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52장 신격(1)
“싱겁군.”
무미건조한 목소리. 하지만 그것과는 반대로 티링거의 마음은 들뜨기 시작했다.
‘예상외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성장 중인 인간에 불과했다.’
티링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무려, 적격자를 처단했다. 이제 침략사령부 내에서 그의 위치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움직임이 없는 현준에게서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끝이 아니라고 했을 텐데.”
죽은 줄 알았다. 분명 심장을 관통했을 터인데?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과 함께 차가운 살기를 머금은 마력이 사방에 터지듯 퍼졌다.
모든 것을 압도할 만큼 강력했다. 멀리서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던 인베이더들이 힘없이 무너졌다.
5급 인베이더인 티링거조차도 일순간 찾아온 막대한 두려움에 다리의 힘이 풀릴 정도였다.
“가, 갑자기 무슨…….”
시체가 되어 마땅한 놈이 부활했다고? 그것도 5급 인베이더인 자신이 압도될 정도의 거대한 마력을 품고서?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문득 든 생각. 하지만 티링거는 곧 고개를 저었다. 힘을 숨겨도 굳이 창에 심장을 관통당할 필요가 있을까?
고민은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눈앞의 적격자에게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기세는 전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경고했다.
“신격의 경지에 어떻게 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기꺼이 상대해 주마…… 적격자여. 어서 오거라.”
“말 안 해도 갈 거였어.”
현준이 차갑게 내뱉으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티링거도 2개의 단검을 들어 올렸다.
전투를 앞둔 순간, 현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줄기 생각이 있었다.
‘신격의 마력은 검은 마정석을 다룰 수 있다.’
아레스가 남긴 말이었다. 그렇다면 무한의 군단을 소환할 때처럼 검은 마정석의 마력을 다룰 수 있다는 말인가?
‘한 번 시험해보자.’
현준은 티링거를 공격하는 대신 아공간 주머니에서 검은 마정석을 꺼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박살 내고 그 가루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적격자…… 무슨 미친 짓을…….”
티링거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검은 마정적의 조각들이 체내로 흡수되면서 사악한 마력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지금 현준의 신격의 존재였다.
검은 마정석의 마력은 큰 해악을 끼치지 못했고 오히려 현준이 질드레에게 배운 술식을 사용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이게 무슨…….”
뭔가 잘못됐다. 티링거는 지금 현준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강대한 마력을 부정하고 싶었다. 이건 이길 수 없다.
그 모습을 본 현준이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두려움에 떨어라.”
목소리에서 위압감이 느껴졌다. 현준이 기세를 키우자 티링거는 무거운 바위에 짓눌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기분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거대한 마력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크, 크윽…….”
“괴로운가?”
현준이 물었다. 티링거는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그걸 현준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괴로워해라. 지금 너한테 허락된 건 그것뿐이다.”
어느새 현준의 오른손에는 지옥참마도 대신 황금의 검이 들려 있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의 검은 화려한 외견만큼이나 강력한 마력을 품고 있다.
황금의 검에서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쳤다. 티링거는 마른 침을 삼켰다. 거대한 원형을 이루고 있는 다른 인베이더들은 감히 현준에게 접근할 생각조차 못 했다.
“적격자가 신격에 올랐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인베이더들은 경악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5급 인베이더이자 281번 부대의 대전사인 티링거에게 비참하게 무너지지 않았던가? 그런데 쓰러지고 다시 일어났다. 엄청난 마력과 함께.
5초가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다는 말인가?
‘저항해야 한다. 이대로 내가 죽으면 여기는 무너진다.’
한반도 공격에 동원된 군대가 패주하면 281번 부대의 책임 지휘관, 로스칼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
티링거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전신에서 마력을 방출하자 짓누르던 기운이 조금은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 틈에 티링거는 벌떡 일어나 단검을 던졌다. 하나의 단검이 분열하여 수백 개가 되었다.
“안 통해.”
현준을 노리던 수백 개의 단검이 허공에 정지했다. 황금빛의 마력이 검은 단검들에 달라붙어 밧줄처럼 묶어두고 있었다.
평범한 단검 투척이 아니었다. 인베이더의 마력을 사용한 것이었지만 현준이 다루는 신격의 마력 앞에서는 너무나 무력했다.
티링거는 현준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제 내 차례인가?”
그저 말 한마디 뱉었을 뿐인데 티링거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쳤다.
“이게 신격의 위압이라는 말인가!”
티링거는 지금 이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경악하는 인베이더들을 살피며 현준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신격의 힘이 깃든 황금의 검을 들었다.
“소드레인.”
사용법은 알고 있다. 황금의 검에서 기억의 조각이 흘러들어왔으니까. 현준은 능숙하게 시동어를 내뱉으며 하늘로 황금의 검을 던졌다.
황금의 검이 하늘을 꿰뚫은 순간, 위에서 황금빛 마력으로 구성된 오러 블레이드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수백 개가 넘는 숫자였다.
“크아아악!”
“으아아악!”
오러 블레이드가 쏟아지자 인베이더들이 무력하게 쓰러졌다. 일부가 실드를 펼쳤지만 얇은 종이처럼 허무하게 뚫리고 찢어졌다.
티링거 또한 마찬가지였다. 5급 인베이더이자 281번 부대의 대전사, 그의 몸에만 해도 3개의 황금빛 오러 블레이드가 꽂혀 있었다.
“커, 커헉…….”
