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187화 (187/217)

# 187

56장 차원 방랑자(1)

도살자 단검을 강화한 직후, 레빌은 설명을 이어가기 위해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적격자, 당신의 전생들이 남긴 유물들은 전 차원 곳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전생의 고향에 남겨져 있는 경우도 있지만, 차원이 파괴되면서 표류물이 되어 다른 곳으로 흘러 들어간 것들의 수도 적지 않지요.”

한 마디로 보물찾기를 해야 한다는 소리 같았다. 다른 차원에 가본 적은 없지만, 무수히 많은 차원으로 이루어진 공간이 상당히 넓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곳들을 누비며 유물을 찾아낼 생각을 하니까 벌써 한숨이 나왔지만, 한편으로는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기대가 되기도 했다.

‘전생의 수가 99만이다. 전부 다는 불가능하더라도 그중 수십은 만날 것이고 유물도 몇 개 정도는 찾을 수 있겠지.’

게다가 레빌의 말을 들어보면 유물은 방금 도살자 단검을 강화해 준 것처럼 특정한 효과를 부여해 주는 것 같았다.

유물을 몇 개만 더 찾아도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고양되었다.

“그런데, 유물을 찾을 수단은 가지고 있는 겁니까?”

현준이 물었다. 단서나 수단이 없으면 탐색이 힘들어질 것이다.

“어디에 있는지 압니다.”

“그럼 왜 찾지 않은 겁니까?”

“새로운 적격자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유물을 찾는 데 전투 인원을 동원할 만큼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레빌은 솔직하게 말했다.

예비 병력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더군다나 유물은 적격자가 있어야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리퍼의 피를 찾은 것도 차원 동맹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무리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적격자가 나타났으니, 무리해서라도 예비 병력을 운용하는 게 옳은 일이겠지요.”

“병력을 동원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걸 보니까, 침략사령부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나 보네요.”

“점령지가 대부분이니까요. 또 주둔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여러 변종 때문에 위험합니다.”

“변종?”

처음 듣는 단어다.

“차원 마력에 노출되어 변이된 생명체의 일종입니다. 이성을 상실한 채 본능만 남아버린 괴물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레빌의 설명에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바로 출발할 수 있습니까?”

“당장은 이시리아 집정관님께서 마력을 회복하셔야 하니 사흘 정도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사흘이라……. 일단은 알겠습니다.”

가능하면 당장 출발하고 싶었지만, 마력이 부족하다는데 어쩌겠는가. 기다릴 수밖에 없는 문제다.

현준은 친위대원을 한 명 불러서 레빌을 임시 숙소로 안내하게 했다. 그리고 레비앙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숙소로 사용하고 있는 조립식 건물의 마당에 나와서 10분 정도 기다리자 레비앙이 찾아왔다.

“다음 적의 공격은 언제일 것 같아?”

무인기 편대가 주력 정찰을 담당하고 있지만 레비앙의 탐색 술식 또한 정찰을 보조하고 있었다.

“중국과 러시아의 침략군 병력이 합류한 건 들으셨지요?”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비앙은 말을 계속해서 이어가기 위해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유럽 쪽에서 연합군이 펼친 반격 작전 때문에 침략군이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모양이더군요. 일부 병력을 따로 편성해서 서쪽으로 보낸 탓에 재정비에 시간이 조금 걸리는 것 같습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만 현준은 크게 마음을 놓지 않았다.

늦어진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머지않아서 그들은 방어선을 공격해 올 것이다.

“레비앙.”

“예, 말씀하시지요.”

“내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백두산 방어선이 제대로 버틸 수 있을까?”

현재 지구에 상륙한 제13 침략군단은 적격자, 강현준이 백두산 방어선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 방면에 다수의 병력을 배치했다.

“오래 버티지는 못합니다.”

레비앙이 확신을 담아 말했다.

연합군의 주력 부대가 주둔 중이라고는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 버티지 못할 것이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셔야 합니다.”

길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레비앙은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말했다.

현준은 그를 향해 슬쩍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그래야지.”

하지만 확신은 없다.

유물을 찾으러 떠나는 여행이 얼마나 길어질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답답한 마음속에서 또 하루가 흘러간다.

* * *

레빌이 말한 이시리아의 마력 회복에 걸린 기간은 사흘이었다.

다행히 그동안 제13 침략군단은 백두산 방어선을 공격하지 않았다. 아니, 공격할 수 없었다.

미국의 SSS급 보조계 헌터, 전율의 에이나가 폭풍의 드레이크와 합류하면서 유럽 전선이 대대적인 반격을 펼치기 시작한 탓이다.

보조계 헌터는 집단전에서 뛰어난 능력 효율을 보여준다. 특히 SSS급 보조계 헌터의 버프 같은 경우에는 능력치의 상승이 컸다.

에이나가 합류했다면 유럽 전선의 연이은 승전도 이상하게 느껴질 만한 게 아니었다. 그곳에는 SSS급, 폭풍의 드레이크가 있었다.

레비앙이 말해준 정보에 의하면 에이나의 버프를 받은 드레이크의 전투력은 악몽급 신격에 가까웠다고 했다.

“강현준 경.”

약속된 시간이 되었다.

밤하늘을 보며 숙소 주변을 산책하고 있는 현준의 뒤편 어둠 속에서 레빌과 이시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현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찾아갈 생각이었습니다.”

“저희는 약속을 지켜요.”

이시리아가 말했다. 여전히 퉁명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만한 어조였지만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서는 많이 누그러졌다.

