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
57장 짧은 귀환(2)
눈을 떠보니 전생의 홀이었다.
짙은 녹색의 철문이 바로 그의 앞에 있었다.
현준은 철문의 중앙에 적혀 있는 이명을 소리 내서 읽었다.
“역전의 사령관이라…….”
이명만 봐서는 아콘의 가호, 무한의 군단과 연계하기 좋을 것 같았다.
만약 군단급 지휘 버프를 가호로 사용할 수 있는 전생이라면 ‘전투’에서 ‘전쟁’으로 발전한 현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짧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고서 굳게 닫혀 있는 철문을 열었다.
현준을 처음 반긴 것은 칠흑과도 같은 어둠이었다. 하지만 문턱을 넘은 순간 조명이 켜지듯 어둠이 물러갔다.
“왔는가?”
중앙에 서 있는 제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현준은 그에게 다가가며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주위에 배치되어 있는 철제 탁자들. 그 위에는 군사 지도와 장기말 같이 생긴 것들이 놓여 있었다
벽에도 전술 지도와 군부대의 배치 같은 것들이 기록된 종이가 어지럽게 붙어 있었다.
“반갑네, 나는 제국 동맹 소속 그랑 다르메의 총사령관, 엘빈이라고 한다네.”
“강현준이라고 합니다.”
제복의 중년 남성이 자신을 소개하자 현준도 이름을 밝혔다.
“이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네.”
엘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의 봉인이 해제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집단전에서의 연이은 승전이다.
하지만 그 조건을 달성하기 쉽지 않은 탓에 엘빈은 영겁의 시간이 흐를 동안 만나본 환생의 수가 많지 않았다.
“왜 나에게 역전의 사령관이라는 이명이 붙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엘빈은 뜬금없이 묻지도 않은 걸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현준은 얌전히 듣고 있기로 했다.
어차피 전생의 방에서 시간의 흐름은 의미 없었으니까.
푸른 제복을 입은 채 멋들어진 콧수염을 기른 엘빈은 노련한 장군의 모습이 연상되게 만들었다.
그는 잠깐 생각을 정리하는 것인지, 그게 아니면 과거를 회상하는 것인지 잠시 말을 멈추고 추억에 젖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렇게 옛날이야기를 전하는 건 오랜만이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군.”
엘빈의 말에 현준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하지 말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전생의 방이 움직이는 시스템을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만약 그가 여기서 계속 환생자를 기다려왔다면? 그건 상당히 외로운 기다림이었을 것이다.
그 감정을 조금이나마 해소해줄 수 있다면 현준은 기꺼이 시간을 소비해 줄 의향이 있었다.
게다가 이곳은 전생의 방이라서 어차피 시간이 흐르지도 않는다.
“처음 나는 내가 속한 차원의 이름을 몰랐다네, 하지만 나중에 다른 이들은 내 고향을 헤일즈 차원이라고 부르더군.”
이야기가 시작되려고 하자 현준은 조용히 의자를 끌어당겨서 앉았다.
그가 경청할 준비를 끝낸 걸 확인한 엘빈이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침공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를 들었을 테지. 나의 고향 역시 조용하면서도 갑작스러운 침략이 시작되었다네.”
처음 시작은 던전과 레이드 게이트였을 것이다.
그리고 차츰 던전의 출현 빈도가 잦아지고 점차 레이드 게이트의 규모가 커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계의 존재를 인식했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겠지.’
다른 전생들과 레비앙 등에게서 지겹도록 들은 이야기다.
이계의 존재를 알아챘을 때는 본격적인 침공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우리 대륙은 넓었지, 그래서 강대한 제국도 많았다네. 하지만 완전히 열린 차원 균열을 통해 상륙한 침략사령부의 병력 앞에서는 저항이 무의미했지. 결국, 불멸할 것 같았던 제국들이 하나씩 무너지고 마침내 가장 강대한 5개의 제국만 남게 되었지.”
그리고 다섯 개의 제국은 저항하기 위해 역사상 최초로 동맹을 맺었다.
“다섯 개의 제국이 하나가 되어 대육군, 그랑 다르메를 편성했지. 함께하는 우리는 더 이상 약하지 않았고 제18침략군단을 몰살시켰다네.”
지금 지구에 상륙한 침략군단은 전력의 8할 이상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고전하고 있는데, 온전한 하나의 침략군단을 전멸시켰다고?’
현준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들이 전부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지. 곧 제21침략군단과 제22침략군단이 상륙했다네. 차원 균열이 완전히 열려 있는 상태라 가능했던 거였지.”
완전히 개방된 차원 관문은 특수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닫히지 않는다.
현준은 그 사실을 레비앙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개방된 차원 균열을 방치한 걸 보면 엘빈이 소속되어 있던 제국 동맹은 균열을 봉합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던 게 분명했다.
“한 개의 침략군단을 몰아내기는 했지만, 상처뿐인 승리였다네, 제국 동맹은 이미 그랑 다르메의 전력 7할을 잃은 뒤였지.”
남은 3할의 병력으로 2개 침략군단을 막아낼 수 있었을까? 현준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다음 이어지는 엘빈의 말도 그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상했겠지만 그랑 다르메는 전멸했고 제국 동맹은 무너졌다네.”
그 이후로는 클래식 클리셰였다. 대륙은 점령당했고 학살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소수 살아남은 이들은 세뇌당해 솔저나 인베이더가 되었다.
