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38장 선봉지휘부(5)
혈맹이 레이스 길드 사무소 단지를 공격했다는 사실은 언론에 의해 금세 알려졌다.
어차피 숨길 생각도 없었고 은폐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도 아니었기 때문에 현준은 태희에게 동정 여론의 형성을 지시하는 걸 제외하면 특별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
“인베이더의 상태는 어때?”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준의 물음에 사혈이 대답했다. 두 사람은 길드장 집무실을 향해 걷고 있었다.
사혈 같은 경우에는 외상은 거의 치료되었지만 정신적인 피로 등의 회복 때문에 안정을 취하고 있는 소진이나 태민 등과 달리 인체 개조를 받은 몸이라 금방 병상을 털고 일어나서 업무에 합류했다.
인베이더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혈의 보고에 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지난 밤 있었던 고통의 지배자, 피어의 가호가 강렬했던 모양. 인베이더라고 하길래 조금 더 오래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고작 10번을 버티지 못하다니.’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지만 사실 훈련 받은 집행부 헌터도 1번 만에 정신이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10번을 버텼다면 경이로운 기록이긴 했다.
“길드장님.”
뒤처리 보고를 들으며 분주히 발걸음을 옮긴 끝에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규환이 현준을 발견하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친위대장. 인베이더의 상태를 계속 체크해서 보고해.”
“예, 알겠습니다.”
현준은 사혈을 지하실로 보낸 뒤, 규환과 함께 길드장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인공섬을 완전히 제압했습니다.”
“이걸로 남한 교구는 사실상 전멸인가…….?”
UN 특수 기관의 조사 덕분에 현준은 물론이고 특수경찰국에서도 혈맹의 구조와 명령 체계 등에 대해서는 조금이나마 파악하고 있었다.
“길드장님께서 적의 수장을 처리하고 지휘부를 무력화시킨 덕분에 남은 병력은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조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공격이 시작되자 혈맹은 자료 폐기 절차를 시작했지만, 워낙 양이 방대하고 토벌이 신속하게 진행되는 바람에 일부 자료가 남게 되었다.
당연하지만 현준은 그 자료들을 국가에 넘기는 것보다는 독점하거나 우선권을 가지는 걸 원했다.
“우선권을 확보했습니다. 저희 측에서 먼저 조사를 끝내야 대한민국 정부에서 따로 인원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공섬에서 조사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준 높고 믿음직한 집행부 인원이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위원의 권한을 사용해서 UN 특수 기관에 조사 인력 지원을 요청해야겠네요.”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이너서클과 혈맹의 손이 닿아 있었던 대한민국 정부보다는 훨씬 믿음직하겠죠.”
규환의 말에 현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UN 특수 기관의 요원들은 선별된 이들이다.
거기다가 스미스를 통하면 더 수준 높은 이들이 뽑힐 것이다.
그들이 조사한 결과도 어차피 레이스 길드의 정보망에 입수될 테니, 지원을 받는 게 손해 보는 일은 아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UN에 일부 정보가 새어나갈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현준은 UN과 정보 일부를 공유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큰 상관은 없었다.
“스미스 요원한테 제 말을 전하면 UN 특수 기관의 인력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인공섬 조사와 관련된 문제는 맡기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현준이었다. 규환은 인공섬 조사 지휘를 위해 곧바로 길드장 집무실에서 나왔다. 할 일이 많았다.
서류 정리를 끝내고서 소진과 태민 등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의무동으로 출발하려던 현준은 인기척을 느끼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이윽고 가벼운 노크와 함께 사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황제 폐하. 인베이더가 정신을 차렸습니다.”
“지하실로 가자.”
듣던 중 반가운 소리. 현준의 목소리에서 싸늘한 살기가 묻어 나왔다. 그는 사혈과 함께 인베이더 알자스가 갇혀 있는 본관 지하실로 향했다.
지하실에는 고문실과 친위대 중에서도 쉐이드 출신들을 위한 회복실이 있었다.
