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154화 (154/217)

# 154

45장 서리 칼날이 피에 물들다(3)

-주인. 일어났나?

이른 아침, 눈을 뜨자 지옥참마도의 목소리가 현준을 반겼다.

“잘 잤냐.”

-무의미한 질문을 하는군.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에고 소드가 잠을 잘 리가 없지.

“후우.”

남아 있는 잠기운을 심호흡과 함께 날려버리고는 샤워를 끝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거실로 나가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어젯밤 전생의 공간에서 질드레를 만났다. 그는 현준과 레비앙이 만났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했다.

비앙이라면 믿음직한 조력자가 되어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처음에 한 가지, 현준이 품었던 의문. 어째서 늙지 않았는가? 이건 차원을 표류하면서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공간에 있으면 가능하다고 질드레가 말했다. 덕분에 의문은 해결되었다.

“길드장님. 특수 경찰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현준은 길드장 집무실에 앉아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태민이 들어와 보고했다.

“진행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특수 경찰국장이 직접 길드 사무소 단지에 찾아오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러시아 헌터들의 테러를 통제하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책임감을 느낀 것일까?

고작 진행 상황의 전달을 위해서 특수 경찰국이 직접 움직인다고 한다.

‘아니면, 중요한 내용을 전달해야 하거나.’

현준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그는 태민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오라고 해요.”

“전달하겠습니다.”

태민은 스마트폰을 꺼내 특수 경찰국장, 송태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시간은 연결 대기까지 포함해서 1분이 걸리지 않았다.

무차별적인 통보라는 느낌이 강할 정도였다.

“20분 안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어디에서 출발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헬기를 타고 오는 것 같았다.

“도착하면 집무실에 바로 오라고 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정확히 15분 만에 태식이 헬기를 타고 비행장에 도착했다. 예정보다 조금 빨랐다.

길드장 집무실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긴장한 표정의 태식이 걸어 들어왔다.

“직접 올 줄은 몰랐습니다.”

“중요한 일이니…… 제가 직접 나서야지요.”

“앉으시죠.”

“감사합니다.”

착석을 권유하자 태민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뒤, 현준과 마주 보고 앉았다.

“여기까지 직접 온 걸 보면 성과가 있었나 보군요.”

특수 경찰국장은 결코 한가한 자리가 아니다. 꽤 괜찮은 성과가 아니라면 바쁜 몸을 이끌고 찾아올 리가 없었다.

송태식의 얼굴에서도 긴장뿐만 아니라 자신감 또한 묻어 나왔다.

“두 가지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말해보세요.”

“테러에 동원된 헌터들의 국적이 러시아로 최종 확인되었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황상 ‘알파팀’ 소속으로 보입니다.”

특수 경찰국에서는 시체에서 남은 마력을 바탕으로 조사한 결과와 정황 증거를 모아서 분석한 끝에 테러범들이 알파팀 소속일 확률이 높다고 결론을 지었고 현준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송태식은 조금 더 자세한 정보를 현준에게 알려주고 싶었지만 알파팀 구성원들에 대한 정보는 러시아에서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북한을 통해 넘어온 겁니까?”

“예. 관련 루트를 확인했고 폐쇄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제 동일한 경로로 넘어오는 건 어려울 겁니다.”

“다행이네요.”

현준은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강화된 경계는 당분간 해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블라디미르의 성격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알파팀 헌터 100명을 희생시켜서까지 ‘경고’를 전달한 걸 보면 이대로 조용히 물러날 것 같지는 않았다.

‘분명 다른 경로를 찾겠지.’

북한을 통한 길이 막혔다면 밀입국을 시도할 수도 있다. 특수 경찰국에서 봉쇄를 시도하겠지만, 러시아 알파팀은 그걸 뚫을 힘이 있었다.

“러시아는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혹시,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현준을 보며 태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현준은 그를 보며 페트렌코와 있었던 일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동안 태식이 협조적인 모습을 보였고, 러시아와의 마찰에서 앞장서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적절하게 진실을 가려 말하고 과장을 섞는 건 잊지 않았다.

‘선동의 귀재’가 잠시나마 강림하면서 남기고 간 지식을 활용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잘하셨습니다. 강현준 씨에 대한 도발은 대한민국을 향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상은 했지만, 태식은 적극적으로 현준의 행동을 지지했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그는 현준이 대한민국을 대표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현준이 러시아 알파팀에게 공격받았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이건 대한민국에 대한 공격입니다.”

‘그래. 맞아. 대한민국이 공격당한 거야.’

태식이 격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현준은 그를 보며 흐뭇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나서지 않아도 태식이 불을 지필 것 같았다. 이런 경우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불난 곳에 살살 부채질을 해주면 아주 재밌어진다.

“이건 제 선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차원에서 러시아에 공식적으로 항의해야 합니다.”

‘잘한다!’

대한민국 정부가 나서게 된다면 외교적인 문제로 발전한다. 송태식은 국회의원들과의 연결점도 있었다.

