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43장 남미 철수(2)
소진은 비행장에서 꽤 오래 현준을 기다렸던 것인지 저택에 도착해서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가 현준의 권유로 4층에 있는 자신의 침실로 가서 잠을 청했다.
소진이 돌아가고 난 직후, 현준은 친위대의 사혈과 사혁을 불렀다.
친위대장을 맡고 있는 사혈과 그의 부관을 맡고 있는 사혁은 새벽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현준의 부름에 즉시 응했다.
212번 실험체로 불렸던 사혁은 2차로 합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친위대 술식의 영향인지 사혈과 마찬가지로 충성심이 높았다.
“내가 없는 동안 길드에 문제 될 만한 일은 없었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친위대는 내부 감찰의 임무도 맡고 있었다.
현준은 남미로 출발하기 전에 소진 등의 경호 외에 내부 감찰에도 특히 신경 쓰라고 지시를 했었다.
길드원이라고 해서 무조건 신뢰할 수는 없기 때문에 기본적인 감시망은 갖춰 두는 게 좋았다.
특히 최근에 길드 규모를 크게 확장하면서 불순한 의도로 접근한 이들이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 방심할 수는 없었다.
술식으로 충성심이 보장된 친위대는 믿을 수 있는 부하들이었기 때문에 감시 역할을 맡기에 적합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친위대장, 사혈이 보고했다. 현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 한국에 있겠지만, 혹시 이상한 낌새 같은 게 있으면 바로 보고해.”
내부 감찰은 계속되어야만 했다. 태민이나 규환 등의 중요 간부진은 믿을 수 있지만, 신입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현시점에서 모든 길드원을 신뢰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예, 알겠습니다.”
“좋아, 위치로 복귀해.”
사혈과 사혁이 각자의 위치로 복귀하는 것을 확인한 현준은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새 새벽 5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그는 스미스 요원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마침 근무 중이던 스미스가 호출에 응했다.
“제가 남미에 있는 동안 대한민국에서의 혈맹 활동이 포착된 게 있습니까?”
“없습니다. 현재 혈맹 남한 교구는 전멸 상태인 걸로 확인되었습니다.”
이너서클의 전멸 이후로도 소수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현준이 수집한 정보들을 바탕으로 UN 특수 기관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면서 대부분 토벌되었다.
“수고했어요.”
“그럼, 저는 이만.”
스미스도 돌아가고 서재에 홀로 남은 현준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선봉지휘부를 파괴했다. 길드에도 문제가 없고 한국 안의 혈맹도 전멸한 상태. 하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남미에 필드가 남아 있어서 그런가……? 그것도 아니면…….’
인베이더 카르센이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 때문일 수도 있다.
“선봉지휘부는 이미 목적을 달성했다고 말했었지.”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인베이더들의 선봉지휘부가 가지는 목적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혈맹과 인베이더들을 처리하면서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짐작할 수는 있다.
‘다른 인베이더들의 소환인가……?’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카르센은 분명히 선봉지휘부는 목적을 달성했다고 했으니 그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다른 인베이더들이 지구로 넘어왔다고 볼 수 있다.
‘몇 명이나 넘어온 거야?’
숫자나 전력 같은 것들을 알고 싶지만 당장은 알 길이 없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UN 특수 기관 소속의 정찰조사국을 움직여 남미를 주시하는 것밖에 없다. 심지어 그것조차도 완벽한 방법이 아니다.
필드에서의 정찰 활동은 UN 특수 기관이라고 해도 한계가 분명했다.
‘상황이 좋지는 않네.’
현준은 공식적으로 드러나 있는 위치였지만 인베이더들은 남미 대륙과 마수들이라는 어둠 속에 숨어 있다.
‘길드 사무소 단지와 저택의 보안을 강화해야 해.’
인베이더들이 언제 공격해올지 몰랐다. 실제로 얼마 전에 인베이더 알자스가 병력을 이끌고 길드 사무소 단지를 공격한 적도 있었다.
2차, 3차 공격이 언제 발생할지 모른다.
뒤늦게 모습을 감추고 행동했어야 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인베이더들과 혈맹의 탐색 능력이라면 정보가 드러날 확률이 높았다. 차라리 주변이 노출되더라도 공격적으로 성장해서 기반을 확보해두는 게 좋았다.
“무장 경비대도 점검을 해봐야겠네.”
무심결에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원래는 긴 비행에 지쳐서 짧더라도 잠을 잘 계획이었지만 길드 소속 무장 경비대를 점검하고 늦은 오후에 일찍 잠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생각을 끝마친 현준은 지옥참마도를 허리에 차고 저택을 나와 본관 건물로 향했다. 종서가 수행을 맡았다.
“길드장님. 비행시간이 길었는데, 휴식을 취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종서가 조심스럽게 걱정을 표했다. 공중항모가 비행 중에는 현준이 늘 함교를 지키고 있다는 걸 종서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휴식을 권했지만.
“점검만 하고 쉬려고요.”
현준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종서도 더 이상 권유하지 않고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윽고 본관 건물에 도착한 현준은 집무실로 올라갔고 종서는 길드 소속의 무장 경비대장을 호출했다.
마침 출근 중이던 경비대장 최석진은 곧장 본관 건물로 운전대를 돌렸다.
본관 건물이 있는 중앙 구역은 보안이 가장 엄중한 곳이다. 진입하기 무섭게 서슬 퍼런 눈빛으로 순찰하는 친위대와 집행부 헌터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런 아침에 길드장 호출? 무슨 일이지?’
