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41장 이제 SS급은 내 상대가 아니야(4)
페트렌코의 계획을 알게 된 후, 3일의 시간이 지난 아침. 보고타 상공으로 현준을 등 뒤에 태운 한 마리의 흑염룡이 날아올랐다.
잠시 동안 정지 비행을 하던 그는 이내 남쪽을 향한 비행을 시작했다.
보고타에서 남쪽을 향해 2시간쯤 비행했을까? S급 레이드 게이트가 있는 작은 도시의 상공에 진입할 수 있었다.
“이쯤이면 적당할 것 같다.”
-비행 마수가 많지 않아서 더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플레임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현준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미행이 붙은 건 알고 있지?”
하늘에서 기척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 비행 능력이 있는 헌터인 것 같았다. 꽤 수준 높은 은신 장비도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현준의 감각을 속일 수는 없었다.
-희미한 기척이 느껴지긴 했는데…… 역시 미행이었습니까?
SS급의 실력자라고는 하지만 플레임의 기척 감지 능력은 현준에 비해 부족한 수준이었다.
“그래. 친구들을 부르기 전에 내가 레이드 게이트를 정리하면 재미없잖아.”
현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애초에 길드원들 없이 혼자 S급 레이드 게이트를 찾아온 이유는 알파팀을 유인하기 위해서였다.
비행 능력이 있는 헌터의 미행 또한 예상했던 범주였다.
알파팀의 헌터들은 현준이 마수 토벌을 하고 있을 때 뒤를 노릴 것이다. 레이드 게이트를 너무 일찍 파괴하면 그들이 습격을 포기할 확률도 있다.
그럼 다음 기회가 있을 동안 찝찝한 기분으로 지내야 하기 때문에 박힌 가시를 뽑아내는 심정으로 이곳에 온 것이다.
산책 나온 것처럼 가볍게 레이드 게이트를 공략할 생각이다.
이든의 정보에 의하면 차원 관문을 다루는 S급 헌터가 페트렌코의 호출을 받고 보고타에 도착했다고 하니, 습격할 인원이 소집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내려가자.”
-예, 형님.
플레임이 대답과 함께 고도를 낮췄다. 지상과 가까워질수록 폐허에 가깝게 변한 도시의 참혹한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작은 도시가 감당하기에는 S급 레이드 게이트는 너무 강했던 것이다.
그래도 군부대가 출동하긴 했던 모양인지 망가진 전차와 장갑차 등이 도로 곳곳에 보였다.
그 주위를 장악한 마수 무리는 덤이었다.
“적당한 곳에 내려 줘.”
현준이 말했다. 플레임은 대답 대신 남쪽에 보이는 넓은 공원을 향해 몸을 틀었다.
마수 무리가 장악하고 있었지만 플레임에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어둠의 불꽃에 휩싸여 죽어라!
마법진이 생성되고 흑염이 쏟아졌다. 검은 불꽃에 휩싸인 리빙아머들이 뜨거운 열을 견디지 못하고 녹아내리거나 처참하게 박살 나서 쓰러졌다. 공원을 가득 채우고 있던 마수 무리를 정리한 플레임은 천천히 착지하여 현준을 내려 주었다.
“근처에서 놀다가 부르면 와라.”
-예, 형님.
플레임이 다시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다. 현준은 지옥참마도를 뽑아 들었다.
-크큭. 오랜만에 이 몸이 활약할 시간인가?
“아니. 가볍게 산책 나온 거야. 미행은 어때?”
작은 목소리로 지옥참마도에게 물었다. 지상에 내려오면서 미행자의 기척이 희미해졌다.
감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하기 위해 기척을 잘 잡아내는 지옥참마도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아직 붙어 있다. 완전 은신까지는 아니지만, 꽤 수준 높은 은신을 사용하는군.
은신 장비를 사용했을 것이다. 러시아 알파팀은 고급 장비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걸로 유명했고 이든도 수준 높은 은신 장비를 가진 알파팀 헌터가 보고타에 들어왔다는 걸 파악하고 말해줬었다.
“계속 주시해.”
