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
49장 대격변(2)
러시아 시베리아 연방관구에 위치한 작은 도시는 평소처럼 행복하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런데, 저녁이 되어 태양이 모습을 감추고 어둠이 내려앉으면서 모든 게 변했다.
하늘에서 거대한 비행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운 밤하늘에, 짙은 검은색으로 칠해진 비행선이라 자세히 봐야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저게 뭐지……?”
티가 안 난다고는 하지만 거대한 비행선이 달을 가리고 부유하고 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도시의 주민들은 하나둘씩 이변을 눈치채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군에 연락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일단 저게 먼저 파악부터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근처에 주둔 중인 군부대는 없었다. 그래도 작은 도시라서 그런지 적지 않은 수의 경찰 병력이 도시 내에 있었고 생활권에 있는 헌터들의 수도 결코 적지 않았다.
“저 비행선은 뭔가 불길합니다. 당장 러시아 연방군에 연락해야 합니다!”
누군가 강하게 주장했다. 칠흑의 비행선이 서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하자 도시의 고위층 인사들도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간다는 걸 깨닫고 러시아 연방군에 지원을 요청했다. 가장 가까운 공군 기지에서 전투기로 편성된 2개 편대를 보냈고 지상전이 펼쳐질 경우에 대비해 육군 비행단에서 수송 헬기 5대가 이륙했다.
하지만 그들은 제시간에 도시에 도착하지 못했다.
“지금부터 ‘제물’ 확보를 위한 지상 도시의 공격을 감행한다. 모든 솔저는 위치로!”
비행선의 함교에서 지휘하고 있던 10급 인베이더이자 공격지휘부의 참모, 하빈스는 정해진 시간이 찾아온 것을 확인하고 결단을 내렸다.
“모든 솔저는 위치로!”
“위치로!”
비행선 곳곳에서 솔저들이 하빈스의 명령을 복창하며 위치로 이동했다.
“마법 폭격을 시작한다. 적의 공군 병력이 오기 전에 제공권 장악을 확실히 하고 지상을 무력화시켜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마법 폭격 실시!”
함교의 승무원들이 복창하며 술식을 조정했다. 비행선의 포문이 열리면서 일제히 검붉은 마력 광선을 쏟아냈다.
하늘에서 마력 광선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그제야 주민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아차리고 도망치기 시작했지만 이미 늦었다.
“꺄아아아아아악!”
“살려줘!”
폭음과 함께 여기저기서 불기둥이 솟구쳤다. 자비 없는 마력 광선의 세례는 지상을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도시에는 공중의 적을 요격할 수단이 없었다. 비행체라고는 경찰에서 보유하고 있는 헬기 몇 대가 전부였다.
헌터들이 있었지만 하빈스의 비행선은 마법계 헌터의 공격이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을 만한 고도에서 부유 중이었다.
“보고합니다. 지상이 무력화되었습니다.”
“하빈스 경. 다음 지시를 내려주시지요.”
솔저들이 상황을 보고했다. 하빈스는 전술지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상은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이대로 비행선의 마법 화력을 계속 사용해서 전부 쓸어버릴 수도 있지만, 제물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지상전으로 병력을 보낼 필요가 있었다.
“솔저들을 보낸다.”
“편성은 어떻게 합니까?”
“오크들을 보내라. 지상 병력을 1차적으로 제압했으니,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비행선 하단부가 열리고 착륙정 4대가 지상으로 향했다. 200여 명의 솔저들이 흩어져서 학살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인과 젊은이,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았다. 냉혹한 학살이 시작되고 도시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 * *
“이미 공격은 시작되었습니다. 러시아 연방군과 알파팀이 움직이고는 있지만 남미의 경우도 있고, 사태가 얼마나 커질지 예측되지 않습니다. 러시아 연방 정부에서도 최악의 경우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어요. 벌써 위원회에 지원 요청이 들어와 있습니다.”
