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
54장 잠든 유적(3)
제 13침략군단은 지구를 향한 차원 도약 과정 중에 약 8할의 병력을 잃었다.
불안정 균열을 억지로 확장해서 차원 도약을 시도한 탓에 대부분의 병력을 잃은 것이다.
적격자가 예상치 못한 성장 속도를 보인다는 사실을 보고 받고 제 13침략군단을 움직이기로 결정했을 때, 인저블은 차원 도약 과정에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했었지만 그럼에도 실제로 겪어보니 수습이 쉽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병력을 너무 많이 잃었습니다.”
“예상했던 것 아닌가?”
인저블은 불평하는 듯한 어투로 보고하는 부관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며 답했다.
“어느 정도 병력을 잃을 것이라고 예상했었지만 이건 심각한 수준입니다, 군단장님.”
8할을 잃었다. 그것도 대부분이 주력 전투 부대다.
사실상 제 13침략군단은 하나의 차원을 공격하고 점령을 유지할 정도의 병력이 남아있지 않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철군하기에는 늦었다는 걸 귀관도 잘 알고 있을 텐데?”
8할을 잃었다. 여기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참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제아무리 침략사령부가 휘하 병력을 소모품 취급한다고는 하지만 하나의 침략군단에서 8할의 병력이 증발한 것은 사령부에서도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적격자를 사살하거나 지구를 완전히 점령하는, 최소한의 성과를 낼 필요가 있었다.
“철군할 수는 없다. 우리는 여기서 뼈를 묻는다.”
“침략군단장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인저블이 선언하듯 말하자 부관 역시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주력군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다.”
“군단 직속 부대를 움직입니까?”
부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군단 직속 부대는 군단 내부에서도 주력군에 속할 정도로 높은 전투력을 보유한 부대다.
“다행히 군단 직속 부대의 피해는 심각하지 않은 모양이더군.”
“예, 군단장님. 다른 부대들에 비하면 ‘비교적’ 피해가 적은 편입니다.”
제 13침략군단의 8할이 날아간 상태라서 직속 부대 역시 피해를 입었지만 균열이 그나마 안정되어 있을 때, 차원 도약을 한 덕분에 피해율이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군단 직속 부대를 두 개로 나눈다.”
“예.”
“하나는 유럽 방면으로 진군시키고 남은 한쪽은 ‘한반도’로 전진 배치한다.”
적격자를 압박하면서 동시에 유럽 방면으로 진군하면서 러시아의 군사력을 모두 쓸어버릴 계획이었다.
“군당장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제 13침략군단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 * *
중국에서 정찰 활동을 계속하던 위원은 군단의 주력으로 추정되는 병력이 한반도와 러시아로 움직일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UN과 연합군에 전했다.
그동안 방어선을 잘 지키고 있던 러시아군은 군단의 주력 중 하나인 직속 부대가 본격적인 공세를 펼치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러시아가 완전히 점령당했습니다.”
태민이 비보를 들고 왔다. 영토의 상당 부분을 빼앗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버티고 있던 국가다.
“설마 러시아가 무너질 줄은 몰랐는데…….”
보고를 들은 현준은 한숨과 함께 눈살을 찌푸렸다. 러시아는 미국 다음으로 헌터 전력을 많이 보유한 국가다.
그래서 그들이 무너졌다는 사실은 현준은 물론이고 모두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중국이 무너졌을 때와 비교하면 충격이 더 컸다.
“병력이 둘로 나누어졌습니다. 유럽 방면으로 하나의 군세가 이동 중이며, 한반도 쪽으로도 비행선단이 이동 중인 걸 확인했습니다. 중국 쪽의 병력과 합류하여 공세를 펼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래서 드레이크가 방금 전에 말도 없이 유럽으로 간 거였나 보네요”
불과 10분 전까지만 해도 드레이크는 이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딘가로부터 연락을 받더니 얼굴이 창백해져서는 듀크와 함께 자리를 비웠다.
‘유럽 쪽 일이라서 먼저 연락이 갔나 보네.’
현준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백두산 방어선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앞으로 2시간 후면 중국에 주둔 중인 침략군과 합류할 겁니다. 바로 공격이 시작될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위원회와 연합군에 추가 증원을 요청하고 방어선에도 경계 태세를 올리라고 전하세요.”
“예, 길드장님.”
태민이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나섰다. 이윽고 레비앙이 노크와 함께 문을 열고 걸어 들어왔다.
“길드장님. 신호를 보냈습니다. 확인 작업까지 끝마쳤습니다.”
레비앙의 말에 현준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어선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희망할 뿐이다.
“잘될 겁니다.”
“말이라도 고맙다.”
짧은 대화를 끝내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현준은 전투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참전하기 위해 가장 높은 곳에 숙소를 마련했기 때문에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백두산 방어선의 처참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전쟁은 도대체 언제까지 이어지는 걸까…….”
한숨과 함께 터져 나왔다.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는 지겨운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한탄하고 있는 현준의 뒤로 레비앙이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지구가 멸망해도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겁니다.”
현준은 고개를 돌려 레비앙을 바라 보았다. 그의 굳은 얼굴에서 복잡한 감정이 묻어 나왔다.
“침략사령부가 전멸하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을 전쟁입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얌전히 레비앙의 말을 듣고 있던 현준이 짜증 섞인 중얼거림을 뱉어냈다.
