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42장 전환점(1)
“철갑무장 기병대가 군단 소환사와의 맹약에 따라 참전한다!”
거대한 깃발이 들어 올려지고 차원 관문에서 쏟아져 나온 중기병들이 러시아 육군을 먼저 덮쳤다. 그들을 향해 러시아 군인들이 총구를 겨눴지만.
“높은 나무 저격 여단이 호출에 응한다!”
차원 관문 너머에서 쏟아져 나온 수백 발의 화살이 군인들을 관통했다. 마력을 머금은 화살은 전차의 두꺼운 장갑조차 꿰뚫었다.
화살 세례가 러시아 육군 병력을 교란하자 철갑무장 기병대가 뒤이어 진형 깊숙이 파고들어 혼란을 혼란과 난전을 유도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민 무장 돌격대가 맹약에 따른다!”
중무장한 보병대가 상륙했다.
“전진! 앞으로!”
“군단의 적을 토벌하라!”
철갑무장 기병대와 높은 나무 저격 여단에 비해 훨씬 많은 수로, 1천이 넘었다. 그렇다고 해서 무장이 빈약한 것도 아니었다.
사슬갑옷과 판금 흉갑으로 무장했으며 두꺼운 철방패와 날카로운 검, 그리고 뾰족한 창을 들고 있었다.
“쏴, 쏴라!”
“화력을 퍼부어!”
훈련받은 군인들답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국민 무장 돌격대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제대로 집중되지 않은 화력은 저지력이 약했고 국민 무장 돌격대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학살을 시작했다.
백병전 훈련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군단의 이름으로 싸운 자랑스러운 국민 무장 돌격대 앞에서는 살아남기 힘들었다.
“철갑무장 기병대! 분견 지휘관 보좌, 빈센트입니다! 군단 소환사님을 엄호하러 왔습니다!”
힘찬 외침과 함께 1백기 정도의 기병들이 몰려 왔다.
“내 부하의 안전을 맡기겠다.”
“안심하시길! 철갑무장 기병대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적들로부터 지키겠습니다!”
현준은 그들에게 플레임의 안전을 맡겼다. 그는 부상이 심각해서 전투에 나서기 힘든 상태였다.
철갑무장 기병대가 마력을 조금이나마 다룰 수 있다고는 하지만 A급 헌터들의 상대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플레임의 호위를 맡기고 후방으로 물러나는 게 나았다.
“보내 줄 것 같으냐! 쳐라!”
후방으로 물러나려는 플레임과 빈센트 등의 앞을 A급 헌터 몇 명이 막아섰다.
현준은 이기어검으로 도살자 단검을 날려 보냈다. 도살자 단검이 A급 헌터들의 시선을 교란하는 사이에 철갑무장 기병들의 창이 그들의 몸을 꿰뚫었다.
“커, 커헉!”
“으아악!”
일반 기병이라고는 하지만 그들 또한 다른 차원에서 마수들을 상대해온 최전선의 전사들이었다.
조금이나마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현대 지구인의 신체와는 기준이 달랐다.
‘안심해도 되겠네.’
철갑무장 기병대가 앞을 막아선 알파팀 헌터들을 돌파하는 모습을 본 현준은 그들에게서 신경을 껐다.
이제 그의 시선은 눈앞의 페트렌코와 알파팀 헌터들에게로 향했다.
‘남은 건 100명이 조금 안 되나?’
페트렌코가 부른 지원군까지 합류한다면 조금 귀찮아졌을 수도 있겠지만, 다행히 그들은 무한의 군단이 상대 중이었고 현준은 지금 리퍼의 1차 해방까지 끝낸 상태였다.
‘문제없다.’
지금 마력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현준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왕 싸운다면 압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는 씨익 웃으며 왼손을 들어 올렸다.
무한의 군단의 출현으로 알파팀 헌터들이 동요하고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사이에 베히모스의 가호를 사용하여 마력의 축복을 받을 생각이었다.
