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44장 차원 표류자(2)
푸욱!
날카로운 얼음의 칼날이 펠리아크의 심장을 꿰뚫었다. 동시에 차가운 냉기는 심장뿐만 아니라 체내의 모든 장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는 SS급 중견의 실력자였지만 SSS급 중견 헌터, 블라디미르의 기습은 차분하면서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이었다.
“크, 크아아…….”
펠리아크는 입을 열고 고통에 찬 비명을 흘렸다. 내장이 모조리 얼어붙은 탓에 피가 쏟아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SS급이라는 건가? 내장이 다 얼었는데 숨이 붙어 있군.”
블라디미르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마력을 일으키자 펠리아크의 몸을 관통한 얼음의 칼날에서 더욱 강력한 냉기가 흘러나와 그를 완전히 얼려 버렸다.
“흥. 싱거운 놈.”
차갑게 내뱉으며 펠리아크의 시체에서 몸을 돌린 순간.
“큭?”
가슴에서부터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다. 당장에라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마력을 운용하여 몸 상태를 살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력로의 손상, 즉 내상을 입었다는 걸 알아냈다.
‘내상이라고? 이런 말도 안 되는…….’
블라디미르는 분한 마음에 피가 새어 나올 정도로 강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원래 강화 술식의 각인 중에 강제로 중단한다고 해서 내상을 입는 건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큭…… 수작을 부렸나?”
수작을 부릴지도 모른다는 것 또한 예상했다. 마력로에 손상을 입히는 수작을 부리면 사전에 낌새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과신이었고 결국에는 이렇게 되고 말았다.
“이제야 알아챘나?”
“겨우 이 정도 잠복 술식도 간파하지 못한 것이냐?”
“이곳의 수준도 알 만하군.”
어둠 속에서 검은 제복은 입은 인베이더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블라디미르는 마른침을 삼키며 주위를 살폈다.
‘SSS급 수준도 있다. 대체 이 뭐냔 말이다…….’
인간과 비슷한 외관을 한 이들도 있었고, 전혀 다른 형체를 한 이들도 있었다.
그 수가 10명에 달했는데, 모두가 최소 SS급 이상의 마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내상을 입어서 전력을 다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적들의 수준은 높았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지상에서 기다리고 있는 알파팀 헌터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다들 S급 최하위 이상의 실력자들이라서 합류하면 분명 도움은 되겠지만, 응답이 없었다.
“얌전히 항복하고 침략사령부의 뜻을 받아들여라.”
“꺼져라.”
“결국, 고통받는 걸 선택했나? 유감이군.”
인베이더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차가운 냉기를 사방에 흩뿌렸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현준의 지인들이 레이스 길드 비행장에 모였다. 강원도로 휴가를 떠나기 위함이었다.
한창 수다를 떨고 있다 보니 현준과 소진, 그리고 플레임이 검은 세단을 타고 나타났다.
플레임은 원래 정찰 임무를 맡을 예정이었지만 갑작스럽게 취소가 되면서 이번 휴가에 동행하게 되었다.
소진과 현준이 같은 차량에서 내리는 모습을 본 진아는 복잡한 감정이 묻어 나오는 표정으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하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들 반갑습니다. 별일 없었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현준이 한 명씩 인사를 나눴다.
“형님. 그동안 연락이 없어서 섭섭했습니다.”
“남미는 여유가 없더군요. 자주 연락할게요.”
“하하하! 영광입니다!”
한석과의 안부 인사가 끝나자 진아가 잽싸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나도 악수요.”
“하하하…… 네…….”
이상할 정도의 어색한 기류 속에서 악수가 끝났다. 진아는 뭔가 이뤄냈다는 듯한 희미한 미소를 남긴 채 뒤로 물러났다.
규환이나 태희와는 따로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규환은 그저 말없이 수행원으로 따라 붙었고 태희는 ‘이런 형식적인 인사는 필요 없어’라고 말하며 앞서 걸어갔다.
어떤 면에서는 그녀답다고 말할 수 있었다.
“누나. 우리도 올라가요.”
“응.”
현준의 말에 소진은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둘이서만 떠나는 휴가는 아니었지만 함께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이 두근거림이 혹시 들릴까 싶은 걱정에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앞서가는 현준의 뒤를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소진의 입가에는 선명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함교에 들어섰다. 먼저 도착해서 시설을 점검하고 있던 규환이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점검은 끝났습니다. 공중항모는 바로 이륙할 수 있습니다. 승무원들도 준비가 끝났습니다.”
전투 목적의 이동은 아니었기 때문에 탑승한 승무원들은 10명 정도에 불과한 최소 인원이었다.
애초에 현준 혼자서도 공중항모의 운용이 가능했지만, 마력과 정신력을 과하게 소모하기 때문에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승무원을 탑승시키는 게 좋았다.
“바로 이륙하겠습니다.”
“전달하겠습니다.”
현준은 통제단에서 서서 마력을 끌어 올렸다. 눈앞에 각종 마법 술식들이 펼쳐지고 공중항모의 동력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수원 상공으로 이륙한 공중항모는 강원도를 향한 비행을 시작했다.
비행시간은 길지 않았다. 강원도 상공에 진입한 공중항모는 속도를 줄였고 탑승한 사람들은 소형 착륙정을 사용하여 진아의 별장 근처에 있는 공터에 착륙했다.
원래는 펜션을 예약할 예정이었지만 진아가 자신의 별장을 사용해도 좋다고 해서 계획이 변경되었다.
“와! 공기 좋다!”
별장은 산속에 있었다. 가장 먼저 착륙정에서 내린 한석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탄성을 내질렀다.
그 모습을 본 플레임이 고개를 저으며 두 번째로 착륙정에서 내렸다.
