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182화 (182/217)
  • # 182

    54장 잠든 유적(2)

    레비앙은 약속을 지켰다. 3시간을 말했지만 불과 2시간 만에 분석을 끝내고 술식 각인까지 완벽하게 복사해서 스크롤에 담았다.

    마침, 현준도 침략사령부의 선발 정찰대를 전멸시킨 뒤였다.

    그들은 플레임을 타고 빠르게 유적이 잠들어 있던 거점을 이탈하여 방어선으로 향했다.

    “또 전투 중이군요.”

    백두산 방어선은 침략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수십 척의 전투선이 마력 광선을 흩뿌리고 있었고 지상에서는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술식 각인은 잘 복사했지?”

    “스크롤 안에 넣어 뒀습니다.”

    “적의 배후를 공격한다.”

    현준이 말을 마치며 지옥참마도를 뽑아 들었다. 전투 규모가 크지 않았다. 신격의 힘까지 끌어 올릴 필요는 없었다.

    -시든밀러의 용맹한 검이 당신과 함께합니다. 정의로운 용기가 무너지지 않는 한, 검은 부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지옥참마도에서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쳤다.

    -듀렌달이 당신과 함께합니다. 찬란한 광휘가 정의로운 검에 깃듭니다.

    오러 블레이드가 강화되면서 더욱 선명해졌다.

    “내가 지상군을 맡겠다.”

    하늘보다는 지상의 상황이 위태로웠다.

    비행선이 수십 척이긴 했지만 설치된 대공 포대만 해도 수백 개가 넘었고 추가로 합류한 100여 기가 넘는 전투기들이 상공을 누비며 적들과 교전 중이었다.

    공중은 크게 밀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상의 상황은 달랐다.

    최전방 방어선이 붕괴하면서 적과 아군이 뒤섞여 난전이 벌어졌다. 적의 후방을 향해 지원 포격을 펼치고 있었지만, 그것도 한계가 분명했다.

    “공중항모도 없이 저희 둘 보고 수십 척의 비행선단을 상대하라고 하시다니, 역시 주군이십니다!”

    “그만큼 믿는다는 뜻이지. 적당히 알아들어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현준은 레비앙와 플레임을 뒤로 하고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적의 후방과 전방 그 사이, 정확히 진형의 중앙 지점에 착지하며 가호를 발동시켰다.

    -리퍼의 잔혹한 살의가 깨어납니다. 치명적인 살기의 일부가 해방됩니다. 살아 있는 존재라면 본능적인 두려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살기가 터져 나오자, 솔저들이 피를 토해내며 비틀거렸다. 시야가 붉은색으로 물들면서 그들의 몸에 붉은 점이 보였다.

    “폭풍검.”

    이윽고 오러 블레이더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몰아치는 검에 솔저들이 무력하게 쓰러졌다. 뒤이어 달려온 인베이더들도 휘둘러진 지옥참마도에 치명상을 입고 죽어 나갔다. 현준의 개입으로 전선의 상황이 회복되었다.

    “적장이 죽었다!”

    현준은 앞에서 지휘하던 8급 인베이더를 베었다. 그리고 일부러 그의 잘린 머리를 들어 올리며 크게 외쳤다. 마력을 담은 목소리고 넓은 전장에 울려 퍼졌다.

    아무리 두려움을 모르고 싸우는 침략군의 인베이더들과 솔저들이라고는 하지만 전황이 반전되었다는 건 지휘부로서는 그냥 넘길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후퇴해야 합니다!”

    “이미 전황이 악화되었습니다. 후방으로 물러나서 재정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침략군의 참모들이 후퇴를 건의했고 지휘관은 그걸 받아들였다.

    지휘부의 명령에 따라 지상군이 먼저 물러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공중의 비행선들도 모습을 감췄다.

    “오늘도 간신히 버텨냈군요.”

    어느샌가 레비앙이 옆에 다가오며 말했다. 현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어선 지휘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잔뜩 지친 듯한 드레이크의 주위로 연합군의 참모들이 모여 있었다. 현준의 시선을 느낀 드레이크는 연합군 참모들을 물린 뒤,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위원장님 오셨습니까?”

    드레이크의 얼굴이 어두웠다. 오늘도 너무 많은 병력을 잃었다. 백두산 방어선은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보충 병력이 계속해서 도착하고 있었지만 언젠간 한계를 보일 게 분명하다.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 그래서 이번에 현준이 탐사한 유적에 조금의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곳에는 뭐가 있었습니까?”

    기대를 품은 시선과 함께 질문하는 드레이크를 보며 현준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찾아낸 술식에 대해 레비앙으로부터 간략하게 전해 들었지만 현준의 생각으로는 지금 당장 큰 방어선 상황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레비앙, 대신 설명해드려라.”

    현준은 피곤한 마음에 레비앙에게 대신 설명을 부탁했다.

    레비앙이 앞으로 한 걸음 나오며 설명을 시작했다. 드레이크는 가만히 앉아서 경청했다. 현준 역시 오면서 간단하게 설명을 들었을 뿐인지라 조용히 레비앙에게 귀를 기울였다.

    설명이 끝나고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영국의 SSS급 헌터, 폭풍의 드레이크였다.

    “그러니까, 레비앙 씨……. 이게 다른 차원으로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술식이라는 말입니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차원의 존재는 부정되어 왔다.

    침략군이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한 뒤에서야 그들의 존재가 표면 위로 드러났지만, 여전히 그 존재를 부정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았다.

    ‘드레이크도 그쪽 부류인가?’

    문득 든 생각이다.

    “예, 정확히 어디로 신호를 보내는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목표가 정해져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불특정 다수일 수도 있죠.”

