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147화 (147/217)

# 147

43장 남미 철수(1)

“선봉지휘부가 적격자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희미한 살기가 묻어 나오는 목소리는 넓은 공동에 울려 퍼졌다.

희미한 조명 아래, 검은 제복을 입고 후드를 깊숙이 눌러쓴 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선봉지휘부에는 10급 인베이더, 카르센 경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까? 공격 보고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파괴당했군요.”

그는 선봉지휘부가 공격당한 직후, 지원 요청 신호를 포착하고 병력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카르센 경이 자리를 비운 상태였나요?”

또 다른 이가 질문을 던졌다. 체형과 목소리로 보아 여성이 분명했다. 그녀의 물음에 가장 먼저 나타나서 소식을 전한 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일리나 경.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카르센 경은 선봉지휘부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10급 인베이더인 카르센 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봉지휘부가 파괴되었다는 말이에요?”

일리나가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다시 물었다. 그녀는 8급 인베이더로 10급 인베이더의 무력 수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10급 인베이더의 무력은 SS급 중견 정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고된 적격자 강현준의 수준이 SS급 하위로 보고되어 있었다.

페트렌코와 현준의 마찰은 아직 보고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놀라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 일은 아니었다.

“카르센 경은 전투 중에 적격자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적격자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강해졌군요.”

“하지만 그것뿐입니다. 그들은 우리 인베이더의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일리나의 말에 누군가 과한 자신감을 내보이며 말했다. 모인 인베이더들 중 몇 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과한 자신감은 좋지 않아요. 경께서는 지금 적격자의 성장 속도가 보이지 않는 건가요?”

“하지만 위대한 침략사령부의 적수가 되지는 못할 겁니다.”

“물론 침략사령부 전체를 상대하지는 못하겠죠. 사령부 직속에는 ‘신격’에 오른 인베이더들도 적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우리밖에 없다는 게 중요해요.”

“음. 그건 옳은 말입니다.”

과한 자신감을 내보였던 인베이더는 일리나의 말에 설득되었다.

“게다가 적격자의 성장 속도가 예사롭지 않아요. 벌써 10급 인베이더를 처치할 정도의 경지에 오를 줄은 몰랐어요. 281번 부대의 참모부가 예상했던 것보다 3배 정도 빠른 것 같아요.”

“공격지휘관께서는 적격자에 의한 위협이 생각보다 크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누군가 말했다. 공격지휘관은 8급 인베이더인 일리나의 직함이었다.

“네, 어쩌면 지금의 저보다 더 강할 수도 있어요.”

8급 인베이더 정도면 SSS급 최하위에서 하위 정도의 무력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일리나는 조금 약한 편에 속하는 SSS급 최하위라고는 하지만 1인 군단에 필적하는 무력의 전개가 가능했다.

“일리나 경보다 더 강하다는 말입니까?”

“말이 안 됩니다.”

“공격지휘관께서는 적격자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인베이더들은 고개를 저었다.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침략사령부에 대적하는 존재인 적격자의 위치가 커지는 게 반가울 리 없었다.

“과대평가하는 게 아니라 사실입니다. 공격이 시작되고 1시간이 되지 않아서 선봉지휘부가 전멸했어요. 제대로 된 저항이 불가능할 정도로 전력 차이가 심했었다는 걸 의미하죠. 공중항모가 있다고는 하지만 이해하기 힘든 수준이에요.”

도쿄 공습 이후, 현준과 레이스 길드에서 침략사령부의 기술이 녹아든 공중항모를 확보했다는 건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상관없습니다. 선봉지휘부는 그 역할을 다했습니다. 이제 남미에 공격지휘부가 세워졌고 우리의 침략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다시 차원 균열이 불안정해졌지만 이미 선봉지휘부를 통해 소수의 동료들이 건너온 상태입니다. 적격자의 성장 속도가 예사롭지 않다고는 하지만 ‘우리’를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고개를 저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서는 이는 공격지휘부 참모를 맡고 있는 10급 인베이더 하빈스였다.

“하빈스 경. 아직 공격지휘부가 완성된 게 아닙니다. 현시점에서는 적격자의 전력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어요.”

일리나가 말했다.

“적격자의 전력은 이미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었어요.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습니까?”

누군가 질문을 던졌다. 일리나는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은 계획이 하나 있어요.”

* * *

레이드 게이트라는 건 암세포와도 같다. 웨이브를 조기에 제압하지 못하면 마수들의 수는 점차 늘어난다.

레이드 게이트가 오래 유지될수록 웨이브의 발생 빈도가 줄어든다고는 하지만 치명적인 위험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콜롬비아에서는 현준의 활약 덕분에 보고타 사수에 성공했지만 남미 대륙의 전체적인 상황은 좋지 않았다.

레이드 상황의 조기 통제가 실패하면서 마수 구역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결국, 연합 토벌대의 수뇌부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콜롬비아에서 철수한다는 말입니까?”

“연합 토벌대는 콜롬비아뿐만 아니라 남미 대륙 전체에서 철수할 예정입니다.”

현준의 물음에 이든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지 않군. 아직 검은 마정석을 충분히 모으지 못했을 텐데?

지옥참마도가 말했다. 이든이 앞에 있어서 현준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지만 같은 생각이었다. 선봉지휘부를 타격하면서 검은 마정석 15개를 추가로 입수했다고는 하지만 침략사령부라는 거대한 적을 상대하기에는 비축이 부족했다.

‘대병력과 싸우기 위해서는 군단의 힘이 필요하다.’

지금의 마력으로는 군단을 호출하는 게 힘들었다. 검은 마정석을 소비해야만 했다.

