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133화 (133/217)

# 133

39장 복수를 위해 더 강해져라(3)

규환에게 여러 지시를 내리고 침실로 돌아오기 무섭게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감기 무섭게 의식이 날아갔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생의 홀’에 있었다.

‘섬광의 창기병? 아니면 황금률의 대상인?’

이기적인 협상가도 아직 만나지 못했지만 가장 최근에 관심을 보였던 이들이 황금률의 대상인과 섬광의 창기병인 만큼 둘 중 한 명이 초대를 보내왔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천장에 향했던 시선을 정면으로 옮기자 백금에 가까운 빛깔의 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중앙에 각인된 이명은.

[섬광의 창기병.]

초대를 보낸 이는 ‘황금률의 대상인’이 아닌 ‘섬광의 창기병’이었다. 그의 가호는 군단 소환사의 펜리르를 제압할 때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랜스 차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차분한 표정으로 문을 열기 무섭게 천장에서 선명하고도 맑은 빛이 쏟아졌다.

환한 빛에 현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살폈다. 바닥은 대리석이었고 벽은 백색의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빛의 의지를 계승할 자가 왔군.”

굵은 목소리와 함께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 정면으로 시선을 옮기니 백마를 탄 기병이 보였다.

전신 판금 갑옷을 입고 있었으며 투구 또한 면갑이 내려가 있어서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반갑다. 나는 멸망되기 직전까지 ‘섬광의 창기병’이라고 불리며 빛의 이름으로 적을 꿰뚫었던, 라이키리라고 한다.”

창기병은 말에서 내리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갑옷에서 철그럭! 하는 마찰음이 새어 나왔다.

“반갑습니다. 저는 강현준이라고 합니다.”

“그건 알고 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널 주시했으니까.”

전생들을 만나면 꼭 한 번씩은 듣게 되는 대사.

“네게 침략사령부를 무찌르는 데 도움이 될 가호를 전해주기 위해 찾아왔다.”

펜리르를 일격에 제압했던 기술을 말하는 것 같았다. 가호를 각성하기 위해서는 또 어떤 수련을 겪어야 할까? 긴장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하하하! 너무 걱정하지는 않아도 된다. 다행히 넌 빛의 의지를 이어받을 자격을 갖췄으니까 말이지.”

라이키리가 말했다. 이미 자격을 갖췄다고? 현준은 기억을 더듬었다.

“초음속을 돌파한 게 자격이었습니까?”

현준의 물음에 라이키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물론 우연이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에 고작 한 번으로는 부족하지. 최소 2번 이상의 초음속 돌파가 있어야, 내가 직접 찾아올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 설계는 누가 하는 겁니까? 데우스입니까?”

지금까지 만났던 ‘전생’들 중에 절대적인 존재에 가장 가까웠던 이가 데우스였다.

다른 전생들도 데우스가 ‘절대적인 존재’에 가깝다고 언급했던 게 기억났다.

“우리들의 의지, 전생 시스템이다. 단일 존재로 볼 때 가장 가까운 전생은 네가 말한 ‘데우스’라고 봐도 무리가 없겠군.”

“그럼 그 커다란 랜스에 찔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군요.”

“하하하! 물론이다! 데우스 녀석의 운명 간섭 때문인지는 몰라도 넌 이미 내 가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니, 굳이 빛의 속도로 창에 꿰뚫릴 필요는 없겠군.”

현준의 말에 라이키리는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그는 랜스와 방패로 무장한 상태였는데, 그 커다란 랜스에 관통당하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동안 전생들과 수련하면서 고통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을 반갑게 맞이하는 마조히스트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경지에 오르는 건 절대적으로 피하고 싶었다.

“내 가호를 나눠주겠다.”

라이키리의 말에 현준은 대답 대신 그의 앞에 한 걸음 다가가 섰다. 라이키리가 손을 뻗어서 현준의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가서 침략사령부를 꿰뚫어라.”

그리고 의식이 검게 물들었다.

* * *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극심한 고통의 후유증은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가호의 마력이 느껴졌다.

“이걸로 나는 더 강해졌다.”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지만.

-갑자기 무슨 소리냐? 주인. 중2병이 재발한 것 같군.

지옥참마도가 벽에 걸려 있었다.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아.”