“지금 바로 차원 도약을 할 수 있습니까?”

“문제없어요.”

이시리아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흘 동안 회복에만 집중한 덕분에 차원 도약에 필요한 마력을 모을 수 있었다.

물론 차원 도약에 사용할 만한 마력만 회복했기 때문에 호위역할로 고위 기사, 레빌이 동행해야만 했다.

“차원 도약을 준비할게요.”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정면을 향해 오른팔을 들어 올리는 이시리아.

그녀의 주위로 마력이 집중되기 시작했고 현준은 레빌에게 다가갔다.

“어디로 갑니까?”

다른 차원에 대해서는 지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말해줘도 잘 모를 테지만, 이름 정도는 알아둘 생각이었다.

“리빌스 차원입니다.”

레빌이 대답했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거기에는 무슨 유물이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시든밀러 경의 고향입니다. 그가 남긴 ‘휘장’이 수도의 폐허에 남아 있습니다.”

“꽤 자세히 알고 있네요.”

조금 놀랐다. 기껏해야 대략적인 위치 정도만 알고 있을 거로 생각했었다.

“저희가 확보를 시도했다가 실패했거든요. 그래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편에 속합니다.”

다른 유물들의 경우에는 이 정도로 자세히는 모른다는 말이었다.

“완성되었어요.”

이시리아가 다가와 말했다.

그녀의 말에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니 눈앞에 갈라진 차원의 틈으로 깊은 공허가 보였다. 차원 관문이 완성된 것이다.

“이제 도약하면 돼요.”

이시리아가 말했다.

그녀와 레빌이 동행할 것이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원 관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빛을 향해 걸어요.”

등 뒤에서 이시리아가 간단하게 설명했다.

차원과 차원을 잇는 경계를 넘는 순간 칠흑의 어둠이 덮쳐왔다. 하사신의 어둠으로 수련한 현준이 당황할 정도로 어두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정면의 어둠이 갈라지면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균열은 점점 커지더니 사람 한 명이 지나갈 정도가 되었다.

‘저긴가?’

이시리아가 설명한 대로다. 현준은 빛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경계를 넘은 순간, 눈앞에 전혀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사막?”

얼떨결에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거라고는 모래와 넓은 밤하늘뿐이다.

“여기가 리빌스 차원입니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차원 도약을 끝내고 균열을 빠져나온 이시리아와 레빌이 호흡을 정돈하고 있었다.

“예, 여기가 리빌스 차원입니다. 지형을 보니까, 중앙 사막 지대인 것 같군요.”

현준의 질문에 대답한 이는 레빌이었다.

“중앙 사막 지대요?”

“예, 리빌스 차원에는 이렇게 넓은 사막 지형을 갖춘 지역이 한 곳밖에 없습니다, 그곳이 바로 중앙 사막 지대죠. 운이 좋네요, 저희가 가야 할 장소와 상당히 가까운 곳입니다.”

레빌이 말했다. 이시리아의 특수 능력으로 차원 도약을 할 경우에는 정확한 좌표로 이동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들이 지구로 이동했을 때에는 신호 술식의 유도 보조가 있어서 정밀 좌표 설정이 가능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그래서 레빌은 중앙 사막 지대에 떨어진 게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다행이네요.”

현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심하기는 일러요. 리빌스 차원의 중앙 사막 지대는 생각보다 넓어요.”

이시리아가 말했다. 레빌이 다가와 지도를 보여주었지만, 지구의 기준과는 달라서 봐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고속 비행정을 타고 3일 정도 걸릴 겁니다.”

레빌이 말했다. 현준은 그를 향해 차분한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레빌 경, 고속 비행정이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소형화 술식을 사용한 고속 비행정을 하나 보관하고 있습니다. 술식으로 다시 크기를 키우면 탑승할 수 있습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현준은 마법 술식은 참으로 편리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구에도 마법계 헌터들이 있지만, 마도학의 수준이 낮아서 이런 복잡한 술식들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바로 이동하죠.”

“예, 집정관님. 준비하겠습니다.”

레빌은 품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하늘 위로 던졌다.

마력을 쏘아 보내자 각인된 대형화 술식이 작동되면서 고속 비행정이 작은 상자를 부수고 튀어나왔다.

일반적인 승용차의 3배 정도 되는 크기라서 3명이 타기에는 문제없을 것 같아 보였지만, 전투를 수행하기에는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그런 현준의 우려를 읽은 레빌이 설명을 하기 위해 천천히 다가와 입을 열었다.

“작지만 수준 높은 마법 술식으로 도배된 비행정입니다. 마력 레이더에도 쉽게 탐지되지 않고 전투를 회피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이 마련되어 있으니, 안심하시지요.”

그 말을 믿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침략사령부의 전투기 편대가 따라붙었습니다! 상공에는 전투선 2척이 천천히 고도를 낮춰오고 있습니다!”

중앙 사막 지대를 벗어나기도 전에 주변을 순찰 중이던 침략군 전투선 2척과 조우하고 전술적 우위를 빼앗긴 상태에서 추격전이 펼쳐지게 되었다.

침략군 전투선 2척은 현준과 이시리아, 그리고 레빌이 탑승한 고속 비행정을 발견하기 무섭게 일체의 경고 방송도 없이 마력 광선 포격과 함께 전투기 9기로 구성된 편대를 사출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알고 있죠?”

현준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시리아는 굳은 표정으로 말이 없었고 레빌은 고속 비행정의 회피 기동을 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어 열어요. 요격하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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