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
46장 당근과 채찍(1)
태민이 전해준 편지로 인해 러시아를 지지하고 있는 국회의원 중에 협박을 당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게 확실해졌다.
밀항을 통해 러시아 알파팀의 헌터들이 더 넘어왔거나 기존에 한국에서 암약하고 있던 이들이 움직인 것 같았다.
편지 내용 또한 검열했겠지만, 통역 마법이나 술식에는 한계가 있었고 ‘세로 드립’이라는 참신한 방법에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현준은 마지막으로 사실 관게를 확인하기 위해 길드 정보부장을 맡고 있는 하종서를 호출했다.
그는 B급 헌터였지만 정보 수집 및 관리 능력만큼은 누구와도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우수했다.
“매수된 사람들과 협박받는 사람들을 구분해서 정리한 다음, 보고서를 작성해서 올리겠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길드 규모가 확장되고 영향력이 커지면서 정보부 또한 성장했습니다. 시간과 예산을 주신다면 매수와 협박을 구분 지을 정도의 정보는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종서가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과하지 않은, 적당한 자신감이 묻어 나왔다.
현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이 일은 정보부장에게 맡기겠습니다. UN 특수 기관의 자료를 열람할 수 있는 임시 권한을 줄 테니, 확실하게 처리하세요.”
혈맹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UN 특수 기관을 움직일 수 없지만, 그들이 수집한 정보를 열람하는 것에는 제한이 없었다.
대한민국은 혈맹이 왕성하게 활동하기도 했고, 이너서클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던 국가이기도 하기 때문에 UN 특수 기관 소속 정찰조사국에서는 이와 관련해서 다수의 요원을 운용했었다.
그때 쌓인 정보가 적지 않은 양일 것이다.
‘최신 정보가 아니라는 게 아쉽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적어도 현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UN 특수 기관의 정보 열람 권한까지 주실 줄이야…….”
종서가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현준이 위원이라고는 하지만 UN 특수 기관의 자료실 열람 권한은 아무한테나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만큼 종서를 신뢰한다는 뜻이었다.
“최대한 빨리 최고의 결과를 가져오겠습니다.”
종서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다짐하며 집무실을 나서고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며칠 동안 현준은 종서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정보부 소속 길드원의 보고에 따르면 온종일 일에만 매달린다는 모양.
기다림이 길어졌지만, 현준은 재촉하지 않았다. 그리고 4월, 꽃 피는 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때였다.
“내가 언론에다 뿌릴까?”
점심시간이 끝나기 무섭게 노크도 없이 집무실 문이 열리고 찾아온 이는 손태희였다. 그녀는 대뜸 현준을 보며 물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에요.”
“때가 아니긴! 이럴 때일수록 여론전으로 밀어붙여야지. 너 러시아랑 전면전할 거야?”
태희는 국제적인 여론몰이를 통해 러시아를 압박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전면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는 듯했지만.
“필요하다면 전면전에 돌입해야죠.”
현준은 달랐다. 그는 진짜 전면전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너, 미쳤어? 상대는 러시아야. 네가 SSS급 헌터가 아닌 이상…… 알파팀만 총동원해도 감당하기 힘들 텐데…….”
러시아의 알파팀은 최정예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봐도 최대 규모의 헌터 집단으로 유명했다.
순수한 규모로만 보면 미국의 성좌대보다도 우위였다. 태희는 그들과 마찰을 최대한 피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 모습을 본 현준은 짧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손태희 씨.”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태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왜 그래?”
“제가 아직도 SS급 하위 정도로 보여요?”
말을 마치며 잠시나마 마력을 해방했다. 한순간 요동치는 깊은 마력의 폭풍을 태희는 보았다.
그녀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빠른 템포의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종서가 걸어 들어왔다.
“손태희 씨. 이만 나가보세요.”
“너어…… 나중에 이야기 해줘야 해.”
“그건 손태희 씨가 하는 걸 보고요.”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는 현준을 보며 태희는 입술을 삐쭉 내밀더니 이내 종서의 옆을 지나쳐 집무실을 떠났다.
“길드장님.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수집했습니다.”
종서가 몇 걸음 다가오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동안 많이 고생한 것인지 눈 밑에 진한 다크서클이 보였다.
“여기 보고서입니다. 검토해 주십시오.”
“수고했어요. 정보부장.”
현준은 종서에게서 건네받은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정보의 질이 높았다.
UN 특수 기관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새삼 하종서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러시아에 매수된 고위 정치인 5명과 협박당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9명에 대한 자료가 정리되어 있습니다. 요약 정리된 내용을 확인하시려면 8페이지를 보면 됩니다.”
8페이지를 폈다.
“친 러시아 세력의 대표는 조한규라…….”
“예. 5선 국회의원으로 이너서클의 뿌리가 뽑힌 이후, 남은 정치인 중 가장 영향력이 강합니다.”
종서가 설명을 덧붙였다.
“상황이 생각보다 좋지 않네요. 보고서에는 러시아 정부가 움직였다는 내용은 적혀 있지 않은데…… 확실한 겁니까?”
알파팀이 한 국가의 고위 정치인들을 매수하고 협박할 정도로 영향력이 강했던가?
“블라디미르의 단독 행동입니다.”
“좋지 않네요. 블라디미르가 이렇게 과격한 사람이었나요?”
블라디미르에 대해 아는 건 공식적인 기록이 전부였다. 제자인 페트렌코를 잃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외교 관계를 무시하고 대책 없이 나올 줄은 몰랐다.