“인간이란…… 어쩔 수 없군요.”
중2병스러운 대사에 현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놈의 중2병은 불치병인지 시간이 지나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플레임.”
“예. 형님.”
현준의 부름에 플레임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다가왔다.
“그 병 좀 고쳐라.”
“선천적인 불치병입니다. 형님.”
“그래도 최대한 자제해 줘. 내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사라질 것 같으니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플레임은 고치겠다고 말했지만, 이것도 길어봤자 하루라는 걸 현준은 알고 있었다.
“들어가자.”
별장은 컸다. 3층 높이였고 마당도 넓었다. 소진은 마당을 살피며 두 눈을 반짝였다.
“여기서 고기 구워 먹으면 되겠다.”
“괜찮을 것 같네요.”
현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식재료를 종류별로 준비했는데, 그중에는 소진이 원하는 고기도 있을 것이다.
‘사실 장을 본 건 내가 아니지만.’
식재료 조달은 규환이 맡아서 했다.
“바비큐 해서 먹을까요?”
“너무 좋아.”
너랑 함께라면 뭐든 좋다고 말할 뻔했다. 소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을 붉혔다. 짐이 생각보다 많아서 정리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바비큐 준비를 시작했을 때는 이미 저녁 시간이었다. 산속이라서 그런지 해가 빨리 저물었다.
“준비 다 끝났어! 다들 모여!”
태희의 목소리가 별장에 울려 퍼졌다. 지금까지는 몰랐었는데 그녀에게는 요리 자격증이 몇 개 있었다.
그래서 바비큐 준비를 지휘하게 되었고 규환과 소진이 옆에서 거들었다.
“다들 모이라고!”
두 번째 외침. 마당으로 전원이 모였다.
“굽는 것도 내가 해야 해?”
“제가 구울게요.”
태희의 짧은 불평에 현준이 집게와 가위를 집어 들고 불 앞으로 갔다.
“소고기부터 구울게요.”
집게를 움직여 소고기를 집어 든 순간.
-주인! 마력 반응이다!
지옥참마도가 경고했다. 그리고 뒤이어.
“형님! 서쪽에서 마력 반응입니다!”
“나도 알아!”
플레임도 경고했다. 고기를 굽다 말고 갑작스럽게 지옥참마도를 뽑아 드는 현준의 모습에 태희는 미친놈을 보는 듯한 시선을 보냈지만, 그녀 또한 강대한 마력의 기척을 느끼고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자신의 대검을 꺼내 들었다.
소진 또한 소검을 꺼내 들었다. S급 헌터들이 2번째로 마력 기척을 감지했고 마지막으로 규환과 한석이 심상치 않은 마력의 흐름을 확인했다.
“뭔가 일어나고 있어.”
S급 헌터인 태희를 얼음처럼 굳게 만들 정도의 마력 파동이다. 플레임이 말한 대로 서쪽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았는데, 아직은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마력이라면 긴장해야 할 만한 일이 발생했다는 것 정도는 확실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함교는 지금 당장 응답하세요.”
-함교입니다.
“현 지점에서 서쪽 방향, 마력 반응 감지했습니까?”
-확인했습니다. 지금 공중항모의 술식 보조를 받아서 정말 탐색 중에 있습니다.
시간이 꽤 걸린다. 마음 같아서는 플레임을 정찰 보내고 싶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실치 않은 지금 상황에서는 전투원들이 모여 있는 게 좋았다.
-상황 확인 완료. 현 지점에서 서쪽으로 500m 지점에 차원 균열이 확인되었습니다.
“레이드 게이트에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레이드 게이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교전 준비하세요. 공중항모는 전력을 다해 현 지점을 방어합니다.”
-확인했습니다. 전투태세를 갖추고 현 위치를 사수합니다.
통신이 끝났다. 현준은 무전기를 집어넣고 플레임에게 다가갔다.
“아무래도 레이드 게이트가 열릴 것 같다.”
“차원 마력이 조금 느껴지는 것 같았는데…… 역시 예상대로군요.”
“나는 게이트를 파괴하러 갈 거니까, 여기를 부탁한다.”
마수들이 여기저기 산불처럼 퍼져 나가는 걸 막기 위해서는 레이드 게이트를 조기에 파괴해야만 했다.
공중항모와 SS급의 실력자인 플레임이라면 누군가 별장을 공격하더라도 현준이 도착할 때까지 버텨줄 수 있을 것이다.
“현준아. 조심히 다녀와.”
갑작스럽게 발생한 상황이었지만 소진은 차분한 목소리로 현준을 응원했다. 마음 같아서는 같이 있어 달라고 말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런 건 현준의 발목만 잡는다는 걸 잘 알았기에 내색하지 않았다.
“다녀올게요.”
현준이 땅을 박차고 하늘로 솟구쳤다. 산의 지형이 험하다고는 하지만 500m 정도의 거리는 SS급 헌터지만 SSS급 수준의 무력을 지니고 있는 현준에게는 순식간에 돌파 가능한 거리였다.
일순간에 음속을 돌파하여 마력 파동의 근원지에 닿았다. 공중항모의 마법계 헌터가 보고한 대로 균열이 조금씩 갈라지면서 다량의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인. 이 정도면 SSS급 이상이다.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
“나도 알아.”
SSS급 마력 반응. 어떤 괴물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현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는 침착하게 지옥참마도를 들어 올려 검술 자세를 취했다. 시든밀러에게 배운 고유 검술을 사용하기 가장 적합한 자세였다.
‘고유 검술을 시험할 좋은 기회다.’
언제나 그렇듯, 패배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가운데, 균열이 완전히 열리면서 거대한 암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뭔가’가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