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125화 (125/217)

# 125

37장 불길한 징조(3)

“이번에 서울시에 발생한 동시다발적인 레이드 발생으로 인해 차원 균열이 조금 확장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넓어진 균열은 차원을 넘어 군대를 보낼 수 있는 도로가 된다. 그래서 혈맹에서는 예전부터 꾸준히 검은 마정석을 이용해 레이드 상황의 발생을 유도해 왔다.

검은 마정석을 사용하더라도 레이드를 확정적으로 발생시킬 수는 없기 때문에 사실상 복불복인데, 이번에 운이 좋았는지 자연 발생한 레이드로 인해 균열이 넓어진 것이다.

“흑염룡을 빼앗겼지만, 이걸로 ‘그분들’께서 이용할 길이 열렸습니다.”

집행관의 말에 아르센 주교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흑염룡을 빼앗겼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만 해도 미쳐 날뛸 정도로 분노했었지만, 지금은 아주 편안한 마음이었다.

침략사령부에서 제대로 된 병력을 보내준다면 흑염룡보다 훨씬 큰 전력이 될 터였다.

“아무래도 흑염룡이 소환되면서 서울 쪽의 균열이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균열이 커지면 레이드 또한 자주 발생하게 된다. 레이드가 자주 발생하면 균열 또한 확장된다.

결국, 한 번 균열이 커지기 시작하면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말이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이제 그분들이 우리를 본격적으로 지원해 줄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이미 281번 침략부대에서 인베이더와 다수의 솔저를 지원해주겠다는 교신이 있었습니다.”

차원 연결이 불안정하고 균열조차 작아서 교신조차 힘들었던 과거와 비교하면 상황이 많이 변했다.

물론 여전히 균열은 다수가 차원을 넘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로스칼은 ‘적격자’ 사살을 위해 병력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파견을 결심했다.

“10급 인베이더께서 이곳으로 와주신다고 합니다.”

“10급? 최소 8급 정도는 기대했건만…….”

“아직 8급 정도의 인베이더께서 차원 관문을 넘기에는 균열의 저항이 심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아르센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자가 차원 이동할 때는 균열의 저항을 더 많이 받는다.

9급 이상 인베이더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균열을 더욱 확장시켜야 할 것이다.

하지만 특수 기관의 감시가 붙어 있고 남한 교구의 병력이 부족한 지금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다.

“지원 병력은 언제 보내줄 수 있다고 하셨나?”

지원 병력이 도착하면 본격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빠르면 일주일 안에 도착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81번 침략부대와 교신을 담당했던 집행관이 대답했다.

“지원 병력이 도착하면 바로 행동한다.”

“공격 목표는 어디입니까?”

“이번 대규모 레이드로 깨달았을 텐데? 서울은 ‘신기전’ 때문에 공격이 쉽지 않다. 성공하더라도 뒷일을 도모하기 힘들 정도로 피해가 심각하겠지.”

마수로부터 대한민국의 수도를 지키는 방어 시스템, 신기전은 결코 얕볼 만한 게 아니었다.

혈맹의 남한 교구는 도쿄를 지키는 방패, ‘이지스’를 박살낸 적이 있었지만, 일본 교구와 공중항모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일본 교구는 왕하 살수조와 내각부 친위대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서 전멸한 상태였고 중국 교구는 연락이 닿지도 않았다.

애초에 혈맹은 점조직에 가깝기 때문에 교구별로 연락이 활발하지 않았다.

“서울이 아니라면 어디입니까?”

누군가의 물음에 아르센은 씨익 웃어 보이며.

“적격자 강현준이 있는 도시, 수원이다.”

지옥문을 두드리겠다는 말과 같았지만, 그 사실을 아르센은 알지 못했다.

* * *

서울에서 발생한 대규모 레이드 사태는 ‘신기전’이 정상 작동하면서 생각보다 빨리 종식되었다.