거친 숨결에서 고통이 섞여 나왔다. 신음이 흘러나오고 핏물이 쏟아졌다.
‘단순한 오러 블레이드가 아니다…….’
신격 수준의 저주가 섞여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티링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신격이라도 이 정도의 마력을 사용하면 안색이 변할 법도 했지만, 눈앞에 있는 적격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멀쩡했다.
‘검은 마정석 덕분인가? 힘이 넘친다.’
현준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마력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검은 마정석이 가지고 있는 마력은 생각보다 엄청났다.
그리고 그걸 소화시키는 질드레의 술식 또한 고효율이었다.
어쩌면 침략사령부에서 사용하는 술식 보다 뛰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 크윽…….”
이길 수 없다. 티링거는 식은땀을 흘리며 신음을 삼켰다. 절망이 고개를 들었다.
“슬슬 끝내볼까?”
여기는 전생의 방이 아니다. 시간이 흐른다는 말이다. 그리고 침략사령부의 281번 부대는 지금도 조금씩 지구에 대한 침략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황금의 검이 티링거에게 향했다. 칼날의 끝에 마력이 모여들었다.
“큭?”
티링거가 신음을 흘렸다. 내부의 마력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터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시야가 흐릿해진다고 느낀 순간 끔찍한 고통과 함께 그의 몸이 폭발했다.
“허무하네.”
5급 인베이더의 최후치고는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무력했다.
티링거를 단숨에 죽여 버린 현준의 시선은 이제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비행선들에 향했다.
현준의 몸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너희들 중에 그 누구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거다.”
황금의 검을 휘두르자 금색의 장막이 펼쳐졌다. 비행선들의 퇴로가 차단당했다. 동시에 하늘이 열리고 금빛 오러 블레이드가 쏟아졌다.
비행선들이 회피 기동을 펼쳤지만, 음속을 돌파한 속력으로 내려꽂히는 오러 블레이드를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덩치가 컸다.
소드레인을 펼치고 그저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을 뿐인데, 대부분의 비행선들이 오러 블레이드에 꽂혀 고슴도치 같은 모습이 된 채 하나둘씩 추락하고 있었다.
“선회하라!”
살아남은 일부 비행선이 전단장의 지시에 일제히 선회를 시작했다. 침략사령부의 기술이 들어간 비행선들답게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선회속도가 빠른 편이었다.
그러나 힘들게 선회한 그들의 앞에는 황금빛 장막이 있었다.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황금빛 장막에 가로 막혀 허둥대는 비행선들의 모습을 보며 현준이 조용히 내뱉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시 한번 소드레인이 쏟아졌다.
* * *
대한민국을 향해 진군해오던 281번 부대의 병력은 신격의 경지에 오른 강현준에 의해 전멸했다.
뒤늦게 도착한 병력까지 합치면 20만이 넘는 솔저들이 휴전선 인근에서 시체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현준은 수백 개의 검은 마정석을 획득했다. 이제 이것들을 어디에 활용해야 할지 생각할 때다.
활용할 방법은 많았다. 무한의 군단을 영구소환해서 배치해 둘 수도 있고 공중항모나 친위대를 강화할 수도 있다. 현준은 얼마 전에 레비앙이 검은 마정석을 통한 강화 술식을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한 걸 떠올렸다.
‘친위대한테 실험해 보면 괜찮을 것 같은데…….’
그들은 기본적으로 신체 실험으로 강화된 이들이었기 때문에 몸이 튼튼했다. 다소 부작용이 있더라도 견뎌낼 것이다.
그리고 부작용이 생각보다 적다면 길드원들에게도 검은 마정석을 활용한 강화 술식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시간은 있다.’
현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얼마 전에 있었던 휴전선에서의 전투에서 281번 부대는 지구에 상륙시킨 병력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치명적인 피해였다. 거침없이 진군하던 281번 부대는 이로 인해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짧은 여유를 얻은 틈에 현준은 레비앙이 있는 공방으로 향했다. 레비앙은 길드 사무소 단지 내에 만들어진 공방에서 주로 생활했다.
“레비앙.”
공방 내부는 질드레가 머무르는 전생의 방과 비슷한 구조에 분위기였다. 현준은 구석진 곳에서 뭔가에 몰두해 있는 레비앙에게 다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레비앙이 고개를 들었다.
“절 찾으셨습니까?”
“예전에 검은 마정석을 활용한 강화 술식에 대해 말했던 거 기억하나?”
“예. 미약하긴 하지만 부작용이 우려되고 생각보다 검은 마정석이 많이 소모될 거라고 예상되어서 허락해주지 않으셨지요.”
레비앙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는 자신이 분위기를 잘 읽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현준이 검은 마정석을 이용한 강화 술식의 사용을 허락해줄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 강화 술식, 검은 마정석만 있으면 지금 당장 시행할 수 있나?”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약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검은 마정석도 많이 소모되고요.”
그리고 주군께서는 부작용을 원치 않으시죠. 레비앙은 뒷말을 삼켰다. 현준은 그를 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검은 마정석은 충분하다. 부작용도 실험체를 통해 1차적으로 알아내면 돼.”
“실험체는…… 어디서 조달합니까?”
“내 친위대를 사용해라.”
현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게슈타인과 구국의 의지가 함께합니다. 구국의 이름하에 잔혹한 수단이 묵인될 것입니다.
-동조율에 따른 현재 해방도는 1단계입니다. 충성스러운 친위대는 반감을 갖지 않습니다. 레비앙의 이성이 조금 마비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