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153화 (153/217)

# 153

45장 서리 칼날이 피에 물들다(2)

특수 경찰국이 도착해서 현장을 확보한 걸 확인한 현준은 공중항모를 타고 일행들과 함께 수원으로 돌아갔다.

안전한 길드 사무소 단지에 소진을 내려준 뒤, 현준은 레비앙과 함께 헬기를 타고 특수 경찰국 수원 지부로 향했다.

수행원으로 굳이 레비앙을 고른 이유는 끝까지 그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분간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같이 행동할 생각이었다. 현 상황에서는 자신이 부재중인 길드 사무소 단지에 레비앙을 두는 것은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질드레를 만날 때까지는 신경을 쓰는 게 좋겠지.’

레비앙은 사실 만을 말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지, 확신할 수는 없다.

질드레를 만나서 확신을 얻기 전까지는 완전히 믿지 않는 게 좋았다. 레비앙도 현준이 자신을 향한 의심을 ‘완전히’는 거두지 않았다는 걸 어느 정도 알아차렸지만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착륙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용무를 보고 오시지요.”

특수 경찰국 수원 지부의 옥상, 헬기에서 내리면서 현준이 찰나의 망설임을 보이자 레비앙이 선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미안하다.”

“걱정하지 마시길. 착륙장에서 벗어나지 않을 겁니다.”

쓸데없는 의심을 받는 건 레비앙도 원치 않는 일이었다. 현준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특수 경찰관과 함께 지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승강기에서 내리자 복도에 나와 기다리고 있는 송태식이 보였다.

그는 현준의 영향력으로 특수 경찰국장이 되는 것에 도움을 받은 뒤로 적극적으로 협력해오고 있었다.

“강현준 씨. 안으로 들어가시죠.”

태식이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100여 명의 러시아 헌터가 국내에서 이런 대담한 짓을 벌였으니, 던전 레이드 시대가 시작되면서 대한민국의 치안을 책임져 온 특수 경찰국의 수장으로서 책임이 컸다.

당장 현준이 언성을 높여도 태식은 변명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할 정도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밀실에 들어가 의자에 앉기 무섭게 현준이 말했다. 차분한 표정이었지만 목소리에서는 차가운 분노가 묻어 나왔다.

현준이 직접적으로 화난 감정을 드러낸 적이 많지 않기 때문에 태식은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강현준 씨께서 헬기를 타고 오시는 동안, 시체들을 조사해 본 결과, 테러범들은 ‘러시아인’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태식은 저자세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남자는 대한민국 최강의 헌터였으니까.

“제가 방금 테러범들의 국적을 물어봤습니까?”

분명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보고하세요.”

무려 특수 경찰국장을 아랫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그동안 너무 유하게 주변을 대하지 않았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번 일은 특수 경찰국의 책임도 명백했기 때문에 태식은 할 말이 없었다.

오히려 이런 걸로 그의 자존심이 상하면 그동안 그를 봐왔던 현준의 눈이 틀린 것이다.

“북한을 통해 휴전선을 넘은 것 같습니다. 밀입국의 가능성도 있지만 레이스 부길드장, 김태민 씨로부터 알파팀과의 마찰에 관해 전해 들은 뒤로, 단속을 몇 배로 강화했기 때문에 가능성이 낮습니다.”

태식의 말에 현준은 기억을 더듬었다. 부길드장, 김태민에게 알파팀과의 마찰 사실을 국가 기관에 전달하라는 지시를 내렸던 게 기억났다.

그 기억을 떠올리자 더 어이가 없었다. 사전에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라고?

“죄송합니다. 설마, 휴전선을 넘을 거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북한에서 협력했을 확률이 높겠네요.”

“네. 북한의 협력이 없으면 러시아 헌터들이 휴전선을 넘는 건 불가능합니다.”

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북한에서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러시아에서 어떤 제안이나 압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내민 줄이 다 썩어버린 동아줄이라는 걸 조만간에 느끼게 해줄 생각이다.

‘기억했다.’

이건 잊지 않을 것이다.

“증거를 최대한 모아두세요. 다른 쪽에서 은폐 공작을 할 수도 있으니까, 특히 신경 써서 관리하세요.”

대한민국과 미국이 여전히 동맹 관계라고는 하지만 러시아와 관련된 권력자가 없으리라고는 확신할 수 없다.

던전 레이드 시대가 찾아오고 러시아가 강력한 헌터전력으로 세계 2위의 강대국 자리를 확고히 하면서 그쪽으로 줄을 대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말도 있으니 주의해야 했다.

“예, 알겠습니다.”

태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특수 경찰국의 수장인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그와 알고 지낸 것은 아니었지만 ‘진명’과 평소 행실을 볼 때 현준이 엇나가지만 않으면 먼저 배신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지.’

그게 설령 본인의 판단이라고 해도 말이다.

“길드 사무소 단지에는 따로 경호 병력을 보내두겠습니다.”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인근 순찰만 강화해주면 될 것 같습니다.”

특수 경찰국의 병력을 지원해 주겠다는 마음은 고마웠지만, 외부 인원을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내부의 병력으로 경계를 강화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기에 현준은 태식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특수 경찰국장.”

“예. 강현준 씨, 말씀하십시오.”

“이번 일은 확실히 조사해야 할 겁니다. 러시아 헌터들이 어디를 통해 한국으로 숨어들어 왔는지 파악하고 봉쇄하세요.”