혈맹전에 적극적인 태도로 합류했다고는 하지만 자존심 강한 러시아에서 공식적인 지원 요청을 보낼 정도라니.
‘러시아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할 만한 일인가?’
그건 아니다. 러시아의 헌터 전력은 그야말로 엄청나다. 아마 위원회가 혈맹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으니, 효율적인 대적을 위해 힘을 빌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바로 출발하죠. 동행하시겠습니까? 군용 수송기를 이용하는 것보단 제 공중항모가 조금 더 빠르고 안전할 겁니다.”
“협력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그리고 이번 일로 발생하는 검은 마정석에 대한 권한은 모두 제가 가지겠습니다.”
“러시아에서도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대화가 끝났다. 연락을 받은 공중항모에서 보내준 착륙정을 타고 착함 절차를 끝냈다. 현준은 에릭을 함교로 안내했다.
편안한 승무원실이나 휴게실로 안내할 수도 있었지만.
‘나만 서 있을 수는 없지.’
레비앙이 있다고는 하지만 옆에서 보조를 하는 게 좋았다. 승무원 역할을 맡은 마법계 헌터들의 실력은 아직 부족했다.
“러시아, 시베리아 연방 관구까지 전속으로.”
“비행경로를 재설정하고 전속으로 항행하겠습니다.”
현준이 지시를 내리자 레비앙이 고개를 끄덕이며 술식을 조정했다. 공중항모가 러시아를 향해 방향을 돌렸다.
이윽고 다량의 마력이 빠져나가면서 공중항모가 러시아를 향한 비행을 시작했다.
마력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 속력으로 비행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빨리 러시아 영공에 진입할 수 있었다.
“강현준 위원.”
러시아 영공에 진입하고 통신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던 에릭이 통제단으로 다가왔다. 현준은 정밀 조정을 레비앙에게 맡기고 에릭을 향해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인가요?”
“시베리아 쪽 상황이 생각보다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처음 공격당한 도시는 완전히 점령당했고, 노보시비르스크 주변에도 마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그 규모로 볼 때 30분 안에 공격이 시작될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럼 저희는 어디로 갑니까?”
“노보시비르스크로 이동하는 것보다는 처음 공격받은 도시로 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쪽에 띄운 무인 정찰기가 주요 정찰 거점으로 보이는 건물의 사진을 전송해서요.”
비행경로를 변경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현준은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보시비르스크에는 방어 병력이 갖춰져 있으니 마수들의 공격이 시작되고 레이드 상황이 선포되더라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 에릭의 말처럼 마수들을 통제하는 지휘 거점을 공격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레비앙.”
“예, 주군.”
“속도를 조금 더 올릴 수 있나?”
“가능은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속도를 올리면 이동 중 대공 방어가 취약해집니다.”
레비앙이 조심스럽게 우려를 표했다.
“상관없어. 속도 더 올려.”
대공 경계를 맡은 승무원들이 피를 토하는 심정이겠지만 그건 현준의 사정이 아니었다. 공중항모가 더욱 속도를 높였다.
30분의 시간이 더 흐르고 공중항모는 처음 공격을 당한 도시의 상공에 진입했다.
“맙소사…….”
함교의 승무원 한 명이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도시는 불타고 있었다. 유일하게 화염에 휩쓸리지 않은 중앙에는 기묘한 칠흑의 건축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현대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은 중세 분위기의 요새에 가까웠다. 처음부터 도시에 있었던 건축물은 아닌 것 같았다.
아마, 점령 이후 세워진 지휘 거점인 것 같았는데, 마법의 힘을 빌린 게 분명했다.
“정밀 탐색을 실행한다.”
“적이 너무 많습니다. 생존자 확인이 어렵습니다.”
현준은 지시를 내렸지만, 승무원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 생존자를 신경 쓰지 않고 마력 광선에 의한 폭격으로 전부 쓸어버린 뒤, 진입을 하느냐, 아니면 조금 힘들더라도 폭격 없이 지상 공격을 시작하느냐.