산책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라고는 하지만 S급 이상의 마수들을 사냥할 때는 최소한의 집중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미행자의 기척을 놓칠 수도 있으니 한가한 지옥참마도에게 맡기는 게 좋았다.
-어려운 일은 아니군.
지옥참마도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현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강한 마력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산채 나온 김에 레이드 게이트 하나 정도는 파괴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레이드 게이트를 향해 산책하는 것처럼 천천히 걸어가며 보이는 마수들을 전부 사냥했지만, 러시아 알파팀의 습격은 없었다.
“미행은?”
레이드 게이트가 있는 곳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현준은 마지막으로 지옥참마도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나치게 천천히 토벌을 진행한 탓에 미행자가 심상치 않은 기류를 읽고 공격을 중단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계속 붙어 있다.
지옥참마도가 대답했다.
‘언제까지 간만 볼 생각이지?’
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짜증이 나게 만들려는 목적이라면 성공했다고 박수를 쳐주고 싶을 정도였다.
결국, 레이드 게이트가 파괴될 때까지 알파팀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공격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플레임을 부르려는 순간이었다.
-주인. 마력 반응이다.
서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강한 마력이 터져 나왔다. 지옥참마도가 가장 먼저 마력을 감지하고 반응했다.
은폐되지 않은 마력 반응이라 현준도 지옥참마도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마력 반응을 감지했다.
-마력의 성질을 보니까 누군가 차원 마법을 전개한 게 분명하다.
레이드 게이트가 새로 열린 것은 아니었다.
“알파팀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미행자는?”
-아직 붙어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좋겠군. 산책 나온 기분이나 내볼까?”
잠시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조금 전에 레이드 게이트를 파괴했으니 주변에 마수는 없다.
현준은 근처에 있는 적당한 크기의 건물 잔해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아공간 주머니에서 육포를 꺼내 씹었다.
레이드 게이트를 파괴하고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해 휴식을 취하는 걸로 보였지만 사실은 알파팀 헌터들이 무덤을 파러 오는 걸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빨리 와라.’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10분이 지나기 전에 은밀하게 접근하는 다수의 마력이 느껴졌다.
마력을 최대한 숨기려고 하는 듯했지만 수가 워낙 많아서 기척을 읽지 못하는 게 어려울 정도였다.
‘이건 너무 많은데…….’
감지되는 마력 기척만 해도 이백 명이 넘을 정도였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그야말로 인해전술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 심지어 마력의 반응으로 보아 S급 헌터도 상당히 많은 수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A급까지는 수가 많아도 쉽게 처리할 수 있지만, 다수의 S급 헌터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다.
‘알파팀이 이 정도였나?’
브라질에도 블라디미르와 함께 다수의 인원을 보냈을 것이다. 러시아 본토에도 레이드 토벌을 위해 인원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백 명이 넘는 최정예 헌터들을 움직일 여력이 된다고?
러시아 알파팀의 정확한 규모는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이 정도로 많은 헌터를 운용할 수 있는 걸 보니, 러시아 헌터들의 국가 충성도가 높다는 게 과장된 소문이 아닌 것 같았다.
-포위하고 있군. 미행으로 붙었던 놈도 뒤로 빠졌다.
“슬슬 시작인가?”
마력을 머금은 다수의 기척이 현준을 중심으로 넓게 퍼졌다. 포위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SS급 최상위가 한 명 있고 대부분이 최정예로 구성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승리를 확신하는 듯한 자신감 넘치는 움직임에 현준은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저었다.
-하사신의 음험한 웃음소리가 당신에게 위험을 경고합니다. 누군가 당신의 심장을 노리고 있습니다.
하사신이 가호로 경고했다.
“복수하러 온 거냐?”
고개를 돌려 시선을 옮긴 곳에 페트렌코가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가운 살기를 풍겼다.
“이번에는 이길 수 있을 거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내가 혼자 왔을 거라고 생각하나?”
현준이 공격적으로 묻자 페트렌코는 비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알파팀 헌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교적 멀쩡한 건물 옥상을 장악한 이들도 있었고 모퉁이에서 나오는 이들도 보였다.
