는 겁니까?”
“예, 죄송합니다.”
“레빌 씨가 죄송할 문제는 아니죠.”
현준은 쿨하게 대답했다.
“이번에는 저 혼자 갑니다.”
“단독으로 침투할 생각이십니까?”
“에, 그게 좋을 것 같네요.”
어차피 레빌과 이시리아는 ‘하사신의 어둠’이 주둔 부대 지휘부 안에 있다는 것 이상의 정보를 모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둘을 데려가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시리아 같은 경우에는 돌아갈 마력을 남겨둬야 하기 때문에 짐이 될 수도 있다.
은신의 장막과 달리, 하사신의 가호는 단 한 명에게만 은신을 제공한다. 레빌과 이시리아를 동행시키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했다.
조금 전에 살짝 봤는데, 레빌이 사용하는 은신의 장막은 지휘부의 인베이더들의 탐지에 걸릴 확률이 높았다.
“바로 가시려고요?”
절벽의 끝으로 향하는 현준의 뒷모습을 보며 레빌이 물었다. 현준은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감속 술식을 사용한 채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는 지휘부의 장벽 너머에 착지했다.
-하사신의 음험한 발걸음이 당신을 완전한 어둠으로 안내합니다. 찬란한 빛 속에서도 당신은 그림자가 됩니다.
현준의 몸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가호가 발동되면서 다량의 마력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다른 마력을 사용하는 순간 은신이 풀리기 때문에 현준은 맨몸으로 장벽을 넘어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마력을 일으키면 안 되기 때문에 벽을 타고 넘을 수밖에 없었다.
장벽 안으로 침투하자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전생의 마력이 느껴졌다. ‘하사신의 어둠’이 흘리는 기운이 분명했다.
‘조금 더 가까이 가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마력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더 가까이 가봐야 할 것 같았다.
현준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서 발걸음을 지휘부 깊숙한 곳을 향한 발걸음을 옮겼다.
지휘부 깊은 곳으로 침투할수록 ‘하사신의 어둠’이 흘리는 기운인 점차 강해졌다.
-강한 마력이 느껴진다. 이 근처에 최소 SSS급 이상의 인베이더 셋이 안에 있다.
제한 구역으로 보이는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자 지옥참마도가 말했다.
현준은 어딘가에 지하로 내려갈 수 있는 통로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침략사령부는 지하에 뭔가를 만들어두는 것을 좋아했으니까.
-주인아, 쟤들 뭔가 이상하다.
주변을 살피고 있을 때, 지옥참마도가 말을 걸어왔다.
-4시 방향이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어딘가로 향하는 인베이더 둘의 모습이 보였다.
-뒤를 밟는 게 좋을 것 같다.
지옥참마도의 말에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서 인베이더 둘의 뒤를 밟았다. 그리고 그 둘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를 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빙고.’
현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