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41장 이제 SS급은 내 상대가 아니야(3)
‘조금 무리했나.’
SS급 대마법의 파괴에 이어서 수십 개의 고위 마법을 파괴했다. 평소에는 넘칠 정도로 넉넉하다고 생각했던 마력이 바닥을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당황한 기색 없이 차가운 표정을 유지한 채 페트렌코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는 수십 개의 고위 마법이 한순간에 증발해 버리는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간 듯했다.
열린 입은 좀처럼 닫히지 않았고 떨리는 두 눈동자는 공포로 물들었다.
알파팀 소속의 헌터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이럴 수가…….”
“고위 마법 수십 개를 한 번에 소멸시켰다고?”
압도적인 무력의 차이는 알파팀 헌터들의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지옥참마도에 당하지 않은 몇 명이 있었는데, 그들도 말없이 무기를 놓았다.
페트렌코에게 가는 길이 열렸다. 현준은 그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힘의 차이가 느껴지나?”
페트렌코는 말이 없었다. 그의 말을 긍정하면 패배를 인정하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대마법을 한 번 더 전개해서 공격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본능이 그에게 이길 수 없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두려움과 공포에 침식되어 떨고 있는 동안 현준은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는 페트렌코를 향해 차분한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이제 협상을 시작해볼까?”
일방적인 통보겠지만.
* * *
현준이 페트렌코와 알파팀 헌터들을 박살 냈다는 소문은 금세 보고타 전역에 퍼지면서 미국 토벌대를 이끌고 온 이든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복잡한 심경으로 현준의 숙소를 방문했다. 자신에게 굴욕을 준 페트렌코가 박살 났다는 사실은 기분을 좋게 만들었지만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길드장님. 미국 토벌대에서 이든 씨가 찾아왔습니다.”
노크와 함께 태민이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오며 말했다. 현준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태민이 방을 나서고 5분 정도 지났을까? 다시 문이 열리며 이든이 들어왔다.
현재 보고타는 언제 마수의 공격이 있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다. 그래서인지 아공간에서 무기를 꺼내두지는 않았지만 가벼운 방어 장비를 갖춘 차림이었다.
“강현준 씨.”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지요.”
이든이 말했다. 그 사정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미국 특유의 중재자 입장 때문일 것이다. 이번 연합 토벌대를 주도한 건 미국과 위원회였기 때문에 불미스러운 일을 최대한 막기 위해 이든은 신속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페트렌코와의 일 때문에 온 거죠?”
“잘 알고 계시는군요.”
예상은 정확했다.
“바로 본론부터 말해주겠습니까?”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든이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미국과 위원회에 대한 현준의 태도가 변할 것이다.
일단 현준이 위원회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미국과 이든이 페트렌코의 편을 들지 않을 확률이 높지만 마지막까지 방심할 수는 없다.
“제가 중재자로 온 건 아시죠?”
“물론입니다.”
“앞으로 러시아의 토벌대와의 마찰을 최대한 피해주셨으면 합니다.”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입니까?”
현준의 물음에 이든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공식적인 입장이라…… 알겠습니다.”
미국과 이든이 페트렌코의 편을 드는 최악의 경우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최악의 경우가 아니라도 보고타가 위급한 상황에서 칼부림을 벌였기 때문에 살벌한 경고 정도는 받을 거라고 예상했다.
‘생각보다 내 영향력이 약하지는 않은 모양이네.’
늘 당하고만 살았던 옛날과는 달랐다. 지금의 현준은 그 누구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올랐다.
현준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지금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원래대로라면 강력한 경고 조치가 취해졌을 테지만, 강현준 씨께서는 위원회에 소속되어 계시더군요.”
“그렇습니다.”
부정하지 않았다. 위원회가 비밀리에 활동한다고는 하지만 사실, 관련 정보에 접근할 권한을 가진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이든에게도 권한이 있을 것이다.
“혈맹과의 최전선에 선 위원과 비협조적인 러시아의 알파팀을 동일 선상에 둘 수는 없지요.”
대놓고 자기 식구 감싸기였지만 보호받는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현준은 기분이 좋았다.
표정을 관리하려고 했지만, 입가에 번지는 선명한 미소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알파팀의 페르렌코에게 제재를 가하고 싶었지만, 위원장님께서도 브라질에 계시고…… 여러모로 러시아를 더 이상 자극할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던전 레이드 시대가 시작된 이후,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전쟁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미국과 달리 러시아는 호전적인 모습을 보였다.
미국에 SSS급 헌터가 2명이나 있다고는 하지만 러시아는 그 차이를 좁힐 수 있을 정도로 S급 이상의 헌터 전력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러시아와의 마찰을 최대한 피하자는 태도를 고수해왔다.
“페트렌코와 러시아가 문제지. 이든 씨가 죄송해할 필요는 없지요.”
“저희 입장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든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여기까지가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입니다.”
고개를 들어 올리며 이든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비공식적인 입장도 있습니까?”
“저희는 강현준 씨를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이든의 말에 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잘못하면 선봉대가 되어서 장렬하게 전사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일단 지원 내용을 들어봐야 할 것 같다.
“어떤 방식으로 지원해 준다는 말입니까?”
“여러 방면으로 지원을 할 예정입니다. 우선, 저희의 진심을 증명하기 위해 강현준 씨에게 ‘정보’를 하나 드리죠.”
“정보요?”