서울에 열린 게이트는 A급이 3개, S급 3개, SS급이 1개로 노원구에 열린 SS급 게이트가 위협적이었지만 현준이 제시간에 도착해 정리하면서 상황이 종료되었다.

노원구의 SS급 게이트를 조기에 파괴하지 못했다면 소환된 마수들이 암세포처럼 퍼져나가 대학살을 벌였을 것이다.

“강현준 헌터가 아니었다면 노원구는 불바다가 되었을 겁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서울시장이 직접 수원까지 찾아와 현준에게 감사를 표할 정도였다.

“스미스입니다.”

서울시장이 돌아가고 난 직후, 스미스가 찾아왔다. 가벼운 노크와 함께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책상 앞까지 다가와 섰다.

“부르셨습니까? 위원님.”

“혈맹의 움직임은 어때요? 이번에 서울에서 발생한 대규모 레이드와 관련이 있을 것 같아서요.”

“한국에 배치된 모든 정보원을 동원하여 조사했지만, 혈맹으로 추정되는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혈맹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다행인 일이다. 하지만 왜일까? 가슴 한구석에서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렇게 얌전할 리가 없는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너서클의 여러 은신처를 확보하면서 미처 소각하지 못한 자료들을 확보했다.

그 자료들을 보면 그동안 남한 쪽의 혈맹 세력은 이너서클의 자금 지원을 받아온 게 분명했다. 그런 이너서클이 전멸했으니, 혈맹에서 대대적인 보복공격이 있을 것이라 예상되었지만.

“지금 당장은 의심될 만한 움직임이 없습니다.”

스미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물론 저희가 남한 교구 쪽의 모든 움직임을 관측하지는 못하는 만큼 은밀하게 행동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혈맹은 기본적으로 점조직이고 어둠 속에 숨어서 행동한다. UN의 특수 기관이라고 해도 100% 관측은 힘들다는 것이다.

“감시를 강화해야 할 것 같은데, 추가 지원 요청은 힘듭니까?”

지금 파견된 요원들로는 대한민국 전체를 감시하는 게 쉽지 않았다. 위원의 권한으로 국정원과 정보기관을 동원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UN 특수 기관, 그중에서도 정찰조사국의 정예 요원들의 힘이 필요했다.

“최근 미국이나 유럽, 특히 중동 지역에서 혈맹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도 얼마 전에 지원 요청을 했지만 당장 인력 파견은 힘들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도쿄 공습으로 혈맹의 존재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세계 각국이 UN과 공조하여 토벌을 시작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고, 오히려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혈맹은 더욱 왕성하게 활동했다.

“최근 들어서 특히 혈맹의 소행으로 보이는 학살 현장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조만간에 어디서 일이 크게 터질 것 같긴 합니다.”

학살을 벌이면서 부정적인 감정을 수집하면 검은 마정석이 완성된다.

검은 마정석은 크리처를 만들 수도 있지만, 차원 관문을 여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는 게 연구를 통해 증명되었다.

“대규모 소환, 아니면 크리처 군단이라도 만들 생각인가?”

현준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어느 쪽을 생각해도 끔찍한 결과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상부에 지속적으로 지원 요청을 건의하고 있습니다. 추가 답신이 오면 바로 보고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한반도 전체를 주시하세요. 그리고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면 바로 보고하세요.”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이만 가보세요.”

스미스는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집무실을 떠났다. 그는 현준에게 충성을 맹세한 신하는 아니었지만, 혈맹에 대한 증오로 움직이는 복수자였다. 혈맹과 관련된 일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다.

-주인. 생각이 깊어 보이는군.

말없이 창밖을 향해 시선을 보내기를 1시간. 지옥참마도가 심심함을 참지 못하고 말을 걸어왔다.

“적이 오고 있으니까…… 곧 전쟁이 시작되겠다 싶어서.”

전생과의 동조율이 높아질수록 그들의 차원을 멸망시킨 침략사령부에 대한 적대감 역시 강해졌다. 지금에 와서 침략사령부는 현준에게 있어서 반드시 척살해야 할 적이 되었다.

