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44장 차원 표류자(1)
날카로운 칼날이 갈비뼈를 꿰뚫고 들어와 심장에 꽂혔다. 익숙해지기 싫은 소름 끼치는 강철의 감촉에 입 밖으로 고통에 찬 신음이 터져 나왔다.
“커, 커헉!”
이제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결코 의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날카로운 오러를 흩뿌려서 시든밀러의 2번째 공격을 저지했다.
오러 파편 때문에 시든밀러도 현준의 몸에서 검을 뽑아내고는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거리가 벌려졌다. 현준이 검을 회수하며 흐트러진 자세를 가다듬었다.
흉부의 관통상은 전생의 방이 가지는 회복의 가호에 의해 완전히 아물었다.
“제법이군.”
시든밀러는 감탄했다. 현준에게 맞춰 스스로에게 제약을 걸었다는 하지만 검술 수준과 센스는 그대로였다.
솔직히 일격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방금 전에 현준은 무려 3번의 공격을 방어해냈을 뿐만 아니라, 공격을 당하고도 연격을 저지하기 위해 반격을 가하기도 했다.
대련이 시작되고 현준은 시든밀러의 공격으로 100번 이상 쓰러졌지만 대부분 2번째 공격까지 무난하게 방어하거나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곳에 올 때마다 나를 놀라게 만드는군.”
현준의 무서운 성장 속도에 온 몸이 전율할 정도였다.
“좋은 스승님들을 둔 덕분이죠.”
“과분한 칭찬이야.”
현준의 말에 시든밀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죠?”
“짧지는 않지만 굳이 알고 싶나?”
시든밀러가 물었다. 현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생각해보니까, 꼭 알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아요.”
“좋은 자세다. 어차피 이곳에 있는 이상, 외부의 시간은 멈춰 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냐는 질문은 큰 의미가 없어.”
확답은 없었다. 심지어 ‘짧지 않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꽤 긴 시간이 흘렀다는 걸 알아챘다.
시든밀러와의 동조율 1차 해방으로 인해 새롭게 흘러들어 온 지식으로 봤을 때 아득하게만 느껴졌던 ‘고유 검술’에 이 정도로 익숙해진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충분히 쉬었으면 다시 대련을 시작하겠다.”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들어 올리자 시야에서 시든밀러의 모습이 사라졌다.
대련이 시작되고 수백 번은 넘게 봤던 접근 기술이었지만 쉽게 움직임을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변칙적이고 빨랐다.
호흡을 가다듬는 것과 동시에 검을 휘둘러 사방에 오러를 흩뿌렸다. 상대방의 기척을 읽지 못했을 때 접근을 차단하기 쉬운 기본기 중의 하나.
효과는 있었던 것인지 전후좌우에서 시든밀러의 공격은 없었다. 대신 머리 위에서 갑작스럽게 기척이 느껴졌다.
“큭!”
간신히 검을 들어 올려 시든밀러의 검격을 받아냈지만 2번째는 막아내지 못했다.
날카로운 오러 블레이드가 목을 깊이 베었다. 과다출혈로 일순간에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가면서 쓰러졌다.
“일어서라.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대련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또 몇 번이나 칼에 찔리고 베였을까?
마침내 고유 검술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될 때 즈음 시든밀러가 흡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꽤 익숙해진 것 같군.”
“조금은요.”
“이 정도면 상당히 빠른 속도다. 내 ‘고유 검술’은 결코 쉽게 볼 만한 게 아니다. 나는 이 검술 하나로 차원을 제패했다.”
시든밀러의 말에 현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부터 네게 ‘폭풍검’을 전수해주겠다는 말이지.”
* * *
“허억!”
깨어나 보니 아침이었다. 창가로는 따스한 햇살이 스며 들어왔다. 전생의 방에서 장시간 수련을 하면 느끼게 되는 특유의 정신적인 피로를 간신히 떨쳐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피곤했다. 분명 조금 전에 침대에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잠을 전혀 잔 것 같지 않은 기분이었다.
정신적인 피로가 거의 회복되지 않았다. ‘전생의 방’에서 쉬지 않고 수련을 했으니 당연한 결과이기는 했다.
-또 그 꿈을 꾼 것인가?
샤워를 끝내고 옷을 갈아입는 현준을 보며 지옥참마도가 물었다. 현준은 그에게 전생의 방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
현준은 짧은 대답과 함께 지옥참마도를 허리에 찼다. 지옥참마도가 아공간을 싫어하기 때문에 집어넣고 다니는 다른 장비들과 달리 조금 불편하더라도 허리에 차고 다녔다.
친위대원이 운전하는 차량을 타고 본관 건물의 길드장 집무실로 출근했다.
길드장 집무실 앞에는 비서실장의 자리가 있었는데, 꽤 이른 시간임에도 소진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피곤했는지 책상에 엎드려 뻗어 있었지만 어쨌든 자리는 지키고 있는 것이다.
“헤헤…….”
좋은 꿈이라도 꾸는 것인지 행복한 표정이었다.
“언제 출근한 거야?”
현준은 복도를 지키고 있는 친위대원에게 물었다.
“밤새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그래? 고마워.”
일이 많이 밀려 있었던 모양.
‘깨울까……?’
저택에 가서 자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 하고 잠깐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달콤한 꿈을 꾸는 걸 굳이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어떤 업무를 보고 있었나 싶은 마음에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강원도 펜션?’
굳이 검색 기록을 볼 필요도 없었다. 강원도의 숙박 업체 홈페이지가 바로 보였으니까.
‘하긴, 저번에 바다에 간 걸 제외하면 제대로 쉬지도 못했지.’
놀이공원에 간 적이 있긴 하지만 플레임의 등장으로 제대로 놀지 못했으니 예외.