인체를 개조한 이들에게 효과가 있는 이 회복실은 현준이 직접 질드레의 술식을 사용해서 만든 것으로 치명적인 중상을 입더라도 회복할 수 있을 정도의 효능을 자랑했다.
덕분에 이번 전투에서 친위대의 피해는 적었다.
“문을 열겠습니다.”
지하실 앞에 도착했다. 친위대원 둘이 두꺼운 철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현준과 사혈을 알아보고는 입구를 개방했다.
길게 이어진 복도가 끝나는 곳에 또 다른 문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친위대원이 지키고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굵은 쇠사슬에 팔과 다리가 묶여 있는 인베이더, 알자스의 모습이 보였다.
“조금 전에 구속 술식과 쇠사슬 상태를 확인했습니다. 이상 없었습니다.”
고문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술식의 상태를 살피는 현준을 보며 사혈이 말했다.
수준 높은 구속 술식이 알자스의 마력과 신체를 1차로 속박하고 있었고 강화 술식이 각인된 쇠사슬이 물리적인 움직임을 제한하고 있었다.
“죽이게나.”
“내가 왜 그런 자비를 베풀어줘야 하지?”
현준의 목소리가 차갑다. 얼음 폭풍과도 같은 분노가 내면에서 휘몰아치고 있으니 목소리에서도 냉기가 묻어나올 수밖에.
“너는 내 영역을 침범했어. 자비를 구할 입장이 아니란 생각이 들지 않나?”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살도 쉽지 않을 거다. 그런 술식을 각인시켜 뒀으니까.”
“제기랄!”
“편히 죽고 싶어? 그걸 원한다면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야.”
현준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채찍으로 마구 때렸으니 매력적인 당근을 제시할 때다.
“일단 혈맹에 대해 아는 거 전부 말해라. 안 그러면…….”
“크윽!”
품속에서 작은 바늘을 꺼내 드는 걸 본 알자스는 몸이 먼저 덜덜 떨려오는 걸 좀처럼 진정시키지 못했다.
“‘고통의 지배자’와 한 번 더 대화를 해야 할 겁니다.”
“제, 제발…… 죽여주게나.”
“미안하지만 적한테 자비를 베풀 정도로 나는 관대하지 않아.”
말을 끝맺으며 알자스의 손등으로 바늘을 가져갔다. 이제 아주 조금만 움직이면 바늘의 끝이 피부에 닿는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까? 하는 생각에 현준은 고개를 들어 알자스를 얼굴을 보았다.
“마지막 기회다. 혈맹에 대한 모든 걸 불어.”
날카로운 경고에 알자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말할 테니, 그 끔찍한 것 좀 치워주게나.”
“진작 이렇게 나왔어야지.”
알자스는 깊은 한숨을 내뱉더니 혈맹에 대해 아는 내용을 모두 털어놓았다.
혹시라도 거짓을 말할 수도 있기 때문에 현준은 특수경찰국과 UN 정찰조사국에서 수집한 자료들을 가져와 대조하면서 들었다.
-어떤가? 주인. 인베이더가 솔직하게 말하고 있나?
자료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정보를 정리하는 현준의 모습에 지옥참마도가 궁금증을 견뎌내지 못하고 질문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네.”
현준은 지옥참마도에게만 들릴 정도의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자료집을 덮었다.
거짓을 말하지는 않는 것 같으니 간단한 질의 시간을 가질 차례였다.
“혈맹의 주목적은 침략군이 지구에 상륙할 수 있도록 교두보를 마련하는 거라고?”
“그렇다네…… 던전과 레이드 게이트는 균열을 확장해두는 선봉, 아니, 실험체의 역할에 불과하다네. 그들이 균열을 충분히 확장해 두면 침략사령부의 정예 병력이 상륙할 것이라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여러 차원을 점령해왔지.”
“점령지의 토착민들은 어떻게 처리하나……?”
단치히가 지키지 못했던 이들은, 시든밀러가 최후까지 저항하며 보호하고자 했던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90%는 처분하고 남은 10%를 세뇌하여 솔저로 받아들인다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약 10%가 나와 같은 인베이더가 되지.”