    “보내는 신호 내용은 이쪽에서 기록할 수 있는 건가?”

    “좌표만 따로 입력할 수 있고 나머지는 적혀 있는 내용을 따라야 합니다.”

    술식에 각인되어 있는 내용은 짧지만 확실했다.

    ‘지원을 요청한다.’

    어디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기 때문에 술식을 스크롤에 담아온 것이었다.

    “좌표를 입력하고 지원을 요청하면 응답하는 곳이 있을까요?”

    드레이크가 말했다. 굳이 신호를 보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심정이 목소리에 그대로 묻어 나왔다.

    “침략사령부의 출현으로 다른 차원의 존재는 확실해졌습니다. 몇 개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은 수는 아닐 겁니다.”

    레비앙 대신 현준이 나섰다. 99만 전생도 대부분 서로 다른 차원 출신이니 최소 수십만 개의 차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많은 차원 모두, 침략사령부가 점령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현준의 말에 레비앙이 고개를 끄덕였고 드레이크 또한 조금은 납득하는 표정이 되었다.

    “당장 침략사령부의 본대가 상륙하지 않는 것만 봐도 그들과 대립하는 세력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차원 동맹의 존재에 대해서는 전생들에게 얼핏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지만 정보의 출처를 밝힐 수 없었기 때문에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현준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그럼 신호를 보낼 생각이십니까?”

    드레이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현준은 생각을 정리한 끝에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 신호를 보낼 겁니다.”

    이미 결정을 내렸다. 생각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패널티는 없다.’

    지구가 있는 차원의 좌표가 전송되기는 하지만, 전생들의 말을 들어보면 침략사령부 이상 가는 적들이 존재할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보다 차원 동맹에게 지구의 위치와 상황을 알리는 거로 인한 긍정적인 효과가 더 클 것 같았다.

    “위원장님의 뜻이 그렇다면 제가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계속 진행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드레이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말을 마치고는 방어선을 점검해야 한다면서 지휘부 막사를 나섰다.

    현준도 레비앙과 함께 친위대가 지키고 있는 개인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레비앙.”

    숙소에 도착하기 무섭게 현준은 레비앙에게 말을 걸었다.

    “예, 말씀하시지오.”

    “신호를 보내면 응답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 거라고 생각해?”

    레비앙도 차원 동맹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는 함께했던 스승인 질드레로부터 차원 동맹에 대한 정보를 조금 들었다. 물론 실제로 본 적은 없었지만,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확신했다.

    “장담할 수 없습니다.”

    가능하면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고 싶었지만 헛된 희망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레비앙은 솔직하게 말했고 현준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냉수 한 컵을 비웠다.

    “방어선은 오래 못 버틸 것 같다.”

    얼마 전에 받은 보고서를 보면 보충 병력이 도착하는 속도보다 전력의 소진 속도가 훨씬 빠르다는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금세 무너질 것이다. 검은 마정석을 수거할 때마다 무한의 군단을 소환하여 방어선을 지원하고 있지만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격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레비앙……. 강화 술식은 더 안정화되었나?”

    “당장라도 사용할 수 있다고 얼마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레비앙의 대답에 현준은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침략군의 폭풍과도 같은 공세에 정신이 없어서 완성된 강화 술식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길드의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먼저 시범적으로 이식해서 전력으로 활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부작용이 사라졌으니 강화 술식을 길드원들에게 이식해도 될 것 같았다. 물론 완벽하게 부작용을 없앴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시범적으로 지원자들을 받을 생각이었다.

    레비앙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린다 싶었지만.

    -게슈타인과 구국의 의지가 함께합니다. 구국의 이름하에 잔혹한 수단이 묵인될 것입니다.

    -동조율에 따른 현재 해방도는 1단계입니다. 비윤리적인 제안이지만 모두가 묵인합니다.

    다시 정상적인 상태를 되찾았다.

    “부길드장에게 전달해둘까요?”

    레비앙이 말했다. 현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부길드장, 김태민이 미리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현준의 허락이 떨어지자 레비앙은 김태민을 찾아갔다.

    “드디어 길드장님께서 저희를 필요로 하시는군요.”

    태민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옆에 있는 집행부장, 이규환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집행부는 당연히 전원 지원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협박은 아니었지만, 무언의 압박이 있었다.

    “전원 지원할 겁니다.”

    규환이 대답했다.

    며칠 뒤, 그는 수송 부대에 요청하여 한국의 레이스 길드 집행부 전원을 백두산 방어선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레비앙의 강화 술식 이식이 시작되었다. 김태민과 이규환, 그리고 하종서가 가장 먼저 나섰다. 그들은 가지고 있는 재능이 뛰어난 헌터들이었다.

    그 결과, 태민과 규환은 SS급으로 승급했고 종서는 S급이 되었다.

    다른 집행부 헌터들에게도 강화 술식이 부여되었다.

    등급이 높다고 해서 무조건 승급에 유리한 건 아니었다.

    레비앙의 말에 따르자면,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재능의 한계가 A급이라면 강화 술식을 받아도 해당 등급보다 높이 올라갈 수는 없다고 했다.

    “레이스 길드 집행부 500명 전원이 강화 술식으로 무장을 끝마쳤습니다.”

    강화 술식 부여작업을 시작한 지 며칠 뒤, 레비앙이 보고했다. 신속하게 강화 술식을 부여하기 위해 수면을 줄이고 식사도 걸러서 그런지 그는 일주일 만에 눈에 띄게 초췌했다.

    현준은 술식을 부여받은 헌터들을 강화 헌터라고 칭했고 독립된 집행부 부대를 편성하여 별동대 느낌으로 백두산 방어선에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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