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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만 전생이 날 도와줘-192화 (19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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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장 짧은 귀환(3)

    “어제까지만 해도 A급 수준이었던 이들이 갑자기 S급의 전투력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찌 보면 뻔하지요.”

    듀크가 말했다.

    아무래도 전력을 너무 대놓고 드러낸 모양이다.

    “모두에게 허락해 달라는 건 아닙니다, 분명 위험도 따르겠지요.”

    듀크의 말에 현준은 속으로 웃었다.

    사실 위험 부담은 크게 많이 동반되지는 않는다. 위험한 요소는 대부분을 수정했고 약간의 고통만 참으면 된다.

    “이번에 새로 창설된 영국 헌터 근위대와 러시아 알파팀, 그리고 중국의 초인맹에게라도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헌터 근위대는 영국의 방어를 위한 속셈이 깔려 있을 것이고, 러시아 알파팀과 중국 초인맹은 복수를 위해 나섰겠지.

    ‘이걸 허락해 줘야 하나?’

    현준은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내일까지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현준의 말에 듀크와 하노프가 물러갔다. 그리고 회의실에는 현준과 레비앙, 둘만 남았다.

    “강화 술식을 허용할 생각이십니까?”

    “그래.”

    독점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더 좋은 사용 방법이 떠올랐다. 현준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쟤들한테 강화 술식 부여하면서 세뇌 술식도 같이 박아 넣어. 가능하지?”

    -게슈타인과 구국의 의지가 함께합니다. 구국의 이름하에 잔혹한 수단이 묵인될 것입니다.

    -동조율에 따른 현재 해방도는 2단계입니다.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였지만, 구국의 이름이 함께합니다. 대상의 이성을 마비시켜 불온한 생각을 말소합니다.

    게슈타인의 가호가 발동하면서 일순간 레비앙의 사고가 마비되었다. 그가 비윤리적인 행동이라는 생각을 꺼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만큼 2단계에 이른 게슈타인의 가호는 강력했다.

    “강화 술식이 ‘주’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강력한 세뇌를 부여하는 건 힘들 겁니다.”

    “굳이 센 거로 넣을 필요는 없어, 나중에 나를 적대하지 않고 내가 부탁할 일이 있을 때 긍정적으로 생각할 정도면 돼.”

    타국의 병력을 자유자재로 다룰 생각은 없었다.

    필요한 건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그 정도의 가벼운 세뇌 술식이라면 가능합니다.”

    레비앙이 말했다. 현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그럼, 그렇게 진행해.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강화 술식을 부여받을 인원수에 따라 소요 시간이 달라집니다.”

    당연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저는 방어 술식의 정비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습니다.”

    정예화되어 있는 적의 대규모 군세를 상대로 백두산 방어선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에 레비앙의 방어 술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만약 그의 방어 술식이 없었더라면 백두산 방어선을 지키고 있는 병력의 희생이 더욱 커졌을 것이다.

    비록 공중항모를 잃기는 했지만, 그는 여러 방면에서 도움이 되는 뛰어난 전투 마도학자였다.

    “그쪽에는 직접 오라고 전달해 둘 거야. 설마 너보고 오라고 하겠어? 자기들도 양심이란 게 있지.”

    “저희의 독자적인 술식을 저렇게 당당하게 요구할 때부터 이미 양심의 존재는 의심되는 수준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현준과 달리 레비앙은 듀크의 직설적인 요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레비앙,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어차피 괜찮은 부대 하나 골라서 강화 술식을 부여할 생각이었잖아?”

    친위대와 길드 집행부 외에 다른 부대를 선별해서 강화 술식을 부여한다는 계획을 논의 중인 단계이긴 했다.

    레비앙이 먼저 꺼낸 이야기였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불평하지 않았다.

    게다가 현준은 듀크와 드레이크에게 도움을 받은 적도 있었다. 레비앙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네 마음 다 안다.”

    현준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비앙도 더 많은 이에게 강화 술식을 부여하여 전력을 강화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듀크가 저렇게 당당하게 기술을 요구하면서 조금 불편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준비하겠습니다.”

    “듀크 쪽에는 내가 연락을 할게.”

    현준의 말에 레비앙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회의실을 나섰다.

    현준도 차갑게 식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켜고는 회의실을 나와 숙소로 돌아갔다.

    듀크와 하노프에게 바로 연락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시간을 들여서 그들을 기다리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조금은 안달 나게 할 필요가 있어.’

    현준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다음 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듀크와 하노프에게 연락을 했다.

    마음 같아서는 더 시간을 끌고 싶었지만, 전쟁 중인 상황에서는 여기까지가 마지노선이다.

    “정말 승인해 주시는 겁니까?”

    연락을 받은 듀크와 하노프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현준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제3지휘통제실 안에 마련되어 있는 회의실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대신 시술을 받을 부대가 여기까지 와야 합니다. 백두산 방어선의 상황도 좋지 않기 때문에 레비앙이 오래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요.”

    “이해합니다. 그럼 저는 지금 즉시 헌터 근위대에 연락을 해두겠습니다.”

    “저도 알파팀과 초인맹 생존자들을 백두산 방어선으로 호출하겠습니다.”

    듀크에 이어서 하노프도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라를 잃은 알파팀과 초인맹의 생존자들은 독자적인 연락망을 가지고 있었다.

    현준이 알기로도 그들은 연합군에 합류해서도 연락을 계속해서 유지해 오고 있었다.

    “먼저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세요.”