“이 비극적인 역사가 반복되어서는 안 되네.”
다른 전생들로부터 수십 번 들었던 말이었지만 현준은 지겨운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그래서 나는 그대에게 가호를 부여하려고 한다네.”
“어떤 가호입니까?”
‘역전의 사령관’이라는 이명에서부터 그가 전해줄 가호의 능력을 짐작했지만, 자세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현준은 차분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지휘 버프라네.”
“지휘 버프요?”
“그렇지. 가호가 유지되는 동안 그대의 군대는 절대 패주하지 않을 것이네.”
현준은 엘빈의 설명을 바로 알아들었다.
‘패주’하지 않는다, 그것은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전투 중에 도망치지 않는다는 것 정도가 될 것 같네.’
다른 효과는 언급이 없었다. 아무래도 ‘패주’하지 않는다는 것 외에 다른 효과는 없는 것 같았다.
강화 버프 같은 게 있었다면 좋겠지만 패주하지 않는다는 지휘 버프도 상당히 쓸모가 많은 것이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물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니, 최악의 상황에서도 휘하 군대를 끝까지 싸우게 할 수 있다.
원래 한계까지 군을 후퇴시키지 않으면 병력 소모가 극심하고 신망도 잃겠다.
하지만 게슈타인의 가호가 함께한다면 신망을 잃는 건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
“가호를 전해 받기 위한 수련은 필요 없습니까?”
현준의 물음에 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미 많은 전생을 만나봤겠지만, 가호를 전할 때 별도의 수련이 필요하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네, 나도 그런 케이스지.”
엘빈은 말을 마치며 현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가호가 전해진 후일 것이야.”
그리고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 * *
“주군.”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잠시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던 현준은 문밖에서 들려오는 레비앙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침대에서 벗어났다.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천천히 문이 열리고 레비앙이 걸어 들어왔다. 현준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는 것으로 남아 있던 졸음을 완전히 떨쳐내고서 옆의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무슨 일이야?”
“연합군에서 주군을 뵙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영국의 듀크 씨와 러시아 알파팀 소속의 SS급 중견 헌터, 하노프 씨입니다. 지금 백두산 방어선에 와 있습니다.”
‘듀크는 드레이크와 함께 유럽 전선을 방어하고 있던 게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단거리 차원 도약이라는 그의 특수 능력을 생각해 보면 지금 백두산 방어선이 있는 게 이상할 정도는 아니었다.
“제3지휘통제실로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쪽에 전달해.”
“알겠습니다.”
레비앙이 먼저 떠났고 현준도 제3지휘통제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친위대장 사혈과 플레임이 합류했다.
이윽고 제3지휘통제실에 도착했다. 장교들과 위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현준에게 경례를 했다. 위원장인 그의 위치는 연합군 사령관보다 높았다.
“위원장님. 회의실 쪽에 자리를 마련해두었습니다.”
소령 계급의 장교가 다가와 안내를 자처했다. 현준은 말없이 그를 따라 회의실로 향했다.
하사 계급의 부사관이 준비해 준 커피를 마시며 10분 정도 기다렸을까?
간이 칸막이로 가려져 있는 회의실 문이 열리고 레비앙과 듀크, 그리고 젊은 러시아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 듀크는 전신 판금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강현준 경, 오랜만에 뵙습니다.”
현준은 대답 대신 악수를 하는 것으로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러시아 사내를 향해 자기소개를 부탁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뒤늦게 자신에게 시선이 닿는 것을 느낀 그는 한 걸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하노프입니다. 러시아 알파팀 소속입니다.”
제13침략군단의 공격으로 국가를 잃은 러시아와 중국의 헌터들은 유럽 전선과 백두산 방어선으로 물러나 저항을 계속했다. 하노프도 그들 중 하나인 것 같았다.
그들은 아직 자신들의 모국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이제는 망국이 되어버린 ‘러시아’라는 단어를 말할 때는 목소리에서 감정의 격동이 느껴졌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듀크가 말했다. 현준도 바라는 것이었다. 그는 대답 대신 듀크에게 집중했다.
“별동대의 활약 덕분에 백두산 방어선의 피해가 많이 줄었다고 들었습니다.”
별동대라고? 현준은 레비앙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자 레비앙은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친위대와 레이스 길드 집행부로 구성된 별동대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아, 걔들?”
강화 술식으로 S급 헌터들을 거의 양산하다시피 만들어내서 전력으로 사용했으니, 백두산 방어선의 상황이 예전보다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실은 유럽 전선의 상황이 많이 안 좋습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긴, 차원 방랑에서 돌아오고 이제 겨우 며칠이 지나지 않았고 레비앙에게는 쉬고 싶다고 모든 보고를 차단하라고 일렀으니 소식이 닿지 않아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많이 안 좋습니까?”
“동유럽 일부가 점령당했고 그로 인해 중동 지역으로 적이 남하하면서 전선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심각한데?’
“그래서 감히 요청드립니다, 별동대를 편성할 때 사용했던 강화 술식을 저희에게도…….”
“그걸 어디서 들었습니까?”
현준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정보가 흘러나온 곳이 레비앙은 아닐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있는 방향으로는 시선조차 던지지 않았다.
‘참모부 회의에서 유출된 건가?’
참모부 회의에서 강화 술식에 대해 언급한 게 기억났다.
어차피 작정하고 숨길 생각은 없었으니,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