“블라디미르의 개인 성향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씀드리기 힘들지만 최근 행보가 비정상적인 것 또한 사실입니다.”
“협박을 받고 있는 정치인들과 만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신상 정보는 9페이지에 정리해 뒀습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이틀 정도는 푹 쉬어요.”
“감사합니다.”
종서가 감사 인사와 함께 고개를 숙이고는 집무실을 나갔다. 이번에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아서 마음 같아서는 며칠 더 휴가를 주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정보부장의 역할이 컸다. 이틀간의 특별 휴가를 주는 것도 현준은 조금 무리하는 것이었다.
종서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혹사에 가까운 업무 할당에도 불구하고 말없이 따랐다.
그는 현준이 레이스 길드장을 맡을 때부터 태민과 함께 충성해 온 멤버였고, 그 마음가짐이 남들과는 달랐다.
-외출하는 건가?
언제나처럼 장비를 점검하기 시작한 현준을 보며 지옥참마도가 무심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시간이 많이 없어. 밤이 되면 바로 움직인다.”
현준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당장 블라디미르와 알파팀이 레이스 길드 사무소 단지를 집중공격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다.
아직까지는 그런 미친 짓을 할 정도는 아닌 것인지, 아니면 뭔가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공격은 없었지만 시간문제였다.
‘블라디미르랑 알파팀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내가 선수를 쳐야 한다.’
현준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그렇군. 다시 피바람이 불 때가 되었는가…….
지옥참마도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윽고 점검을 끝낸 현준은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러시아 알파팀으로부터 협박을 받고 있는 정치인들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첫 번째 정치인의 저택 근처에 도착한 현준은 차에서 내렸다. 차량의 기척은 지우는 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발각될 확률이 높았다.
알파팀이 정치인을 협박하면서 감시를 붙이지 않을 리가 없었으니까.
‘감시가 있다.’
헌터의 신체 능력은 평범한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다. 3㎞ 정도 밖에서 도보 이동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 지점에 순식간에 도착했다. 예상대로 감시가 붙어 있었다.
‘숫자는 넷.’
꽤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은밀하게 숨어있었지만 뛰어난 기척 감지 능력을 가지고 있는 현준을 속일 수는 없었다.
‘제압하는 건 좋은 선택지가 아닐 것 같네.’
감시를 하고 있는 헌터들이 기절하거나 목숨을 잃으면 나중에 감시받고 있던 정치인이 의심을 받을 것이다.
생각을 마친 현준은 완전 은신 상태가 되었다. 저택에는 수준 높은 무인 경비 시스템이 작동 중이었지만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무인 경비 시스템을 돌파하여 저택 안으로 들어선 현준은 정치인이 잠들어 있는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침실에는 감시가 없나?’
확인 완료. 정치인은 침대 위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감시자들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의 약한 마력 파동을 일으켜 그를 깨웠다.
“허억!”
약하지만 잠을 깨우기에는 충분했다. 잠들어 있는 정치인이 벌떡 일어났다.
“진정하세요. 도와주러 왔습니다.”
“당신은……?”
어둠 속에서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냈지만, 정치인은 크게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질문을 던졌다. 3선 국회의원 정도 되니까 담력이 센 모양.
“레이스 길드장 강현준입니다.”
현준은 대답과 함께 일부러 희미한 조명 아래로 얼굴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정치인은 그제야 안심했다.
“아…… 제 편지를 보셨군요.”
“예. 이성일 의원. 그래서 도와주러 왔습니다.”
“대가는…… 러시아에 대한 규탄입니까?”
“그것도 좋지만, 뒷정리도 확실히 해줬으면 하네요.”
“뒷정리라면 어떤 겁니까?”
이성일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이제부터 국내의 러시아 알파팀 헌터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할 겁니다. 그쪽에 매수된 국회의원들이 날뛰지 않게 적당히 견제해달라는 말입니다.”
“그 정도 선이라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저와 제 친구들의 안전만 확보해준다면 말이죠.”
“안전이라…….”
현준은 할 일이 많았다. 협박당하고 있는 고위 정치인들이 배신했다는 정보를 알파팀에서 입수하면 그들은 분명 암살자를 보내올 것이다.
동시다발적인 암살 시도가 있다면 현준은 홀로 대차하기 힘들어진다. 길드 집행부의 병력을 활용해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데, 다수의 알파팀 헌터들의 공격으로부터 정치인들을 지켜낼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여유 병력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친위대를 동원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만약의 상황에 대비한 최후의 보루와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가능하면 다른 이들에게 활용하고 싶지 않았다.
“조만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와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까요.”
많이 불안해 보였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은밀하게 저택을 벗어났다.
다른 국회의원들을 찾아가기 전에 경호인력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무한의 군단을 쓸 수밖에 없나…….”
군단 소환사, 아콘이 전해준 지식에 따르면 무한의 군단은 시간제한이 있는 소환 방식 외에도 영구 소환이 가능했다.
다만, 이 경우에는 일반 소환을 할 때와 비교했을 때 10배 이상의 마력이 소모된다는 것 같았다.
즉, 10배 이상의 검은 마정석이 소모된다는 이야기다. 효율이 좋지 않다는 정보 때문에 가능하면 안 쓰려고 했지만,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니까 어쩔 수 없었다.
‘저장된 마정석은 충분해.’
길드 사무소 단지에 도착한 현준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검은 마정석 10개를 꺼내 들었다.
“현금술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마.”
검은 마정석이라는 캐쉬로 뽑기를 지를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