UN 특수 기관의 서버에 접속할 수 있는 현준에게 정보는 큰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실망한 기색이 순간적으로 표정에 드러났고 이든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정찰조사국에서도 확보하지 못한 정보입니다. 장담컨대, 강현준 씨한테 도움이 될 만한 정보입니다.”
이든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곧바로 말을 이어가는 대신 잠시 입을 다물고 뜸을 들였다.
‘빨리 말해, 궁금하잖아.’
어색하게 웃고 있었지만 궁금해서 미칠 지경. 현준의 그런 심중을 눈치챈 것일까? 이든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페트렌코가 강현준 씨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건 굳이 정보기관의 도움 없어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범주인 것 같은데요?”
S급 이상의 헌터들은 자존심이 센 경우가 많았다. SS급 최상위면 러시아에서도 상당히 좋은 대우를 받으며 생활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이번에 그는 알파팀의 직속 부하들 앞에서 현준에게 굴욕스러운 패배를 경험했다. 그러니 보복을 노리고 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러시아에서 알파팀의 헌터들을 추가로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저희 측 스파이를 통해 계획 일부를 입수했는데, 강현준 씨가 보고타를 벗어나서 마수 지역에 진입한 순간 습격을 실행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정도면 꽤 자세한 정보였고 현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노리고 있다는 걸 인지하는 것과 정확한 정보를 확보하고 대비하는 건 달랐다.
“공식적인 증거는 없기 때문에 저희는 개입할 수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미국에서는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현준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먼저 공격을 당하면 정당방위 성립이다. 심지어 마수 구역에서 습격한다고 한다.
습격에 나설 알파팀 헌터들을 전부 다 죽여 버리면 레이스 길드 집행부 소속 헌터들을 제외하면 목격자는 없어진다는 결론이 나온다.
‘합법적으로 베히모스한테 제물을 상납할 기회다.’
강자, 또는 다수의 약자를 베히모스에게 제물로 바치면 축복을 받을 수 있다. 현준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합법적으로 모두 죽이려면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페트렌코를 제압했었다고는 하지만 이번에는 알파팀의 정예 헌터들이 많이 동원될 겁니다. 원하신다면 당분간 보고타 안에 체류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할 수는 있습니다.”
미국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수였다. 하지만 현준은 그걸 원하지 않았다.
이든이 많이 걱정하는 걸 보면 페트렌코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압도당했다는 사실이 소문나지 않게 은폐 공작을 펼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페트렌코는 물론이고 알파팀의 정예 헌터가 몇 명이 동원되던지, 모두 ‘처리’할 자신이 있습니다.”
현준의 목소리에서 자신감이 묻어 나왔다. 그제야 이든도 현준이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페트렌코를 제압한 건 단순 운이 아니었던 건가?’
이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눈앞의 헌터, 강현준의 공식적인 기록은 SS급 하위. 그런데 SS급 최상위를 제압한 게 단순한 운이 아니라고?
SS급 하위의 기록대로라면 SS급 최상위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동급이라고는 하지만 하위와 최상위의 사이에는 높은 벽이 존재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격차가 크다.
‘뭔가 숨기고 있다.’
이든은 현준이 힘을 숨기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강현준 씨한테 맡기도록 하죠. 마음대로 처리하셔도 좋습니다만, 뒤처리는 깔끔하게 해주세요.”
던전 내부가 아니기 때문에 명확한 증거가 남게 되면 미국에서 나서거나 러시아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개입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든은 현준의 눈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살기를 보고 그의 속내를 짐작했다.
조만간 페트렌코가 살해당하더라도 증거만 남지 않는다면 이든은 개입할 생각이 없었다.
“증거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고? ‘하사신의 가호’가 있으니까. 증거가 남더라도 가호를 사용해서 인멸하면 안심이다.
“강현준 씨를 믿겠습니다.”
대화의 끝이 보인다.
“별일 없을 겁니다. 제가 장담하죠.”
“예. 저는 다른 일 때문에 이만 가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든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황금빛으로 물들었던 현준의 시야가 원상태로 돌아왔다.
이든이 방에서 나가고 현준은 의자에 앉아 조금 전에 확인한 그의 진명을 떠올렸다.
“‘신봉하는 조력자’라…….”
누구의 조력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으로 볼 때는 적어도 방해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방해만 안 하면 돼.”
현준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앞을 막는 장애물이라면 무조건 박살 낼 생각이었으니까.
“형님.”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창문을 통해 플레임이 날아 들어왔다. 흑염룡의 날개만 꺼낸 상태였다.
그는 현준의 앞에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정찰은?”
“콜롬비아 절반이 마수의 땅이 된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네.”
플레임의 보고에 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정찰 결과가 좋지 않다.
“선봉지휘부로 보이는 곳은 없었습니다.”
“확실해?”
“제가 발견 못 했을 수도 있습니다. 정밀 정찰을 해봐야 확실해질 것 같습니다. 바로 다녀올까요?”
충직한 목소리로 말하는 플레임. 군단 소환사로부터 얻은 ‘소환사의 목줄’ 덕분에 숨기고 있던 반역 의사도 완전히 없어졌다. 지금 그는 ‘충신’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정밀 정찰은 나중에 하자. 지금은 더 재밌는 일이 생겼어.”
“그게 무엇입니까?”
“알파팀에서 날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적당히 놀아주려고.”
현준의 눈동자에서 차가운 살기가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