“이대로…….”
결정을 내리고 지시를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쿠우우우웅!
갑작스러운 충격이 전해졌다. 함교가 크게 흔들렸다.
“북쪽 1㎞ 지점에서 마력 반응 발생!”
레비앙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는 마력 반응이 확인된 방향으로 급히 공중항모의 방향을 돌렸다.
희뿌연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칠흑의 비행선.
“길드장님!”
“비, 비행선입니다!”
승무원들이 동요했다. 현준도 긴장한 마음에 마른침을 삼켰다. 비행선을 상대로 하는 공중전은 처음이었다.
공중항모와 달리 모든 게 침략사령부의 기술로 제작된 비행선일 수도 있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만약 침략사령부의 군함이라면 혈맹에서 어설프게 지원을 받아 제작한 공중항모가 밀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다수의 마력 반응! 저쪽에서 공격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레비앙이 외쳤다. 현준은 통제단으로 달려가 반격에 필요한 술식들을 검색하려 했다.
“술식은 제가 준비했습니다. 주군께서는 지시만 내려주시면 됩니다.”
“반격해!”
“수행합니다.”
충전은 비행선이 먼저 시작했지만 레비앙의 뛰어난 술식 제어 능력 덕분에 발포는 공중항모가 조금 더 빨랐다.
포문에서 발사된 마력 광선이 전방에 위치한 검은 비행선의 동체를 두들겼다.
하지만.
“머, 멀쩡합니다. 확인 결과, 손상이 거의 없습니다.”
승무원이 보고했다. 레비앙이 다시 술식을 사용해 충전을 시작했지만, 이제는 비행선의 차례였다. 검붉은 마력 광선이 공중항모를 두들겼다.
“실드 중파!”
공중항모가 크게 흔들렸고 승무원 한 명이 피해 상황을 보고했다. 이쪽은 일격에 실드가 중파당했는데, 저쪽은 손상이 거의 없는 것만 봐도 승산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또다시 결단을 내려야 할 때.
“레비앙!”
“예, 주군.”
“공중항모 지휘를 부탁한다.”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레비앙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 흑염룡을 타고 가서 다 쓸어버리려고.”
현준은 대답과 함께 함교 출입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강현준 위원!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좋습니다. 같이 가시죠.”
에릭, 그리고 플레임과 함께 격납고로 이동했다. 격납고 문이 열리고 플레임이 흑염룡의 형태로 변했다. 현준은 에릭과 플레임의 등에 올라탔다.
-출발하겠습니다.
플레임이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날아올랐다. 단숨에 비행선과의 거리가 좁혀 들었다.
비행선에서 눈치채고 다수의 무인 전투기를 날려 보냈을 땐 이미 플레임은 적의 격납고에 착지한 뒤였다.
“적이다!”
“어느새 여기까지 온 거지?”
솔저들이 몰려왔다. 침략사령부의 사병들이라고는 하지만 최소 A급 하위 수준의 뛰어난 전투원들이었다.
순식간에 격납고로 몰려든 수가 수십 명이었다. 그들 중에는 12급 인베이더도 한 명 섞여 있었다.
“포위해서 공격한다!”
12급 인베이더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지시를 내리며 에릭을 향해 뛰어들었다.
현준은 에릭의 실력도 확인할 겸 플레임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인베이더가 휘두른 창이 에릭의 목을 꿰뚫었다.
‘뭐야?’
이렇게 쉽게 죽는다고? 순간 당황했지만, 자세히 보니 피가 튀지 않았다.
그리고 인베이더의 뒤에서 마력 반응이 발생했다.
“어딜 보는 거죠?”
공간을 찢고 모습을 드러낸 에릭이 차갑게 내뱉었다.
“그건 제 잔상입니다만?”
그리고 그의 뒤로 수백의 ‘에릭’이 나타났다. 그제야 현준은 그의 별명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잔영의 에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