현준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크큭.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더는 말씨름을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지옥참마도를 챙겨 들고 본관 건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니까 오늘도 보고 받을 일이 많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길드장 집무실에 도착하여 의자에 앉기 무섭게 누군가 노크를 했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태민이 걸어 들어왔다.

“‘청소’를 끝냈습니다.”

“저도 뉴스를 봤습니다. 4명이죠?”

“예. ‘거물’은 정확히 4명이었습니다.”

“확실하게 처리했죠?”

치안이 폭발했다시피 한 던전 레이드 시대라고는 하지만 영향력 있는 인물을 대놓고 암살한 배후로 지목되면 피곤해진다.

지금 여론이 현준의 편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어두운 면은 밝혀지지 않는 게 좋았다.

“증거는 남기지 않았습니다. 3번에 걸쳐서 확인한 거라서 확실합니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를 보며 현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민은 언제나 일 처리가 확실했다. 그런 그가 이 정도로 확신할 정도면 완벽하게 처리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좋습니다. 이걸로 대한민국은 조금 더 깨끗해졌겠군요.”

이번 ‘암살’로 대한민국에서 ‘혈맹’의 이름을 걸고 앞길을 막아설 고위층은 모두 정리되었다.

“더 보고할 내용이 남았나요?”

“김 의원을 암살하는 과정에서 그가 관리하고 있던 실험실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집행부의 병력을 동원해서 실험실을 수색하여 실험체 52체와 검은 마정석 3개를 확보했습니다.”

“정말입니까?”

실험체와 검은 마정석을 추가로 입수했다는 건 좋은 소식이었다. 황제의 통솔력이 강화되었으니 실험체는 친위대로 편성하여 강력한 전력이 될 수 있고 검은 마정석은 마력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이걸로 조금 더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현준은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번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지금 그렇게 웃었다가는 악당과도 같은 모습이 연출될 것 같았다.

“예. 본관 지하로 옮겨뒀습니다.”

“확인해봐야겠네요.”

본관 지하는 넓었다. 주 이용층인 집행부 헌터들이 ‘지하실’이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일반 가정의 ‘지하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넓었다.

사실상 지하 기지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크기였으니까.

“안내하세요.”

현준은 태민과 함께 지하로 내려갔다.

“우선 회복실로 옮겼습니다. 회복실 근처는 길드장님의 친위대가 보안을 책임지고 있어서 추가 인원을 붙여 두지는 않았습니다.”

회복실은 길드의 지하 시설 중에서도 엄중한 보안이 요구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친위대가 지키고 있었다.

현준에 대한 강한 충성심으로 무장한 친위대는 그 어떤 명령이라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을 통해서 기밀이 새어나갈 걱정은 없으니 비밀스러운 임무를 맡기기 좋았다.

“문을 열겠습니다.”

현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민이 회복실의 문을 열고 조명을 켰다. 원래는 비어 있었던 공간에 52개의 실험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활용할 수 있겠습니까?”

태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현 친위대를 구성하고 있는 ‘쉐이드’의 진실에 대해 알고 있는 극소수 중 한 명이었다.

그 비밀을 알았을 때, 가장 반발하지 않았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진명은 ‘맹신하는 눈먼 기사’다. 현준을 향한 ‘눈먼 맹신’은 시작된 지 오래였다.

이미 ‘우상화’까지 진행되고 있으니 웬만한 일로는 현준에 대해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일단은 제어 술식이 걸려있는지 확인해 봐야겠네요.”

혈맹 특유의 제어 술식이 있다. 그게 베이스로 깔려 있다면 ‘수정’ 작업을 거쳐서 충성의 대상을 옮길 수 있다. 현준은 태민의 말에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마력을 일으켰다.

-질드레의 음흉한 시선이 숨어 있는 마력을 찾아냈습니다.

질드레의 마력이 실험관을 훑었다.

-질드레의 어두운 지식이 당신을 보조합니다. 마법 술식의 분석을 시작합니다.

다행히 각인된 제어 술식은 공중항모에서 발견한 실험체들의 것과 동일한 종류였다.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번졌다.

‘고칠 수 있다.’

여기에 자신의 술식을 덮어서 수정하면 의식을 깨운다면 친위대 술식을 부여할 수 있을 정도의 기본적인 충성심이 확보된다.