마력의 축복을 받으면 최대 마력량이 늘어날 뿐만 아니라, 상당량의 소모된 마력을 회복할 수 있다.
알파팀의 폭풍처럼 몰아치는 공세 탓에 베히모스의 가호를 사용할 여유가 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변했다.
무한의 군단이 소환되고 높은 나무 저격 여단이 뒤에서 엄호하고 있었다.
A급 이상의 헌터들이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초월했다고는 하지만 찰나의 시간은 벌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전투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베히모스의 가호를 사용하는 것은 허점이 생기는 도박수이기도 했지만, 현준은 망설임 없이 마력을 끌어 올렸다.
-베히모스가 공허한 입을 열고 죽은 자의 영혼을 흡수합니다.
차원을 찢고 공허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력 반응!”
“공격에 대비해!”
공허의 눈은 현준에게만 보이는 듯했지만 흘러나오는 마력은 감지가 가능한 것인지 알파팀 헌터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방어 마법을 펼쳤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방어 대신 총공격을 감행했다면 베히모스의 가호를 중단시킬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이제 늦었어.’
갈라진 차원의 균열 너머로 보이는 공허의 눈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다량의 강인한 영혼이 영원한 공허를 만족시켰습니다. 당신에게 마력의 축복이 선사됩니다.
100명이 넘는 헌터의 영혼을 바쳤다. 베히모스의 공허가 크게 기뻐한 것인지 소모된 마력이 모두 회복되었다. 현준의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번졌다.
‘이겼다.’
질 수가 없는 싸움이다. 차원이 봉합되면서 베히모스의 공허가 사라지고 현준은 페트렌코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유로운 걸음걸이에서 자신감이 묻어 나왔다. 그런 그를 보는 알파팀 헌터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거, 거짓말…….”
“마력이 전부 회복되었다고?”
S급 이상의 ‘마법계’ 헌터들은 현준이 모든 마력을 회복했다는 걸 알아챘다.
“도대체 어떻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 문제였다. 상황은 반전되었다.
마력을 모두 회복한 현준과 달리 페트렌코를 포함한 알파팀의 헌터들은 짧지 않은 전투 시간 동안 강현준이라는 최강의 적을 죽이기 위해 가지고 있는 마력 대부분을 쏟아냈다.
100명이 넘는 인원이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이 빈 깡통에 가까운 처지. 현준의 눈에는 손쉽게 사냥할 수 있는 경험치 덩어리들이나 다름없었다.
“제, 제기랄!”
“이런 괴물을 어떻게 이긴다는 말이야…….”
최정예로 유명한 알파팀의 헌터들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도 도망치면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솟구쳤지만, 옆의 전우를 믿고 간신히 자리를 지켰다.
그래, 아직까지는.
싸늘한 살기를 흩뿌리며 발걸음을 옮긴다. 천천히 알파팀 헌터들과의 거리를 좁혔다.
조금씩 다가갈 때마다 흩날리는 살기 또한 강해졌다. 리퍼의 가호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강한 살기를 버티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이가 있을 정도였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할 거라고.”
차갑게 내뱉으며 지옥참마도를 들어 올렸다.
“단언컨대, 악몽이 뭔지 보여줄게.”
냉정하게 식은 분노가 흘러넘쳤다.
* * *
페트렌코는 보았다. 그의 눈앞에 지옥이 펼쳐졌다. 모든 마력을 회복한 강현준을 상대하기에 알파팀의 헌터 100명은 부족했다.
전투계 헌터들은 현준에게 접근할 때마다 핏줄기를 뿜어내며 쓰러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페트렌코의 눈으로도 제대로 확인이 안 될 정도로 순식간이었다.
잔상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알파팀 헌터 서넛이 쓰리지고 있었다.
“마, 마법도 통하지 않습니다!”
