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55장 접촉(1)
빛의 창, 아니 거대한 기둥이 281번 부대의 지휘선을 꿰뚫었다. 거대한 구멍이 생긴 지휘선은 비행 능력을 상실한 채 빠른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지, 지휘선이 격추당했다!”
“이거 후퇴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결국, 지휘선이 지면에 충돌하면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이를 본 지상군은 독단적으로 후퇴해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난리가 났다. 공중의 전투선단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남은 지휘관들이 후퇴를 논할 때, 격추당한 지휘선에서 하나의 통신이 수신되었다.
-지휘부는 아직 기능을 상실하지 않았다.
이에 물러나려던 지상군이 다시 전진했고 전투선단이 마력 광선을 쏟아냈다.
그 모습을 본 현준은 말없이 황금의 검을 뽑아 들고 지휘선이 추락한 곳을 향해 달려갔다.
“엄호하겠습니다!”
사혈과 사혁, 그리고 친위대가 따라붙었다. 추락지를 향해 달려가는 현준의 앞을 소수의 인베이더들과 솔저들이 막아섰지만, 그들은 강화 술식을 부여받은 친위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여기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앞을 막아서는 인베이더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으면서 사혈이 외쳤다. 그의 뒤로 친위대 병력이 몰려와서 솔저들을 학살했다.
강화 술식을 부여받은 뒤로 그들은 전장의 사신이 되어 있었다.
“뒤를 부탁한다!”
추락지에 도착한 현준은 지휘선의 잔해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 속에 삐죽 튀어나온 철제 구조물들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추락지 내부에서 다수의 마력 반응을 감지한 현준은 말없이 황금의 검을 들어 올렸다.
-온다.
지옥참마도가 경고했다. 사방에서 거리를 좁혀 들어오는 기척들에 현준은 황금의 검을 휘둘렀다.
어둠 속에서 금빛 궤적이 그려지고 습격을 시도했던 인베이더들이 붉은 피를 쏟아내며 쓰러졌다.
“여기까지 올 줄이야…….”
칠흑 속에서 이형의 존재가 고개를 들었다.
현준은 그가 지휘관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그의 주위에 있는 인베이더 셋이 상관을 지키는 듯한 대형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이기어검.”
허리에 걸려 있던 도살자 단검이 허공을 꿰뚫었다.
“커, 커헉!”
“으아아악!”
인베이더들이 붉은 피를 쏟아내며 쓰러졌다. 아쉽게도 주 전투 인원이 추락과 함께 전멸한 상태라 호위로 나선 이들의 수준은 기껏해야 13급, S급 상위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악몽급 신격의 경지에 오른 현준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한 전력이었다. 잠깐 시선을 빼앗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무력하게 쓰러지는 수하들을 보며 이형의 존재, 6급 인베이더 로스칼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순식간에 당할 줄이야…….’
일격도 버티지 못할 줄은 몰랐다. 예상보다 적격자의 경지가 높았다.
게다가 로스칼도 지금 추락으로 인해 부상을 입은 상태였기 때문에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었다.
‘공격이다.’
로스칼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 순간, 그의 촉수들에서 검은 화염이 솟구쳤고 현준은 황금의 검을 휘둘렀다.
서걱.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촉수들이 잘려 나갔다.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로스칼은 남은 촉수들을 멈추지 않았다. 동시에 권능을 발현하면서 단숨에 현준과의 거리를 좁혔다. 하지만 현준은 실전 경험이 풍부했다.
로스칼의 폭풍과도 같은 공세에도 불구하고 현준은 현란하게 움직이며 반격했다.
다섯 번의 짧은 공방을 주고받는 게 끝났을 때, 로스칼은 피투성이가 되어 거친 호흡을 쏟아내고 있었다.
초고속 재생으로 촉수가 다시 돋아나고는 있었지만, 그 속도가 이전보다 느렸다. 이미 상당한 마력을 소모한 것 같았다.
“크, 크윽…….”
“시간을 끌 생각인가?”
현준이 차갑게 내뱉었다. 로스칼은 자신의 생각이 읽혔다는 사실에 입술을 깨물었다.
로스칼의 입 밖으로 자꾸만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초고속 재생은 이미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다.
현준은 황금의 검에 마력을 주입했다. 눈앞의 인베이더는 전투력을 상실했다. 그렇게 판단한 그는 땅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커, 커헉!”
로스칼이 현준이 거리를 좁혀온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심장에 황금의 검이 꽂혀 있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현준은 지옥참마도를 뽑아 들어 로스칼의 목을 베었다.
-주인아, 여기 지휘 시설이 아직 기동 중이다.
지옥참마도가 말했다.
“다 부수는 게 좋겠지?”
-물론이다.
현준은 황금의 검을 집어넣고 지옥참마도를 들어 올렸다.
지휘 시설을 부수는 데에는 오러 블레이드면 충분했다. 굳이 신격의 마력을 낭비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 * *
지휘 시설을 철저하게 박살 내고 잔해 밖으로 나오자 병력의 3분의 1을 잃고 패주 중인 281번 부대의 모습이 보였다.
“길드장님!”
멀리서 규환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적이 패주 중입니다!”
“예, 그런 것 같네요.”
“그리고 레비앙 씨가 급히 찾고 있습니다,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레비앙이 찾는다고?
“뒤처리는 맡기겠습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현준은 규환에게 남은 일을 맡기고 발걸음을 옮겼다. 방어선을 넘어 진지가 모여 있는 곳으로 진입하기 무섭게 레비앙으로부터 숙소에게 기다리고 있겠다는 무전이 날아왔다.
머지않아 숙소에 도착했다. 현준은 숙소 주위를 통제하고 있는 친위대 병력을 본 순간, 레비앙이 뭔가 중요한 일로 부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주군.”