굳이 동조율 때문이 아니라도 침략사령부는 막아야 할 적이다. 지구를 노리고 있었으니까.

영웅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저 소중한 사람들과 스스로의 위치를 지키고 싶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환영회를 준비해야겠군.

지옥참마도가 말했다.

“그래야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간이침대에 몸을 눕혔다. 저택까지 갈수도 있겠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전생을 만나고 싶었다.

군단 소환사와 섬광의 창기병이 관심을 표했으니, 지금 잠에 빠져들면 둘 중 한 명의 방 앞에서 눈을 뜰 것 같았다.

“잘 자라.”

지옥참마도를 옆에 놓아둔 채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두 눈을 떴을 때는 ‘전생의 홀’이었다.

[군단 소환사.]

고개를 들자 보이는 청색 문에 각인된 이명을 읽었다.

“예상대로인가.”

무심결에 혼잣말을 내뱉었다. ‘군단 소환사’는 ‘섬광의 창기병’보다 먼저 관심을 보였으니 차례가 빠른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빛이 쏟아졌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맑은 하늘이 보였고 정면에는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는데, 중무장한 군대가 도열해 있었다.

인간의 형태를 한 이들도 있었고 흉측한 마수 무리도 보였다.

‘이런 타입은 처음이네.’

전생의 방에는 혼자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지금까지 그런 방만 봐왔다.

그래서 조금 낯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카르타고와 수련을 할 때 고블린이 소환되기도 한 걸 보면 이것도 불가능한 광경은 아닌 모양.

도열한 군단을 홀린 듯 훑어보고 있을 때였다. 말발굽 소리와 함께 중갑을 갖춰 입은 기사가 말을 타고 달려왔다.

“군단장님의 ‘방’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환생이시여. 저는 군단장 보좌, 가이우스라고 합니다.”

기사는 말에서 내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군당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신 곳까지 모셔도 되겠습니까?”

“예, 부탁합니다.”

가이우스는 말에서 내린 채 도보로 현준을 진영 중앙에 있는 거대한 막사로 안내했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기사가 문을 열어 주었고 현준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볼 때도 컸지만 직접 안에 들어와 보니 상당히 넓었다.

“어서 오게나. 나의 환생이여, 군단의 후계자여.”

철로 된 의자에 푸른 로브를 입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아주 똘똘하게 생겼구만.”

현준의 모습을 살핀 노인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군단 소환사 되십니까?”

“그래. 내가 멸망의 날까지 왕좌를 지켰던 국왕이자 군단 소환사, 아콘이다.”

“당신은 제게 어떤 힘을 줄 수 있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직언이었지만 아콘은 오히려 재밌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여러 가호를 내려줄 수 있는 다른 전생들과 달리 내가 그대에게 줄 수 있는 건 유감스럽게도 딱 하나뿐이라네.”

하사신의 경우에는 은신, 암살, 위험 경고였으며 카르타고는 반격, 방패술 등의 가호를 선사해 주었다.

그런데 아콘은 단호하게 단 하나의 가호만 선사해 줄 수 있다고 못을 박았다.

“그 하나가 뭔가요?”

현준의 물음에 아콘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무한의 군단.”

무심한 듯 내뱉었지만,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아콘은 철의자, 아니 왕좌에서 몸을 일으키며 두 팔을 펼쳤다.

“내 시험을 통과하기만 한다면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의 군단의 그대의 뒤에 설 것이네.”

그가 손을 흔들자 막사가 눈처럼 녹아내리면 사방이 훤히 드러났다.

“보아라! 멸망의 날까지 나와 함께 싸웠던 영광의 군세를! 내가 바로 군단이니라!”

아콘의 대사는 전율을 주는 것보단 현준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무한의 군단이 지키고자 했던 왕국은 침략사령부에 의해 멸망했다.

무한의 군세도 ‘침략자’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는 걸 의미했다.

‘나는 그런 괴물들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

어깨가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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