“그럼 남미 대륙을 포기하는 겁니까?”

UN이 남미 대륙을 포기하고 출입을 통제한다면 최악의 경우다. 합법적으로 검은 마정석을 루팅할 기회가 사라지는 것이다.

‘루팅 권한까지 받았는데, 이런 짜증 나는 경우가…….’

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꿀을 빨기도 전에 꿀단지를 뺏긴 기분이다.

“남미 대륙을 포기하는 건 아닙니다. 우선은 파나마에 저지선을 구축하고 물러난다는 겁니다.”

“그건 방치 아닌가요?”

“방치는 아닙니다. 마수 구역을 ‘필드’로 명명하고 일정 자격을 갖춘 헌터들에게 출입을 허가할 생각입니다. 물론 연합 토벌대도 계속 유지되어 확산을 막을 생각이고요. 우선은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방치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조금은 공격적이었던 모양이었다. 이든이 약간 불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허가만 있으면 출입할 수 있다는 거죠?”

“물론입니다. 강현준 씨에게는 우선적으로 출입이 허가될 예정입니다.”

이든의 말에 현준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출입이 허가되지 않더라도 검은 마정석 루팅을 위해서 몰래 사냥에 나설 생각이었지만.

‘가능하면 공식적으로 활동하는 게 좋지.’

공식적인 토벌 활동으로 인해 들어올 부수입을 생각하면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번졌다.

뭐든 공식적으로 활동하는 게 생색내고 보상을 받아오는 데에는 최고라고 생각했다.

“철수는 언제부터죠?”

“일주일 안에 대대적인 철수 작전이 시작될 겁니다. 물론 강현준 씨와 레이스 길드는 먼저 대한민국으로 돌아가셔도 됩니다.”

이든이 말했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철수가 결정된 이상, 빠른 귀국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한국에서 해야 할 일도 많았다. 길드 재정비도 해야 하고 대한민국에 대한 길드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작업도 중요했다.

길드장인 현준뿐만 아니라 부길드장을 맡고 있는 태민까지 콜롬비아에 있으니 소진이 한국에 있다고는 하지만 길드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다.

다이아몬드 티어에 빠르게 오르기 위해서는 관리가 필요했다.

‘일단 길드 내부를 정돈하고 남미에 다시 오든지 해야겠네.’

지금은 ‘필드’로 명명된 남미의 마수 구역은 광범위하다. 그리고 당장 출입 허가가 떨어질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시간은 넉넉했다.

현준의 마음은 이미 빠른 귀국으로 기울었다.

“그럼 저는 밀린 일이 있어서 이만…….”

이든이 방에서 나간 직후, 현준은 태민과 규환을 포함한 길드원들을 소집했다.

한국행이 결정되었고 공중항모라는 이동수단도 있으니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규환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태민과 규환에게 남미의 상황과 연합 토벌대의 방침에 대해 설명했다.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지금 길드도 재정비가 필요한 시점이고, 무엇보다 남미 대륙에 홀로 남아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태민이 가장 먼저 현준의 생각에 동조했다. 다시 돌아온다고는 하지만 연합 토벌대가 대대적인 철수를 시작하면 잠시 동안 남미 대륙을 완전히 포기하는 셈이 된다.

검은 마정석도 좋지만, 굳이 홀로 남아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남미 대륙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든의 말을 들어보면 UN, 그리고 연합 토벌대가 철수하면서 함께 피난할 예정이라는 것 같았다.

UN이 처리할 문제였기 때문에 현준은 크게 귀 기울여서 듣지 않았었다.

“공중항모는요?”

“준비가 끝났습니다. 당장 이륙할 수 있습니다.”

“좋아요. 우리는 귀국합니다.”

현준과 길드원들이 탑승을 끝마치자 공중항모가 천천히 이륙했다. 고도를 높인 공중항모는 곧장 한반도를 향해 빠른 속도로 항행하기 시작했다.

급한 용무는 없었기 떄문에 현준은 마력에 부담이 가지 않는 선에서 최대 속력을 유지했다.

그래서 남미로 올 때보다 비행시간이 조금 더 길어졌다.

“대한민국 영공에 진입합니다.”

규환의 보고에 현준은 하품을 하며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유를 부렸다고는 하지만 침략사령부의 기술로 제작된 비행체라서 그런지 군용 수송기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공군에서 놀랄 수도 있으니까, 식별 신호 보내두세요."

“예.”

급하게 오느라 귀국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레이스 길드의 공중항모가 워낙 유명하다고는 하지만 식별 신호 정도는 보내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현준의 지시에 규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하고는 술식을 조정했다.

“경기도 상공에 진입했습니다. 길드 비행장으로 바로 이동할까요?”

“그렇게 하세요.”

마법계 헌터의 물음에 현준이 대답했다. 길드 사무소 단지 내의 비행장을 두고 국가 공항이나 공군 기지를 이용할 필요는 없었다.

“고도를 낮추겠습니다.”

“착륙 절차를 시작합니다.”

길드 사무소 단지 내의 비행장은 넓지 않았지만, 공중항모의 우월한 기술과 이제는 술식 조정에 익숙해진 마법계 헌터들 덕분에 착륙은 언제나처럼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약한 충격과 함께 착륙이 끝났다. 현준은 가장 먼저 공중항모에서 내려 비행장 땅을 밟았다.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주위를 훑었다. 그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현준아. 어서 와.”

그곳에 소진이 서 있었다.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태민에게 귀국 소식을 전해 듣고 마중 나온 것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현준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다녀왔어요.”

2월이 거의 끝나가는 무렵, 봄이 오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기다린 소진을 향해 현준은 차분히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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