저멀리 시선을 던지자 어둠을 머금은 구름을 뚫고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칠흑의 비행선들. 침략사령부의 병력이다.
“길드장님!”
태민이 뛰어왔다. 그는 멀리서 단숨에 거리를 좁혀 왔다.
“곧 탐색전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비행선들을 향해 시선을 떼지 않은 상태로 말했다. 태민은 얌전히 듣고 있다.
“이번 탐색전에서 친위대와 길드 집행부 병력을 내보내보죠.”
다른 침략군단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지구에 상륙한 제 13침략군단의 병력은 전투가 시작하기 전마다 소규모 병력을 먼저 보내서 방어선의 상태를 점검하는 탐색전을 자주 벌이고는 했다.
“알겠습니다.”
태민은 대답과 함께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대기 중인 집행부 병력에게 연락했고 현준은 사혈과 사혁이 지휘하는 친위대를 소집했다.
“부르셨습니까?”
사혈이 대표로 소집에 응했다.
“탐색전이 벌어지면……. 가서 다 쓸어버리고 와라.”
“예, 알겠습니다.”
이윽고, 비행선단에서 전투선 2척이 대열을 이탈하여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지상군의 일부가 방어선을 향해 전진해 왔다.
“탐색전이다.”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하기 앞서 방어선의 취약점을 파악하기 위한 탐색전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현준은 대기하고 있던 친위대와 집행부 병력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다가오는 침략사령부 병력을 향해 달려 들었다.
“교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다행히 저희 별동대가 우세를 점하고 있네요.”
태민이 전투의 시작을 보고했고 레비앙은 차분하게 전황을 읽었다. 탐색전에 나선 1천이 안 되는 별동대 병력이 1만에 달하는 솔저들을 몰아 세우고 있었다.
강화 술식을 부여 받는 걸로 친위대와 길드 집행부 병력의 전투력 수준은 크게 상승한 덕분에 솔저급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탐색전에 나선 솔저들이 전멸 위기입니다!”
“갑자기 어디서 저런 정예 병력이 튀어 나왔다는 말이냐!”
지휘선의 함교에서는 난리가 났다. 지금 백두산 방어선을 공격하고 있는 부대는 281번 부대의 잔존 병력이었다.
책임 지휘관 로스칼이 그동안의 과오를 씻기 위해 본 공세가 시작되기 전에 병력을 끌고 내려온 것이었다.
그런데 탐색전부터 밀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미칠 노릇이다.
“선발대를 퇴각시키고 본대를 앞으로 전진시켜라.”
로스칼이 명령했다. 지금 그가 동원한 병력은 281번 부대의 전력이었다. 이번에도 패배하면 다음은 없다.
‘반드시 백두산 방어선을 뚫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탐색전부터 밀리는 게 꼴이 말이 아니다. 로스칼은 피가 새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전군 앞으로! 오늘은 반드시 저 방어선을 뚫어야 한다!”
지휘선의 함교에서 명령이 전달되었다. 전투선단이 일제히 포문을 열었고 지상군 또한 전진했다.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아직 적격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방어선이 건재합니다! 오히려 반격 당하고 있습니다!”
평소였다면 지금쯤 방어선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을 것이다. 늘 그래왔다. 그러다가 적격자가 참전하면 상태가 조금 나아지고는 했다.
그런데 지금은 적격자가 참전하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방어선이 밀리지 않았다.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다.
“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로스칼이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반드시 백두산 방어선을 뚫어야만 했다.
그런데 왜 평소보다 더 굳건하게 버티고 있냐는 말이다. 이건 예상과는 달랐다.
“적의 정예 병력을 투입한 것 같습니다.”
부관의 보고에 로스칼이 눈살을 찌푸렸다.
“정예 병력이라고?”
“수는 1천이 안 되지만, 대부분이 S급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갑자기 어디서 저런 정예 병력을 끌어 모은 거지?”
의문이었다. 방어선 전체에서 정예 병력을 따로 모았다면 별동대가 움직이고 있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볼 때는 밀릴 수밖에 없었다.
방어선은 오히려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기존의 병력을 모아서 만든 별동대가 아닐 확률이 높았다.
“갑자기 1천 가까이 되는 S급 병력이 어디서 솟아났다는 말이냐…….”
로스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S급부터는 침략사령부에서도 ‘인베이더’로 분류되기 때문에 정예 병력으로 판단한다.
1천의 별동대 대부분이 S급이라면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전력이다.
“우리도 전진한다.”
“지휘부와 호위대도 전진하는 겁니까?”
“그래, 총공격한다.”
“알겠습니다.”
부관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키지 않았지만 책임 지휘관의 명령이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모든 병력은 앞으로!”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지휘선과 그 호위대까지 이동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던 현준은 말없이 검은 마정석 하나를 꺼내 마력을 흡수했다.
검은 마정석의 마력이 술식에 의해 정화되어 현준에게 스며들었다. 전신을 가득 채우는 충만한 마력의 느낌에 그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황금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마력을 끌어 올렸다.
-라이키리의 빛이 당신을 아득한 저편으로 인도합니다. 빛과 함께 한줄기의 섬광이 되어 적을 꿰뚫으세요.
가호가 발동되었다. 빛의 군마에 탄 채로 전격의 랜스를 쥐었다. 그리고 한줄기의 빛이 로스칼이 타고 있는 지휘선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