일상이 무너지는 건 막아야 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태식이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현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태식이 서둘러 밀실의 문을 열어주었고 두 사람은 이내 복도로 나왔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번 일은 특수 경찰국장이 잘 처리해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입니다. 강현준 씨를 습격했다는 건 대한민국을 공격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특수 경찰국은 전력을 다해서 이 일을 해결할 것입니다.”

“믿고 맡기겠습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었다.

현준이 특수 경찰국장으로 밀어줄 때부터 아군의 대열에 합류한 송태식이 확실하게 처리한다고 했으니, 특수 경찰국은 이번 일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수 경찰국이 적극적으로 나온다고는 해도 국회의원들이 개입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준은 그것조차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돈을 받아먹은 국회의원들이 개입한다고 해도 조금 귀찮아질 뿐 결국에는 현준이 원하는 대로 흘러갈 것이다.

‘그래, 결국에는 내 뜻대로 되겠지.’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도착했습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승강기의 문이 열렸고 동행한 태식이 도착을 알렸다.

그제야 현준은 정신을 수습하고 헬기 착륙장으로 올라갔다.

“오셨군요.”

레비앙이 말했다. 그는 약속한 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헬기 바로 옆에 서서 현준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현준은 헬기 앞으로 다가가며 시계를 확인했다.

별 이야기 안 한 것 같았지만 2시간 넘게 레비앙을 밖에 세워둔 것이었다. 현준은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계속 여기 있었던 거야?”

“저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서요. 괜한 의심을 받는 것도 원치 않았고요.”

“지루했을 텐데…….”

“술식을 사용하여 이 세계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전문가 수준은 아니지만,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상식을 정리했습니다.”

2시간 만에 방대한 양의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했다고? 레비앙의 전투력은 SS급 정도였지만 마도학자로서의 능력은 짐작했던 것보다 더 우수한 것 같았다.

“대단하네…….”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레비앙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기분 나쁜 자만이 아닌 순수한 자부심이 목소리에서 묻어 나왔다.

“일단 돌아가지.”

“예, 알겠습니다.”

현준은 레비앙과 함께 헬기에 올랐다.

“강현준 씨! 맡기신 일은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프로펠러가 요란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태식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현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헬기가 이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레이스 길드 비행장에 헬기가 착륙했다. 대기하고 있던 친위대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황제 폐하! 공격을 당하셨다고 보고 받았습니다!”

“괜찮으신 겁니까?”

친위대장, 사혈과 그의 부관, 사혁이 현준의 안위를 살폈다.

“난 괜찮다. 길드 사무소 단지는? 이상 없는 거지?”

“실은 그 문제로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현준의 물음에 대답한 이는 사혁이었다.

“보고해.”

현준이 말했다. 사혁은 대답 대신 레비앙 쪽으로 슬쩍 시선을 보냈다. 아무래도 그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레비앙은 분위기를 읽고 물러나려고 했지만, 현준이 먼저 고개를 저으며 그를 멈춰 세웠다.

“레비앙은 믿을 수 있으니까 보고해.”

어느 정도는 레비앙을 신뢰하고 있었다. 질드레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조건적인 믿음을 보내지 않을 뿐이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정보였다면 사혁이 먼저 밀실을 언급했을 것이다.

“무장 경비대가 길드 사무소 단지 외곽을 순찰 중에 수상한 차량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고를 받고 친위대를 보냈는데, 이미 사라진 뒤였습니다.”

사혁의 보고에 현준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이것 또한 경고일 확률이 높았다.

러시아 알파팀이라면 무장 경비대 소속의 낮은 등급 헌터에게 들킬 리가 없었다.

대놓고 존재를 드러낸 걸 보면 마치 ‘지켜보고 있다’고 직접적으로 경고하는 것 같았다.

“경계를 강화해. 수상한 점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

“언제나 친위대가 폐하의 곁을 지킬 것입니다.”

“저택에도 친위대원을 더 배치해.”

“예. 황제 폐하.”

현준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사혁이 먼저 물러났다. 이윽고, 현준의 시선은 레비앙에게 향했다.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도 괜찮아.”

이 세계의 상식을 마법 술식으로 익혔다고는 하지만, 당장 지낼 곳을 마련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됩니까?”

“비어 있는 숙소를 쓰면 돼.”

질드레를 만나기 전까지는 감시역으로 플레임과 사혈을 붙여둘 생각이었다.

레비앙이 마음만 먹으면 둘을 속일 수는 있겠지만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해두는 게 마음이 편했다.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레비앙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숙소는 사혈이 안내해 줄 거야.”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레비앙은 앞서가는 사혈을 뒤따랐고 이내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현준은 저택으로 돌아갔다.

정원에 들어서자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소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현준이 보기에는 심리적으로 불안해 보였다.

“누나…….”

“현준이 왔어?”

“괜찮아요?”

“응, 난 괜찮아.”

혹여, 무의식중에 불안함을 드러냈나 싶은 마음에 소진은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속마음을 감췄다.

그런 모습이 안타까웠기 때문에 현준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말없이 그녀를 안아주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응…… 고마워…….”

그 누구도, 이 소중한 일상을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선을 넘는다면? 그들에게 기꺼이 파멸을 선고할 자신이 있었다.

현준은 소진을 안심시키는 데 30분 정도를 쓰고 침실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잠에 빠져들어 다시 눈을 뜬 곳은 ‘전생의 홀’이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진리에 닿은 미치광이.]

질드레의 이명이 각인된 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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