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56장 차원 방랑자(2)
9기의 전투기가 일제히 기관포 사격을 시작했다. 빗발치는 총탄 세례가 고속 비행정의 실드를 두들겼다.
전투선 2척도 능숙하게 고도를 낮추며 거리를 좁혀왔다. 그들은 침략사령부 소속의 주둔군이었다.
리빌스 차원은 이미 침략사령부에게 점령되어 무력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저항세력은 분명 존재했고 그들을 전멸시키기 위해 주둔한 군대의 규모 역시 작지 않았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고속 비행정의 정찰이 가끔 있었던 터라, 주둔군의 대응이 빨랐다.
-이글 리더가 전한다. 적 기체의 실드가 견고하다. 마력 광선의 사용을 허가한다.
실드가 강력할 경우, 기관포로는 피해를 주기 힘들다. 동력의 소모가 있더라도 마력 광선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편대장이 모두에게 통신을 보냈다.
통신을 수신한 솔저들이 마력 광선을 사용하려는 순간이었다.
고속 비행정의 도어가 열리고 검은 형상이 위로 솟구쳤다.
일부 전투기의 상부 포탑이 불을 뿜으며 총탄을 흩뿌렸다.
화력망을 형성하여 접근을 막으려는 의도였지만 통하지 않았다.
콰아아앙!
-이글 9이 당했습니다!
그것은 시작이었다. 편대를 구성하고 있는 전투기들이 모조리 격추당했다.
전투기를 격추시킨 검은 형상, 현준은 고속 비행정으로 귀환했다.
“전투선은 따돌릴 수 있죠?”
지옥참마도를 검집에 집어넣고 좌석이 앉으며 현준이 물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레빌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문제없습니다.”
레빌은 전투선의 경우, 속도가 빠르지 않아서 전투기와의 연계가 없으면 고속 비행정을 추격할 수 없다는 설명을 덧붙이고는 속력을 올렸다.
전투선은 마력 광선을 쏟아내며 거리를 좁히려 했지만, 고속 비행정보다 속도가 느려서 따라올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투선의 마력 광선 사정거리에서도 벗어나게 되었지만,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적들의 주둔 부대에 보고되었을 겁니다. 수색대가 움직일 테니,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레빌이 말했다. 은밀하게 이동했다면 조금 더 여유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유감스럽게도 발각되어 버렸다.
점령지에 이변이 생겼으니 주둔 부대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최소한 수색대가 행동할 것이고 운이 없을 경우에는 본대가 움직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쪽의 존재를 인지하고 찾아 나선다는 시점에서 시간제한이 붙은 것이나 다름없다.
“시간이 얼마나 있을 것 같습니까?”
“장담할 수 없습니다. 넉넉잡아도 일주일입니다.”
“냉정하게 볼 때 충분한 시간입니까?”
현준이 물었다. 그는 리빌스 차원에 대한 배경지식도 없고 유물의 정확한 위치도 모른다. 그래서 레빌의 의견이 중요했다.
“서두른다면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대략적인 위치를 알고 있으니, 고속 비행정의 속력을 올리면 되는 문제다.
“목적지 주변에 주둔 부대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긴 하지만 강현준 경의 전투력이라면 신속한 제압이 가능할 정도입니다.”
리빌스 차원에도 소수이기는 하지만 저항세력이 남아 있기는 했다.
그들은 차원 동맹과 연계되어 있었으며, 정기적으로 리빌스 차원의 정보를 보내주고 있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정찰 보고에 의하면 유물이 있는 곳 주변에 주둔 병력이 많지는 않은 거로 파악되었다.
이시리아가 마력이 소진된 상태였고 레빌은 그녀의 경호를 책임져야 하니 실질적인 전투원은 현준뿐이었다.
‘혹사당하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기분 탓이겠지.’
현준은 그런 느낌을 가볍게 넘겼다.
“속도를 조금 더 올리겠습니다.”
레빌이 말했다. 그는 고속 비행정의 동력원이 허용하는 한 최대로 속력을 올렸다.