-주인. 250명은 되는 것 같다.
이건 예상외다. 블라디미르의 제자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로 많은 수의 최정예 헌터들을 동원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계산 착오다. 하지만 현준은 당황하지 않았다. A급 이상의 최정예 헌터 250명이 모여들었다고는 하지만 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친구들을 많이 데려왔네?”
“저번에는 방심해서 졌지만, 이번에는 아닐 거다.”
페트렌코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모든 게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어서 기분도 좋은 것 같았다.
질드레의 통역 술식을 통하지 않더라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표정과 목소리였다.
현준은 그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
“네가 착각한 게 있는데, 함정에 걸린 건 내가 아니야.”
“뭐……?”
“너희들이지. 내가 아무 생각도 없이 여기까지 너희를 ‘유인’했다고 생각해?”
허세가 아니다. 현준은 소환사의 목줄로 연결된 플레임에게 호출 의지를 전달했다.
군단 소환사의 힘으로 소환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상적인 마력 통신은 힘들지만, 편법으로 간단한 의지 전달은 가능했다.
“하늘에서 마력 반응!”
“요, 용이다!”
플레임이 나타난 것이다. 그의 주위로 생성된 검은 마법진에서 흑염이 쏟아졌다.
“흐, 흩어져라!”
알파팀 헌터들이 즉각 몸을 피했다. 플레임이 SS급의 실력자라고는 하지만 온전한 기습이 아니었고 알파팀 헌터들의 수준 또한 높아서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광범위하게 흑염이 쏟아졌지만, 기껏해야 10명 조금 넘는 이들이 불길에 휩싸여 쓰러졌을 뿐이다. 그마저도 회복계 헌터 여럿이 달라붙어서 빠른 회복을 유도 중이었다.
하지만 현준은 애초에 플레임이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노린 것은 흑염룡의 등장으로 알파팀 헌터들의 시선이 일순간이지만 하늘에 모이는 것이었다.
“선수 필승!”
현준이 땅을 박찼다.
-카르타고의 정의로운 방패가 당신을 수호합니다. 위대한 수호가 함께하는 한, 당신을 위협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시든밀러의 용맹한 검이 당신과 함께합니다. 정의로운 용기가 무너지지 않는 한, 검은 부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치고 오러 실드가 생성되었다. 카르타고와의 동조율이 올라간 덕분에 이제는 방패라는 매개체가 없어도 오러 실드를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단숨에 음속을 돌파했지만 다른 S급 헌터들도 반응했고 페트렌코 역시도 무영창이라는 자신의 특수 능력에 어울리는 속도로 마법을 완성했다.
하늘에서 얼음의 창이 쏟아져 앞을 차단했고 그 틈에 알파팀의 S급 헌터들이 달라붙었다.
“특별히 너를 위해 전투계 헌터 위주로 준비했다!”
이런 맞춤형 서비스는 필요 없는데, 페트렌코가 너무 신경을 써준 모양이다.
그러나 과도한 친절은 불편을 불러오기 마련. 현준은 지옥참마도를 휘둘러 대답을 대신했다.
“컥!”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앞을 막아선 S급 헌터 한 명이 일격에 절명한 것이다.
운이 좋았다. 하지만 현준은 내색하지 않고 침착하게 다음 적에 대응했다.
“S급 헌터가 일격에 당했다고?”
“이런 괴물 같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었지만 일격에 S급 헌터의 목숨을 빼앗으면서 다른 헌터들이 잠깐이나마 경직된 것처럼 쉽게 달려들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현준은 살기와 마력을 끌어 올렸다.
-리퍼의 잔혹한 살의가 깨어납니다. 치명적인 살기의 일부가 해방됩니다. 살아있는 존재라면 본능적인 두려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쿠우우우웅!
근처에 있던 A급 헌터들이 비틀거렸다. 피를 토해내는 이들도 있었다. S급 헌터들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너흰 여기서 다 죽는다. 함정에 빠진 건 내가 아니야.”
질드레의 통역 술식을 통해 러시아어로 변환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함정에 빠진 게 아니라는 건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2번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