숙소로 사용하고 있는 조립형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레비앙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우선 지하실로 가시죠.”
레비앙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밀하게 이야기해야 하는 내용인 것 같았다.
이곳 숙소에는 현준과 소수의 최측근만 알고 있는 지하실이 있었다. 레비앙이 도청 같은 걸 막는 술식 여러 개를 각인시켜두었기 때문에 비밀 이야기를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방어선에 자리를 잡은 뒤로, 계속되는 공세에 바빠서 지하실을 사용할 일은 거의 없었지만 레비앙은 그 필요성을 계속해서 주장하며 폐쇄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사용하게 되네.’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으며 현준은 먼저 지하실로 내려가는 레비앙을 뒤따랐다.
두 사람은 지하실에 도착했다. 이윽고 레비앙은 마력을 일으켜 마법 술식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저희가 보낸 신호를 누군가가 수신한 것 같습니다.”
“정말이야?”
현준의 목소리에서 희망이 묻어 나왔다. 처음 신호를 보낼 때만 해도 레비앙은 큰 희망을 걸지 말라고 했었다. 그랬기에 지금 이 소식이 더욱 반가웠다.
“예, 혹시 몰라서 수신될 경우 반응이 오게 술식을 설정했습니다. 제가 각인한 술식이 아니라서 조심스러웠지만 이렇게 반응이 온 걸 보면 술식의 수정이 제대로 된 모양입니다.”
“어디서 수신한 거야?”
신호를 수신한 쪽이 침략사령부라면 모든 계획이 무너지게 된다. 걱정스러운 시선과 함께 물었지만, 다행히 레비앙의 표정을 밝았다.
“수신 당시의 마력 파장이 침략사령부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다. 가능하면 차원 동맹 쪽에서 신호를 받았으면 좋겠지만, 차원이 몇 개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막연히 기대만 거는 것은 좋지 않다.
“답신은?”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도착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습니다.”
레비앙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한 순간이었다. 지하실 구석에 놓아둔 신호기가 불빛을 반짝이며 반응했다. 그것은 답신이 오면 반응하는 술식을 각인시켜둔 신호기였다.
“저건 뭐야?”
“답신이 도착한 것 같습니다. 지금 바로 확인을 준비하도록 하죠.”
레비앙은 현준의 물음에 대답하며 서둘러 움직였다. 바닥에 백색의 천을 깔고 위에 마법 술식을 각인했다. 답신을 불러오기 위한 간단한 마법 술식이었다.
“답신을 받고 있습니다.”
긴장되는 순간이다. 레비앙의 말에 현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다렸다. 누가 답신을 보냈을까? 가능하면 그 많은 차원 중에서 침략사령부와 대적할 수 있는 유일의 세력, 차원 동맹에서 신호를 수신하고 답신을 보냈기를 기대했다.
“해석 완료, 적대적인 술식이 존재하지 않는 걸 확인했습니다. 보안을 강화한 다음에 바로 재생하겠습니다.”
마력 파장이 레비앙의 주위로 퍼져 나갔다. 도청 등의 감시 술식이 없는지 재확인하는 과정이다.
“보안 확인 완료, 답신을 재생합니다.”
백색의 천 위에 각인된 술식이 반짝이며 빛을 내뿜더니 허공에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이거 통신 술식 같은데?’
현준의 시선이 레비앙에게 향했다.
“이거 통신 술식 아냐?”
현준의 물음에 레비앙은 술식을 한 차례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예, 정확히 말하면 통신을 연결할 수 있는 좌표입니다. 차원 간을 잇는 장거리 통신 마법 술식도 첨부되어 있군요, 대화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차원 동맹일까?”
“이건 차원 동맹의 문장일 확률이 높습니다.”
통신 술식과 좌표 옆에 첨부된 문장을 레비앙이 검지 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차원 동맹은 대표 문장 외에도 동맹에 소속된 각 세력을 나타내는 여러 문장이 있다. 그나마 레비앙이 차원 동맹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모든 문장을 알고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통신을 연결할까요?”
“마력은 충분하고?”
차원 간 통신을 연결하는 거라 레비앙의 마력으로도 부족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레비앙은 해맑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족하지만 검은 마정석을 하나 정도 사용하면 해결될 것 같습니다.”
이쯤 되면 검은 마정석을 만능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현준은 말없이 검은 마정석을 하나 꺼내서 레비앙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질드레의 술식에 의해 정화된 검은 마정석의 마력이 통신 술식으로 흘러 들어갔다. 마법진이 빛을 내뿜으면서 작동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마법진을 응시했다. 1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마법진이 열리면서 중앙에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반갑습니다. 저는 차원 동맹의 고위 집정관, 필리아드라고 합니다.
예상대로 차원 동맹이었다. 현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자신에 대해 소개하고 현재 지구가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역시, 당신이 적격자였군요.
“다들 그렇게 부르더군요.”
-강현준 경 덕분에 제13 침략군단이 무리수를 뒀지요. 그래서 저희 전선에 여유가 생겼습니다. 대규모 병력 파견은 힘들더라도 경께서 전생의 힘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인원 정도는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필리아드가 말했다. 사정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침략사령부의 세력이 워낙 강대해서 부대 규모의 전투원을 뺄 수는 없었다.
소규모라도 군대를 보내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에 실망이 컸지만, 현준은 내색하지 않았다.
-집정관 1명과 고위 기사 여럿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들이 강현준 경을 도울 겁니다.
현준은 몰랐지만, 집정관이면 차원 동맹에서 고위층에 속하는 계급으로 막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수준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최소 악몽급 신격에 해당하는 무력을 지닌 게 차원 동맹의 집정관이다.
어떻게 보면 웬만한 군대보다 더 강력한 전력이 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