특수 경찰국장의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깊은 연결은 아니겠지만, 현준이 지원 사격을 해준다면 충분히 큰 불길로 확산될 것이다.

레이스 길드가 가파른 성장세를 보일 때부터 연결을 시도한 대한민국 고위층들이 있었다. 대부분 거절했지만, 모두를 쳐낸 것은 아니었다.

태민의 충고를 받아들여 극소수, 즉 권력의 핵심과 연결을 조금씩 유지해오는 중이었다.

특히 그들 중 일부는 이너서클의 몰락으로 권력의 중심에 더욱 가까워졌으니, 연락을 한다면 기꺼이 도와줄 것이다.

‘공짜는 아니겠지만…….’

상대는 정치인이다. 송태식처럼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심과 현준과의 친분으로 움직이는 이들이 아니다. 도움을 받게 되면 대가가 따른다.

‘하지만 이번 일에는 정치인들의 도움이 필요해.’

외교적으로 압박하려는 게 아니다.

‘뒷수습 용도.’

일단 지르고 볼 생각이었다. 필요하다면 공중항모를 타고 러시아로 날아가서 알파팀 헌터들과 정면 대결을 할 생각도 있었다.

‘전쟁은 시작됐다.’

알파팀 100여 명을 제물로 바쳐서 경고를 보낼 정도이니…… 블라디미르도 어떤 방식으로든 공작을 펼치고 있을 것이다.

무력을 사용한 물리적인 공격일 수도 있고 정치력을 소모하여 외교적인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무력 공격에 대한 대비는 충분했으니 이제는 외교전에 대비할 때였다. 그게 바로 현준이 정치인들과 본격적으로 접촉하려는 이유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상부에 보고를 해보겠습니다.”

그가 말하는 상부는 대한민국 정부를 뜻한다.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제가 태어난 국가와 척을 지는 건 원치 않으니까요.”

“그럴 일이 없도록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현준은 은연중에 태식에게 압박을 가했다. 대한민국의 정부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최악의 경우 한국이라는 나라와 적대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다행히 태식은 현준의 말뜻을 알아들은 것인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선택지는 많아.’

굳이 국가라는 이름의 족쇄에 얽매일 필요는 없었다. 현준은 필요하다면 그 족쇄를 부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먼저 버릴 생각은 없었지만, 대한민국 정부의 행동에 따라선.

‘무거운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는 거지.’

현준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국가의 호구가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제 생각을 잘 전달해줬으면 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태식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한진우가 목숨을 잃은 뒤, 강현준은 대한민국 최강의 헌터가 되었다.

빠른 시일 내에 공식적으로 SSS급 헌터의 위치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헌터이기도 했다. 현준을 잃는 것은 국가적인 큰 손실이었다.

“이만 가도 좋아요.”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자 태식은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집무실을 떠났다.

현준은 닫힌 문을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주사위는 던졌고, 이제 반응을 볼 차례다.”

창밖을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 * *

며칠 뒤, 현준은 태식이 국회의원들과 접촉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특수 경찰국장은 결코 낮은 직위가 아니었지만,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 전에는 정치인들과 왕래가 없었던 탓에 태식이 움직인 국회의원들은 수도 적고 영향력도 크지 않은 이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르지.’

현준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3선 국회의원 중에서도 영향력이 강한 파벌을 이끄는 한명석에게 연락을 보냈고 지원을 약속받았다.

신뢰로 형성된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하사신의 가호로 만든 그림자 분신을 보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블라디미르에게도 보내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림자 분신은 은밀하게 행동할 수 있는 반경이 정해져 있었다.

한명석의 파벌이 가지는 영향력은 원래 강하지 않았지만 이너서클의 몰락으로 권력 핵심층이 무너지면서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었다.

‘한명석의 진명은 탐욕스러운 위선자.’

배신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림자 분신을 보내두었으니 대비는 한 셈이다.

“길드장님. 김태민입니다.”

창가에 앉아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태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슬 국회의원들의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었으니 그 문제에 대해 보고하기 위해 찾아온 것 같았다.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문이 열리고 태민이 들어왔다.

“어때요?”

“좋지 않습니다. 러시아에서 매수한 국회의원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태민의 보고에 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세한 내용은 아직이었지만 지금 들은 걸로만 보면 의도한 대로 흘러가고 있지 않은 듯했다.

“러시아에 매수된 게 확실합니까?”

“물증은 없습니다.”

매수된 게 아닐 수도 있다.

“이 부분은 조금 더 조사를 해봐야겠는데…….”

현준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혼잣말을 흘렸다. UN 특수 기관을 활용하고 싶었지만, 이번 일은 엄밀히 말하면 혈맹과 관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위원의 권한을 사용할 수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러시아의 편을 든 국회의원 몇 명이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래요?”

“예, 여기 있습니다.”

태민이 3장의 편지를 건네주었다.

모두 조금씩은 달랐지만, 전체적으로 비슷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발견한 것인데, 편지를 세로로 읽으면.

‘살려주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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