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36장 이곳에는 흑염룡이 잠들어 있지(2)
“고등 개체 소환 마법진이야.”
질드레의 가호를 사용해 술식을 분석한 결과다. 현준은 심각한 표정으로 소환 마법진의 술식을 계속해서 살폈다.
-늘 하던 것처럼 가호로 ‘삭제’해 버리면 되지 않나?
지옥참마도가 말했다. 현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하고 싶지만…… 강제로 술식 파괴를 시도하면 소환 마법진이 발동하게 설계되어 있네. 이 정도의 술식을 다루려면 최소 SS급 마법계라는 이야기인데…….”
말 끝을 흐리며 소환 마법진에서 손을 뗐다. 얼마 전에 처리한 ‘인베이더’가 SS급 최하위 정도의 실력자였다.
‘새로운 인베이더의 등장인가? 아니면 다른 곳에서의 증원?’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앞을 막아서면 제거할 뿐이다.
“이대로 놔두면 내일 발동될 것 같네.”
내일이면 플레이 월드의 점검이 끝나고 사람이 많이 몰려올 것이다. 혈맹에서는 그걸 노리는 것 같았다. 놀이공원에 모인 사람들을 제물로 바칠 생각이겠지.
-그러면 방법이 없는 거 아닌가?
“방법은 있어. 마법진을 침식하면 돼. 그러면 소환되는 개체가 나를 주인으로 인식할 거다.”
-마력 소모가 엄청나겠군.
지옥참마도 역시 마법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현준이 하려는 행동이 얼마나 큰 부담이 있는 건지 알았다.
“이게 최선이야.”
마법진에 마력을 주입해서 침식을 시작했다.
-주인아. 좀 위험한 것 같은데?
소모되는 마력에 비해 침식의 진행 속도가 느렸다. 이대로라면 대부분의 마력을 소모한 상태에서야 침식이 끝나게 된다.
마법진을 침식하더라도 소환수를 다루려면 제어 술식을 전개하여 복종시켜야 하는데, 그럴 마력이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여기서 침식을 멈추고 강제로 소환을 시켜야 한다.’
현준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애초에 산 제물을 바쳐서 소환수를 불러내는 마법진이다.
제물 없이 강제로 소환을 진행한다면 기껏해야 SS급 정도의 소환수가 나올 게 분명했다.
‘SS급이라면 이길 수 있다.’
공식적으로는 SS급 최상위까지는 어떻게든 이길 자신이 있었다.
“소환!”
침식을 중단하고 마법진을 작동시켰다. 시동어를 내뱉자 검은 마력이 일렁이더니 허공에 차원의 균열이 생겨났다.
갈라진 틈 사이로 칠흑과도 같은 어둠이 보였다. 균열은 점차 크게 벌어지더니 이내 사람 한 명이 지나갈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데우스의 절대적인 의지가 운명에 간섭합니다.
무슨 이점이 있는지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오늘따라 ‘목소리’가 불친절하다.
-온다.
지옥참마도가 말했다. 현준은 말없이 검 자루에 손을 얹었다. 균열이 조금씩 벌어질수록 범상치 않은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균열에서 흘러나온 검은 마력은 점차 인간의 형체를 갖추기 시작하더니 이내 완전한 사람의 형태가 되었다.
남자치고는 조금 긴 흑발에 붉은 눈, 그리고 검은 옷은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게 만들었다. 실제로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은 어둠, 그 자체였다.
“제물이 부족하군.”
남자가 말했다. 붉은 눈동자에서 살기가 요동쳤다.
“게다가 제어 술식의 존재가 느껴진다.”
제어 술식이 완전하지 않은 모양. 이렇게 되면 제압해서 더 강한 제어 술식을 각인해야 한다.
“누가 감히 나를 속박하려 하는가?”
혼잣말을 이어가며 허공에 대고 이상한 손짓을 하는 모습을 현준은 조용히 지켜보았다. 시선을 느낀 것일까? 남자는 현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놈이 소환자인가?”
“그렇다면?”
“너를 죽이면 이 미약한 제어 술식도 파괴될 것이 분명할 터.”
어느새 그의 손에는 검붉은 화염을 머금은 검이 들려 있었다.
“내 이름은 다크 플레임 드래곤 3세. 그 누구도 나를 속박할 수 없다!”
나름 위엄 있는 표정으로 살기를 쏟아냈지만.
‘으악! 내 손발!’
손발이 오그라드는 게 더 빨랐다.
-주인아. 내 손발 좀 찾아주라.
손발을 사라지게 만드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지옥참마도마저 항복을 선언할 정도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소환자여! 지금 당장 이 속박을 푼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바로 공격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끈다고?
“너, 지금 마력이 없구나?”
제물이 필요한 술식을 제물 없이 강제로 발동시켜서 소환했으니 마력이 없는 상태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그럴 리가! 이 몸은 다크 플레임 드래곤 3세다!”
“그러니까 마력이 없다고?”
“제, 제기랄! 마력 따윈 없어도 네 놈 같은 하등한 인간은 내 상대가 될 수 없다!”
다크 플레임 드래곤 3세, 줄여서 플레임. 그는 한껏 살기를 방출했지만 리퍼의 가호를 받고 있는 현준이 살기에 큰 영향을 받을 리가 없었다.
“고작 이 정도냐?”
여유로운 표정으로 한 마디 뱉어주자 플레임의 얼굴이 굳었다.
“흑염이여!”
지면을 뚫고 검은 화염이 솟구쳤다. 최소한의 마력은 가지고 소환된 듯 했으나.