인베이더 알자스의 공격 이후, 경비대장으로 새롭게 뽑힌 석진이었다.
그는 길드장, 강현준을 멀리서나마 서너 번 본 게 전부였고 호출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긴장감을 좀처럼 지우지 못한 채 차를 몰았다.
본관 건물 옆에 붙어 있는 공간에 주차를 끝내고 석진은 승강기를 타고 길드장 집무실이 있는 10층으로 올라갔다.
“이쪽으로.”
승강기 문이 열리기 무섭게 붉은 제복을 입은 창백한 피부의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석진은 눈앞의 남자가 친위대장을 맡고 있는 S급 헌터, 사혈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길드장 집무실 바로 앞에 도착했다.
“들어가면 됩니다.”
사혈이 말했다. 석진은 긴장한 표정으로 노크와 함께 문을 열었다. 창가에서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현준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최근 보안에 문제는 없죠?”
“예. 이상 없습니다.”
“무장 경비대의 장비 상태는 어때요?”
“최상입니다.”
석진의 대답에 현준은 턱을 긁적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장비 상태가 최상이라고? 그러면 전력을 더 강화할 방법이 없다는 건가?
현 길드 티어에서는 최대 500명의 무장 경비대를 편성할 수 있다.
B급 이상의 헌터들은 무장 경비로 편성할 수 없다고 법으로 제한하기 때문에 집행부처럼 무조건 등급이 높은 헌터들로만 구성할 수는 없다.
잠깐, 등급이라고? B급 이상은 불가능하지만, 그 이하라면 가능하다는 거잖아? 순간 현준의 눈동자가 빛났다.
“지금 길드 무장 경비대는 전원 헌터로 구성되어 있죠?”
“예. 그렇습니다.”
석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보통 무장 경비대는 다수의 일반인이나 그들보다 신체 능력이 조금 더 우월한 F급 혹은 E급의 헌터들로 구성되어 있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현준은 돈을 쏟아부어서 소속 무장 경비대를 전원 헌터로 편성했다.
“편성 당시 급하게 진행하느라, F급이나 E급이 대부분이지만 전원 헌터로 구성된 것은 맞습니다.”
“F급이나 E급이 대부분이라고는 해도 일반인들보다는 신체 조건이 좋으니까 전력은 더 뛰어나겠네요.”
“네. 일반인이 많이 편성되어 있는 타 길드의 무장 경비대보다 전투력이 우수하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석진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지만, 현준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앞으로 다가올 위험에 대비하려면 타 길드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무장 경비대 전력이 필요했다.
“무장 경비대 전원을 D급 이상의 헌터들로 구성할 수 있을까요?”
마음 같아서는 전원 C급 헌터들로 채우고 싶었지만 그건 힘들었다. 일반적인 C급 헌터들은 무장 경비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던전 공략을 선호하기 때문이었다.
“C급 헌터는 무리지만, D급 헌터들이라면 제가 어떻게든 믿을 만한 사람들로 채워 넣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돈이 문제인가요?”
말끝을 조심스럽게 흐리는 석진을 보며 현준이 물었다.
“예. 아무래도 비용이 많이 들 겁니다. D급 헌터는 무장 경비계에서도 고급 인력에 속해서요.”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최대한 빨리 믿을 수 있는 D급 이상 헌터들로 무장 경비대를 재편성하세요.”
이번에 남미 대륙에서 특약 외에도 일반 마정석을 일부 정산받으면서 자금 사정은 더욱 좋아졌다. 돈은 충분하다는 말이다.
“자금 지원만 충분하다면…….”
“자금은 충분히 지원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면 이주 안에 처리하겠습니다.”
석진의 대답에 현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돈을 물처럼 쓰셨습니다. 황금률의 대상인이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무장 경비대와 관련된 일을 처리하고 저택으로 돌아온 현준은 침대에 몸을 내던졌다.
-크큭. 영면에 빠져드는 것인가?
“이상한 말 하지 마라.”
지옥참마도의 말에 차갑게 대꾸하며 눈을 감았다. 긴 비행에 이어서 쉬지 않고 일정을 소화해서 그런지 의식은 순식간에 방전되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생의 홀’이었다.
“최후의 검성…….”
현준은 문에 각인된 ‘이명’을 소리내어 읽으며 문고리에 손을 가져갔다. 이윽고 호흡을 정리하는 것과 동시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선명한 조명 아래, 넓은 홀이 모습을 드러냈다.
“왔나?”
냉소적인 목소리와 함께 은색의 흉갑을 입은 시든밀러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내 기록을 찾았더군.”
“네. 그런데, 암호로 적혀 있어서 대부분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상관없다. 어차피 별 도움 안 되는 옛날이야기밖에 없었을 거다.”
현준의 말에 시든밀러는 쿨하게 대답했다.
“읽는 건 힘들겠지만, 보관이라도 잘 해줬으면 좋겠군.”
그래도 자신과 관련된 기록이라서 그런지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 현준은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써 줘서 고맙군.”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현준의 대답에 시든밀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쪽으로 와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시든밀러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현준은 뒤따라 움직이면서 입을 열었다.
“고유 검술을 전수해주시는 겁니까?”
“이미 전수는 끝났다. 이제 남은 건 고유 검술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도록 수련하는 것뿐이지.”
불길함이 엄습해 왔다.
“설마…… 그 수련이라는 게…….”
“이곳, 전생의 방에서 나와 대련하는 거다. 실전만큼 도움이 되는 수련 방법은 없지.”
시든밀러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번졌다. 그동안 잠잠했다 싶었는데, 다시 지옥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