‘이걸로 나는 더 강해질 수 있다.’

질드레의 지식을 활용하여 52명의 실험체에 각인된 술식을 수정했다.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태민은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일어날 시간이다.”

술식의 수정이 끝났다. 현준이 실험관의 기능을 정지시키며 차갑게 말하자 실험체들이 하나둘씩 의식을 차렸다.

“으으으.”

“여긴 어디지?”

하나둘씩 낮은 신음을 흘리며 실험관에서 빠져나왔다. 태민이 긴장한 표정으로 그들을 살폈으나 현준은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가만히 있으라는 짧은 수신호를 보냈다.

혈맹 쪽에서 설정한 술식 몇 개를 파괴하고 수정하면서 적대감을 줄이고 친밀도를 올릴 수 있도록 해두었다.

‘게다가 지금 이 녀석들의 주인은 나야.’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제어 술식을 완전히 없앤 게 아니라 약화시키면서 자연스럽게 현준을 주인으로 인식하게 만들게 술식을 각인했다.

혈맹의 마법계 헌터들이 이 광경을 봤다면 경악할 정도였다.

‘질드레의 지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

질드레는 술식과 마도학으로 차원 최강자에 오른 남자였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혈맹과의 마법 술식 대결에서 밀렸을 것이다.

“정신이 들어요?”

앞으로 나서자 혼란스러워하는 실험체들의 시선이 일제히 현준에게 향했다.

“다, 당신은…….”

“저희를 구해주신 겁니까?”

실험체들의 반응에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좋아, 제대로 작동하고 있어.’

술식은 문제없다.

“예, 제가 당신들을 구했습니다.”

인자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두 손을 펼쳤다. 그 모습은 마치 사이비 교주와도 같았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실험은 지옥이었다. 매일 같이 몸을 자르고 붙이기를 반복했으며, 이상한 약물을 주입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부작용으로 매일 같이 고통받는 그곳에 ‘인권’은 없었다.

‘S급 하나에 나머지는 모두 A급이나 B급이군.’

속으로 사악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들 전원을 친위대로 흡수하는 데 성공한다면 전력이 크게 증가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행복한 미래를 그리고 있던 순간, 실험체 한 명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잔뜩 긴장한 태민이 반응하려 했지만, 현준이 조금 더 빨리 손을 들어 올려 나서지 말 것을 신호했다.

“저는 212번이라고 합니다. 머릿속에 아직 제어 술식의 존재가 느껴집니다. 마음 같아서는 저희를 그 끔찍한 지옥에서 구해준 은인께 목숨과 충성을 바치고 싶지만…… 이대로라면 은인을 공격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를 212번이라고 소개한 실험체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묻어 나왔다. 어차피 그들은 갈 곳이 없었다.

근거지 없이 떠도는 것보다는 은혜를 보답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다들 212번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제어 술식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혹시 파괴가 가능한 겁니까?”

212번이 물었다.

“아니요. 하지만 술식을 덮어씌울 수는 있죠.”

현준의 말에 212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술식을 또 다른 ‘제어 술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덕분에 현준은 제어 술식과 친위대 술식의 차이점에 대해 적당히 설명하느라 30분 정도의 시간을 소모해야만 했다.

설명이 끝나자 차이점을 알게 된 212번의 표정이 조금 나아졌다.

“복수를 하고 싶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현준이 덧붙였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당신은 ‘혈맹’의 적입니까?”

“예. 맹세컨대, 저와 함께하면 복수를 할 수 있을 겁니다.”

-데우스의 절대적인 의지가 운명에 간섭합니다. 선동의 귀재가 개입합니다. 당신의 말은 곧 진실이 됩니다.

가호까지 겹쳤다. 현준은 그것을 기회로 삼아 또 30분 동안 짧지 않은 연설을 했다. 실험체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따르겠습니다.”

212번이 먼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지옥 속에서 실험체들을 이끄는 리더였다.

그가 먼저 무릎을 꿇자 다른 실험체들도 망설임 없이 충성을 맹세했다. 그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현준의 뒤로 태민이 빠르게 다가왔다.

“길드장님. 큰일이 터졌습니다.”

태민이 잔뜩 굳은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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