‘나중에 말이라도 꺼내 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현준은 길드장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전 업무를 끝내고 잠시 지하의 수련장까지 내려가 고유 검술을 연습하고 돌아오니 소진이 깨어 있었다.
“누나. 잠깐 시간 괜찮아요?”
“응. 시간 괜찮아. 나도 막 쉬고 있었어.”
소진이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따라 들어왔다. 현준은 그녀와 마주 보고 앉았다.
“그동안 많이 바빴죠?”
“아냐, 나는 괜찮아.”
괜찮다고 말하지만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진하고 얼굴에서도 피곤함이 묻어 나왔다.
‘누나는 옛날부터 이랬지.’
힘든 일이 있어도 남에게 민폐가 될까 봐 그 사실을 숨긴다. 그게 소진이었다. 홀로 묵묵히 견디다 지쳐 쓰러지는, 그런 사람이다.
“우리 며칠만 쉬어요.”
러시아와 긴장 상태고 혈맹을 토벌해야 할 목적이 있지만 남미 대륙에 연합 토벌대가 다시 진입하고 출입 허가가 나올 때까지 현준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기껏해야 UN 특수 기관에게 정찰 명령을 내리는 게 고작이었다. 당분간은 느긋하게 보낼 수밖에 없으니, 이왕 이렇게 된 거 휴가라도 다녀오는 게 어떨까 싶은 마음이었다.
“다 같이 여행 가서 며칠만 놀다 오죠. 해외는 지금 힘들고, 강원도가 좋을 것 같네요.”
“다 같이?”
“네, 다 같이 가죠.”
“나도 좋아. 헤헤.”
소진이 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마음 같아서는 둘이서만 가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현준에게 부담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조용히 마음속에 묻어 두기로 했다.
‘그래도 옆에 있을 수 있으니까…….’
‘다 같이’라는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소진의 미소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라고 해서 질투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저 이렇게라도 함께할 수 있다는 게 기뻤다.
“그럼 바로 일정을 잡죠.”
여행 계획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일정이 잡히기 무섭게 현준은 가까운 주변인들에게 연락을 해서 올 수 있는 사람들을 추려냈다.
그 결과, 한석과 진아, 규환, 그리고 태희가 동행하게 되었다. 태민도 함께하고 싶어 했지만 아쉽게도 밀려 있는 길드 업무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레이스 길드 비행장에 모여서 공중항모를 타고 강원도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펜션 주위에 공중항모가 착륙할 곳은 없겠지만, 상공에서 소형 착륙정을 이용하면 그 문제는 해결된다.
그렇게 3월 중순의 여행 계획이 잡혔다.
* * *
남미 대륙에서 연합 토벌대의 철수가 시작되었지만, 블라디미르와 소수의 알파팀은 브라질에 남았다. 오히려 필드 깊숙한 곳까지 비밀리에 진입했다.
연합 토벌대가 철수하는 상황에서 위험한 필드 깊은 곳까지 들어가는 건 의문을 품기에 충분한 상황이었지만 블라디미르를 따르는 알파팀의 헌터들은 그 어떤 질문도 없었다.
필드의 마수들이 격렬한 반항을 할 것이라 생각하고 중무장한 헌터들이 앞장섰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들의 앞을 막는 마수 무리는 없었다.
“여긴가……?”
아마존 깊숙한 곳에 있는 오래된 유적에 도착했다. 블라디미르는 마력을 일으켜 주변을 탐색했다.
혈맹 남미 관구의 수석 집행관 펠리아크가 말한 장소가 분명했다.
“너흰 여기서 기다려라.”
“예. 사령관님.”
동행한 알파팀 헌터 10여 명이 뒤로 물러났다. 블라디미르는 유적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하로 향하는 통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통로의 어둠 너머로 희미한 마력이 새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마법 술식으로 교묘하게 숨기고 있는 것 같았지만, SSS급 헌터인 블라디미르의 감각을 속일 수는 없었다.
“여기군.”
강한 확신이 들었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돌이킬 수 없다.’
블라디미르는 펠리아크의 달콤한 제안을 떠올렸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그는 곧 심호흡을 마친 뒤, 통로를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 어둠을 따라 말없이 30분 정도를 걷자 거대한 공동이 나타났다.
“환영합니다. 블라디미르.”
어둠 속에서 펠리아크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공동의 벽을 따라 설치된 마법등이 희미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오신 걸 보니 결정을 내린 모양이군요.”
“그래. 강화 술식을 받으러 왔다.”
펠리아크의 물음에 블라디미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술식 각인은 저희 쪽에서 진행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계시지요?”
“물론이다.”
강화 술식을 각인할 때는 본인이 하거나 믿을 수 있는 이가 해주는 게 일반적이다.
펠리아크러첨 신뢰 관계가 아닌 이에게 받는 건 위험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는 펠리아크가 허튼짓을 하면 바로 알아차릴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기껏해야 SS급 중견 정도로 보이는 놈이 각인 과정에서 내 감각을 속일 수는 없지.’
과신에 가까웠다. 위험한 생각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평소였다면 블라디미르를 말렸을 페트렌코가 더 이상 곁에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결정을 내리셨으니, 시간 아깝게 질질 끌 필요는 없겠군요. 곧바로 술식 각인을 시작하겠습니다.”
펠리아크가 다가왔다.
“손등에 술식을 각인하겠습니다.”
블라디미르는 말없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각인이 시작되었고 블라디미르는 강력한 마력이 자신의 몸에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더 강한 힘을 내게! 미국조차 내게 무릎 꿇릴 수 있는 그런 힘을!’
그의 눈동자가 탐욕으로 물들었다.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이건…… 침식?’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교묘하게 마력을 숨겨서 감지가 늦었다.
‘이건…….’
펠리아크가 다른 마음을 먹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