    현준의 허락을 받은 하노프가 먼저 회의실을 나섰고 듀크 또한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곧 그의 시선은 현준에게 향했다.

    “강현준 경,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유럽 전선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전선 전역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중 유럽 방어를 맡은 연합군의 주력을 담당하는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독일의 병력 피해가 가장 컸다.

    “이걸로 연합군의 병력 손실이 크게 줄어들 겁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말로만 그러는 건 아니겠죠?”

    “물론입니다. 필요하다면 위원장의 명령권을 사용하지 않으시더라도 제가 영국군을 동원하겠습니다.”

    듀크의 말에 현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만 들어도 고맙네요.”

    “필요하시다면 문서로 남길 수도 있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문서까지 요구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보다 더 확실한 증표인 세뇌 술식을 각인시킬 테니까 말이야.’

    * * *

    또 한 번의 전투가 끝났다. 이번에도 몇 명이나 죽었는지 모르겠다.

    그걸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적의 비행선단과 지상군이 물러나는 것을 확인한 현준은 제1지휘통제실로 귀환했다.

    거기서 문서로 된 보고서가 작성되기 전에 작전 참모들로부터 구두로 전황을 전달받았다.

    “내일 아침에 보충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겠습니까?”

    “길드 집행부와 친위대로 편성된 별동대가 그나마 버텨주고는 있지만, 전선에 배치된 병력 대부분의 피로도가 한계 상황입니다. 교대할 예비 부대도 거의 없습니다.”

    현준의 질문을 받은 이는 레이스 부길드장, 김태민이었다. 그는 이번에 한국에서 길드들을 모아 지원 병력을 끌고 왔지만, 그 수가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

    지구의 인구수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 보니 아무리 총력전에 돌입했다고는 하지만 보충되는 병력에도 분명 한계가 있다.

    ‘장기전으로 가면 우리가 불리해.’

    현준의 생각이었다. 지금 지휘통제실에 모여 있는 길드 간부들은 물론이고 연합군 작전 참모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리라.

    “방어 태세를 정비하고 다음 공격에 대비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길드 간부들과 작전 참모들이 대답을 들은 직후, 현준은 의자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다.

    지휘통제실을 빠져나오는 그의 뒤로 그림자 하나가 따라붙었다.

    레비앙이었다.

    “알파팀 헌터 3백 명과 초인맹 헌터 2천 명에게 세뇌가 포함된 강화 술식의 각인이 끝났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조금 더 시간이 걸릴 줄 알았다. 현준의 물음에 레비앙은 희미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술식의 양산화에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각인에 소요하는 시간이 크게 줄었지요.”

    “이제 백두산 방어선에 배치되는 건가?”

    “30분 전에 배치가 끝났습니다.”

    30분 전이면 전투가 끝난 직후다. 이제 다음 전투부터는 그들이 활약할 테니, 백두산 방어선의 부담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현준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문제?”

    “예, 주군. 양산화 과정에서 세뇌 술식이 생각보다 강하게 적용된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인데?”

    “친위대 술식 수준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강한 세뇌라서 자해 같은 걸 제외하면 웬만한 지시는 전부 따를 것 같습니다.”

    레비앙의 대답에 현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이건 문제라고 부를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현준의 속마음은 강한 세뇌를 원했었다.

    하지만 게슈타인의 가호로도 한계가 있을 정도의 비윤리적인 명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레비앙에게 지시하지 않은 것이었다.

    ‘일석이조네.’

    강화 술식이 각인된 군대가 지시에 따른다고? 이건 분명 도움이 될 날이 올 것이다.

    “영국의 헌터 근위대는 아직이고?”

    “예, 지금 수송기를 타고 백두산 방어선 후방 기지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4시간 안에 도착할 것 같군요.”

    레비앙의 말에 현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군 헌터 근위대는 강화 술식의 각인 작업이 끝나더라도 유럽 전선에 배치될 예정이기 때문에 백두산 방어선과는 큰 관계가 없다.

    그러니 그들에게 강화 술식을 각인한다고 해도 백두산 방어선의 전력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급할 건 없다고는 해도, 유럽 전선도 안정화되어야 하니까. 넌 먼저 후방 기지에 가 있어. 나는 이시리아 집정관을 만나러 가야 해.”

    “알겠습니다. 그럼…….”

    두 사람은 각자 이시리아의 숙소와 후방 기지 방향으로 흩어졌다.

    “오셨군요.”

    이시리아는 숙소로 쓰는 조립식 건물 앞에서 레빌과 함께 있었다. 현준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기척을 느낀 것인지 하늘을 응시하고 있던 이시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이시리아 집정관.”

    “예, 말씀하세요.”

    처음과 달리 그녀의 목소리에서 느껴졌던 날카로움이 상당히 무뎌졌다.

    시든밀러의 휘장을 찾으러 가면서 차원을 넘고 전투를 함께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다음 차원 도약까지 얼마나 더 시간이 필요합니까?”

    아직 찾아야 할 유물은 많았다. 전생의 수가 많으니, 유물의 수도 적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모든 유물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많이 찾아서 강해질 생각이었다.

    “앞으로 4일 정도 걸릴 것 같아요.”

    4일이면 시간이 제법 남았다. 그동안 백두산 방어선을 지키면서 레비앙의 강화 술식 각인을 보고 받으면 될 것 같았다.

    “다음 차례는 뭡니까?”

    현준은 문득 궁금해졌다. 찾으러 가기 전에 뭘 찾는지 미리 알고 싶었다.

    이시리아는 현준을 향해 몸을 돌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사신의 어둠’을 찾을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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