90%를 죽인다면 기본적으로 점령을 할 때 ‘학살’을 전제로 깔아둔다는 말이 된다.
그 잔혹한 방식에 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전생들이 지키지 못했던 자들은 대부분 죽었을 게 분명했다.
“다른 걸 묻지. 공격받을 때, 특수경찰국의 지원이 느려졌는데, 이것도 너희가 공작했지?”
날카로운 질문에 알자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고위층 몇 명이 개입했다. 남한 교구와 관련이 있는 이들이지.”
“자세히 말해.”
알자스가 부르는 대로 명단을 기록했다.
“하나 더. 던전이나 레이드 게이트를 여는 게 침략의 시작이라고 했는데…… 그럼 마수들은 어디서 오는 이들이지?”
“마수 군단 소속이지. 침략사령부의 하부 조직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네. 그들은 전투력이 떨어지지만, 수가 아주 많지. 한 마디로 차원 도약 과정에서 수십만이 사라져도 상관없는 존재들이라는 말이지.”
“한마디로 제물이라는 것이군.”
“바로 맞췄다네. 이해가 빠르군.”
알자스가 대답과 함께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 모습이 악마 같아서 혐오스러웠다.
“화제를 전환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혈맹의 조직도에 대해 다시 말해 봐.”
“기본적으로 점조직이지만 하나의 넓은 지역을 관리하는 관구와 단일 국가 영역을 지휘하는 교구가 있지. 그 밑으로는 아마 지부일 것이네.”
“그렇군. 마지막으로 침략사령부에 대해 자세히 묻겠다. 가장 위에는 누가 있지?”
“그건…….”
퍼억!
뭔가 대답을 하려는 순간 알자스의 머리통이 터졌다. 사혈이 재빨리 현준의 앞으로 나서서 핏물을 대신 맞았다.
“금제인가?”
머리를 잃은 시체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지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조용히 마력을 일으켜 베히모스의 가호를 일으켰다.
공허를 사용해 알자스의 시체에서 마력을 흡수했다.
-강인한 영혼이 영원한 공허를 만족시켰습니다. 당신에게 마력의 축복이 선사됩니다.
마력로가 조금이나마 커지는 느낌이 들었다.
“시체 치워라.”
“예, 알겠습니다.”
사혈이 차분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리자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친위대원 2명이 앞으로 나와 시체를 치웠다.
“황제 폐하. 괜찮으십니까?”
“친위대장 덕분에 난 괜찮아.”
핏줄기가 튀는 것쯤이야 현준의 반응 속도로도 피할 수 있지만. 그런 말을 굳이 해서 사혈의 사기를 떨어뜨릴 필요는 없었다.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마력의 양으로 볼 때 상당히 수준 높은 금제가 걸려 있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침략사령부 놈들은 쉽게 정보를 줄 생각이 없는 것 같군.
지옥참마도가 말했다. 그 의견에는 동의했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진과 태민, 그리고 플레임 등 부상을 입은 이들이 괜찮은지 살펴보지 못했다.
심문할 상대도 사라졌고 잠시의 여유가 생겼으니 병문안을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이 들었다.
가장 먼저 방문을 택한 건 소진이었지만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그녀는 잠에 빠져들었다고 병실 앞을 지키고 있는 집행부 헌터가 보고했다.
“플레임을 먼저 찾아가 볼까?”
혼잣말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태민에게 듣기로는 플레임의 활약이 없었다면 방어전이 힘들었을 정도라고 하니 먼저 방문해서 칭찬 정도는 해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의 병실 앞은 비어 있었다. 치명상을 입었다고는 하지만 부상도 거의 회복되었고 안정 중인 상태였기 때문에 집행부 헌터를 따로 배치하지 않았다.
“플레임. 안에 있나?”
“크큭. 진정한 어둠을 찾아 이곳까지 온 것입니까? 형님.”
멀쩡한 것 같았다. 현준은 다시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