직선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주둔 부대의 거점을 피해서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예정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더군다나 순찰 중인 전투기 편대와 2번 조우하여 짧은 교전까지 벌였으니, 예정보다 늦어지는 건 당연했다.
“도착했습니다.”
버려진 요새의 상공에 고속 비행정이 멈췄다. 레빌은 조종간을 움직여 고속 비행정을 버려진 요새와 적당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공터에 천천히 착륙시켰다.
-요새에서 다수의 마력 반응이 느껴진다.
고속 비행정에서 내려 땅을 밟기 무섭게 지옥참마도가 보고했다.
상공에서 버려진 요새를 한 번 살폈을 때, 넓은 요새 지역에서 주둔 부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지옥참마도 뿐만 아니라 현준 또한 다수의 마력 반응을 감지했다.
희미하긴 했지만 조금만 집중해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마력의 기척은 요새 지역에 마력을 가진 다수의 생명체가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요새 안에 주둔 부대가 있다고 했죠?‘
장비의 점검을 끝낸 현준이 레빌을 향해 슬쩍 시선을 던지며 질문했다.
레빌은 고속 비행정을 다시 소형화시키고서 현준에게 다가갔다.
“지하에 주둔 중입니다. 정확한 규모는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악몽급 신격의 경지에 오른 강현준 경이라면 무리 없이 제압할 수 있을 겁니다.”
“두 분은?”
“이시리아 집정관님께서는 차원 도약으로 마력 대부분을 소진하여 전투 수행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저는 집정관님의 호위를 책임져야 합니다.”
한 마디로 혼자 가서 싸우라는 말이었다.
현준은 어이가 없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차원 도약에는 상당한 마력 소모가 따른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마력이 바닥난 이는 전투에 나서도 방해만 된다. 현준은 굳이 이 문제를 입 밖으로 더 꺼내지 않기로 다짐했다.
“어떤 적들이 있을지 저는 잘 모릅니다.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두 분을 챙기기 힘들다는 정도는 알죠?”
마음 같아서는 두고 가고 싶었지만 시든밀러가 남긴 유물을 찾기 위해서는 이시리아와 레빌이 동행해야 했다.
“내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어요.”
가만히 듣고 있던 이시리아가 툭 내뱉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현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SSS급 중견 수준의 전투력을 가진 레빌이 호위로 붙었으니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현준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가 없으면 지구로 돌아갈 방법이 애매해지기 때문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우선, 제가 침투해서 경보 장치를 무력화시키겠습니다. 신호하면 따라오세요.”
“굳이 귀찮게 그럴 필요 없습니다, 강현준 경.”
앞으로 달려나가려던 현준은 레빌의 말에 발걸음을 멈췄다.
“지원 요청 신호를 차단할 수 있는 광범위 방해 술식이 각인된 스크롤을 준비했습니다.”
“이렇게 넓은데 그게 가능합니까?”
현준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질드레에게서 술식을 배웠기 때문에 광범위 방해 술식이 얼마나 수준 높고 소모하는 마력이 많은지 알았다.
스크롤에 각인된 술식을 사용하려면 더한 집중력과 마력이 소모된다.
하지만 레빌의 마도학적 수준은 크게 높지 않아 보였다.
“강현준 경. 우리 차원 동맹은 침략사령부에 비해 그 수가 적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까지 버티고 반격할 수 있었을까요?”
레빌이 품속에서 스크롤을 꺼냈다.
“그건 그만큼 마법 술식이 발전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꺼내든 스크롤을 찢자 각인된 마법 술식이 작동했다. 보이지 않는 반구형의 장막이 버려진 요새 지역을 덮었다.
“방해 술식 활성화 완료, 이제 지원을 요청해도 소용없습니다.”
레빌이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현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버려진 요새를 향해 달려갔다. 지원 신호를 차단하는 방해 술식이 활성화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은신을 사용하지 않고 마력을 드러낸 채였다.
“적이다!”
“총원 전투태세!”
당연히 경보가 울리고 지하에서 솔저들이 튀어나왔다.
현준은 속력을 줄이지 않은 상태로 마력을 끌어 올려 가호를 호출했다.
-이스텔이 붉은 마법서를 펼칩니다. 일시적으로 화염 마법의 사용이 가능해집니다.