S급 최상위의 마법계 헌터 바실리크가 두려움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상위 마법은 마법 저항 때문에 닿지도 않았고 고위 마법이나 대마법을 사용해도 현준이 질드레의 가호를 사용하여 계속해서 파괴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마력을 아끼지 않았다. 적의 수가 절반 이상 줄어든 상태에서 소모된 마력이 모두 회복된 덕분에 더 이상 마력을 아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고위 마법을 난사해라! 놈도 마력이 무한하지는 않을 거다!”
바실리크가 지시를 내렸다. 고등 기술인 마법 파괴에는 정교한 술식의 보조 외에도 많은 양의 마력이 소모되기 때문에 지속적인 소모에 의한 마력 탈진을 노리는 것이었다.
“고위 마법을 난사할 마력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전투 초반이었다면 통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알파팀 헌터들은 지속된 전투로 인해 다량의 마력을 소모한 상태였고 그에 비해 현준은 소모된 마력을 베히모스의 가호를 통해 완전히 회복한 뒤였다.
현준을 노리고 날아드는 고위 마법은 모조리 파괴당했고 지친 전투계 헌터들은 몇 번의 공방을 주고받은 끝에 피를 쏟아내며 쓰러졌다.
“이걸로 또 절반 남았나?”
지옥참마도를 고쳐 쥐며 혼잣말을 흘렸다. 알파팀 헌터들의 수는 많이 줄어서 이제 겨우 50명 정도를 남겨 두고 있었다.
‘잔챙이가 너무 많아.’
방해될 정도. 페트렌코를 처리하려면 빠르게 청소할 필요가 있다.
-이스텔이 붉은 마법서를 펼칩니다. 일시적으로 화염 마법의 사용이 가능해집니다.
이스텔의 가호를 사용했다. 현재로써는 현준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광역 살상 기술이었다.
눈이 붉게 물들고 붉은 마법서가 앞에 생성되었다.
-이스텔이 가진 붉은 마법사의 권능을 행사합니다. 화염계 마법의 위력을 3배 강화합니다.
강화까지 사용.
“인페르노.”
다시 한번 가장 강력한 화염계 고위 마법을 시전했다. 다량의 마력이 단숨에 빠져나갔다.
“인페르노다!”
“고위 마법이다! 방어 마법 전개해!”
“회피하라!”
알파팀 헌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지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방어 마법을 전개하고 전력을 다해 마법의 살상 범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스텔의 가호로 인해 3배 강화된 인페르노는 거대한 불지옥을 만들었다. 뜨거운 용암은 방어 마법마저 녹였다.
“크아아악!”
“뜨, 뜨거워어어어!”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20명이 불타 죽었다. 페트렌코가 대마법 수준의 블리자드를 펼쳐서 불의 땅을 상쇄시켰지만 30명 정도밖에 살리지 못했다.
“끄, 끝난 건가?”
알파팀의 헌터 누군가 말했다. 하지만 페트렌코는 고개를 저었다. 현준의 마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스텔…….”
현준이 전생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며 마력을 일으켰다.
-이스텔의 가혹한 불꽃이 함께합니다. 화염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합니다.
죽어가던 불지옥의 불꽃이 다시 살아났다. 그뿐만 아니라, 악마가 깃든 것처럼 고개를 들고 일어나 알파팀 헌터들을 향해 붉게 물든 입을 쩌억 벌리고는 달려들었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화마에 20명이 더 불탔다. 페트렌코가 남은 마력을 쥐어 짜내서 얼음 마법을 전개했지만, 극소수만 지켜낼 수 있었다.
“생존은……?”
페트렌코가 직속 부관, 바실리크를 보며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 전의 얼음 계열 방어 마법으로 모든 마력을 소진했다.
“9명 남았습니다.”
바실리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답하자 페트렌코는 작은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제기랄…… 어디부터 잘못된 거지?”
페트렌코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정면에 있던 현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크아아악!”
“커허억!”
그리고 비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끼는 직속 부관, 바실리크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완전 은신’에 의한 기습.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아끼는 부하들의 목숨이 끊어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괴물을 건드리고 말았군.”
치명적인 실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