눈앞에 붉게 물든 마력의 마법서가 펼쳐졌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이스텔과의 동조율이 1차 해방의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멸망을 속삭이는 붉은 마법사가 당신의 불꽃에 주목합니다. 화염계 마법의 위력을 5배까지 강화할 수 있으며 20개 이상의 고등 다중 영창이 가능합니다.
화염 마법 강화를 사용하려는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동안 이스텔의 가호를 사용하면서 쌓인 동조율이 기준을 넘어선 것인지 1차 해방이 발생했다.
‘마력 소모는 엄청날 것 같지만 활용은 해야지.’
현준은 마력을 운용하여 계속해서 가호를 발동시켰다.
-이스텔이 가진 붉은 마법사의 권능을 행사합니다. 화염계 마법의 위력을 5배 강화합니다. 고등 다중 영창을 사용합니다.
현준의 붉게 물든 눈동자가 빛났다.
“파이어 캐논.”
현준은 5배 강화에다가 고등 다중 영창까지 사용했다.
그러자, 그의 머리 위에 순식간에 일백 개가 넘는 거대한 화염구가 생성되었다.
파이어 캐논은 상위 마법이지만 5배 강화에다가 다중 영창으로 일백이 넘는 수가 생성됐다.
솔저들이 최소 A급 하위 이상의 전투력을 지녔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의 숫자의 마법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만한 게 아니다.
“오, 온다……!”
솔저 진영의 누군가 두려움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직후, 일백이 넘는 숫자의 파이어 캐논이 그들을 향해 일제히 쏟아졌다.
“방어 마법을 펼쳐라!”
인베이더들이 날아오르며 방어 마법을 펼쳤으나 역부족이었다.
애초에 전선이 아니라 점령지였기 때문에 배치된 인베이더들의 수준이 높지 않았다. 대부분 13급이었고 그나마 높은 이들도 11급 정도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 5배 강화된 파이어 캐논은 고위 마법을 능가하는 위력에 그 수도 많았다.
인베이더들이 펼친 방어 마법은 계속된 공격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크아아악!”
“으아아악!”
무자비한 화염 마법의 폭격에 일천이 넘는 솔저들과 인베이더 일곱이 장렬하게 산화했지만, 현준의 표정은 불만족스러웠다.
‘마력의 소모가 생각보다 크네.’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들어 올려 베히모스의 가호를 사용하였다.
-베히모스가 공허한 입을 열고 죽은 자의 영혼을 흡수합니다.
베히모스의 가호가 발동하며 공허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량의 영혼이 영원한 공허를 만족시켰습니다. 당신에게 마력의 축복이 선사됩니다.
마력의 부족을 인지했는지 최근 신체 강화의 축복만 내려주던 공허가 이제 다시 마력의 축복을 선사했다.
현준은 일격에 적 병력을 전멸시켰다. 이시리아와 레빌이 한발 늦게 따라붙었다.
그는 신격의 힘을 끌어내는 대신에 지옥참마도를 들고 버려진 요새 지역으로 먼저 들어섰다.
-주인아, 방금의 교전으로 8할 이상이 죽은 것 같다. 남은 놈들은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 같다.
지옥참마도가 말했다. 현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에 숨어 있는 이들의 마력이 느껴졌다. 그들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인지 지하에서 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무인 방어 장치를 모두 무력화시켰습니다.”
레빌이 다가와 보고했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휘장’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시죠.”
“지금 탐색 술식을 작동하겠습니다.”
버려진 요새는 넓었고 적들도 남아 있었지만, 보물찾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남아 있는 소수의 적은 현준의 압도적인 무력을 보고 쉽게 전투를 걸어올 생각을 못 했고 시든밀러의 휘장도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여깁니다.”
버려진 요새의 첨탑 앞에서 레빌이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그가 사용 중인 탐색 술식이 유물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강현준 경, 저희가 밖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부탁하겠습니다.”
긴장을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다. 현준은 어두운 첨탑 안으로 떨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에 시든밀러가 남긴 흔적이 있다.’
마력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여기에 무언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