“부족해.”
“빠, 빨라!”
현준은 이미 플레임의 배후로 이동한 뒤였다.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제어 술식이 각인된 채 소환되었기 때문에 보수 작업을 거치기만 하면 플레임을 소환수로 부릴 수 있었다.
그래서 죽일 생각은 없었다. 지옥참마도를 뽑지 않은 채 검집채로 눈앞의 중2병을 향해 휘둘렀다.
콰앙!
“끄아아아악!”
굉음과 함께 플레임의 몸이 지면에 처박혔다. 작은 운석이 꽂힌 것처럼 크레이터가 만들어지면서 흙먼지가 솟구쳤다.
“이, 인간 놈이…… 감히! 내 뚝배기를 박살 낼 생각이었더냐!”
“멀쩡하네?”
마법의 바람이 흙먼지를 몰아내자 플레임의 모습이 드러났다. 머리통 직격이었음에도 상처 하나 없었다.
-덜 맞은 것 같다.
지옥참마도의 말에 현준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일단 좀 맞자.”
그리고 일방적인 구타가 시작되었다.
“제, 제발…… 그만…….”
제대로 소환되었다면 SSS급의 무력을 선보였을 플레임이었지만 산 제물 없이 소환된 탓에 현재 수준은 SS급 최하위에다가 마력도 거의 없는 상태였다.
술식 침식에 상당량의 마력을 소모했다고는 하지만 현준의 마력로는 여전히 건재했다.
지옥참마도의 마력로 확장 옵션도 있고 베히모스의 가호로 꾸준히 마력로를 확장해 두었던 게 컸다.
“그, 그만해라! 인간 놈아!”
“인간 놈? 이게 아직 덜 맞았네.”
다시 지옥참마도를 휘둘렀다.
“혀,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무자비한 폭행에 결국 굴복하고 마는 플레임. 용의 비늘과도 같은 단단함을 자랑하는 피부 덕분에 피투성이가 되는 건 피했지만 성한 몰골은 아니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현준은 씨익 웃었다. 제어 술식은 구조가 까다롭기 때문에 상대방이 저항하면 쉽게 굴복시킬 수 없다.
“내 마력을 받아들여라.”
플레임의 정수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 알겠습니다.”
플레임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음 같아서는 제어 술식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지만 무자비한 구타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이 더 강했다.
-주인. 빨리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지옥참마도가 말했다. S급 수준의 마력 반응 셋이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현준은 복종 의식을 서두르기 위해 마력을 끌어 올렸다.
“복종하라!”
“그아아앗!”
마력이 침투했다. 불완전한 제어 술식이 복원되면서 플레임은 점차 현준의 노예가 되어갔다.
머릿속의 개념이 재정립된다. 제어 술식이라는 복잡한 술식을 복원하는 일이었지만 시간은 5초도 걸리지 않았다.
“플레임?”
모든 과정이 끝나고 그의 이름을 부르자.
“복종하겠습니다.”
충성심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드는 플레임.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제어 술식이 완벽하게 복원된 것인지 그와의 연결이 느껴졌다.
“일어나.”
“예스. 마스터.”
“마스터라고 하지 말고 형님이라고 불러.”
마스터는 조금 오글거리니까.
* * *
“형님. 뭐든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다크 플레임 드래곤 3세, 줄여서 플레임이 검은 외투자락을 펄럭이며 날아와 부름에 응답했다.
놀이공원에서의 소환과 다소 거친 훈육이 끝나고 이틀의 시간이 흘렀다. 그의 마력은 상당량 회복되었지만, 제어 술식은 정상적으로 작동 중에 있었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다. 현준은 확실한 검증을 위해서 인도적인 방법으로 간단한 테스트를 해볼 생각이었다.
“뭐든 명령만 내리면 따르는 건가?”
“물론입니다! 형님!”
죽기 직전까지 얻어터졌던 끔찍했던 경험 탓일까? 힘찬 목소리로 대답하는 플레임을 보며 현준은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테스트를 하는 게 좋을까?’
공격할 테니 저항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플레임에게 각인된 술식은 친위대 제어 술식과는 달랐다.
‘친위대라면 내가 죽여도 충성심이 떨어지지는 않겠지. 하지만…….’
목숨을 위협받는 지시를 받았을 때 플레임은 어떤 행동을 보일지 예상할 수 없었다.
현재 플레임의 제어 술식의 기초는 혈맹에서 개발한 것이기 때문에 결과를 쉽게 장담할 수 없었다.
‘복원하면서 술식을 덮어 씌웠으니 어느 정도 안전장치는 되겠지만.’
질드레의 방에서 읽은 책, 그중 소환 마법과 관련된 책에서 본 제어 술식을 조금 참고해서 기존의 술식을 보완했다.
안전장치로서는 충분한 기능을 하겠지만 지금 현준에게는 정확한 자료가 필요했다.
‘적의 토벌을 명령하고 싶지만.’
혈맹은 점조직이라서 지금처럼 숨어지내고 있는 시점에서는 위치 추적이 쉽지 않다.
이너서클은 완전히 토벌된 상태였고 잔당들도 스미스가 추적하여 사살하고 있다.
‘간단한 것부터 시켜볼까?’
정해졌다.
“뭐든 한다고 했지?”
“물론입니다! 형님의 지시라면! 이 다크 플레임 드래곤 3세! 최선을 다해서 수행할 것입니다!”
“좋아. 그럼 일단 이것부터 시작하자.”
씨익 웃으며 비밀리에 지시를 전했다.
“정말 그걸로 충분합니까?”
“응, 가서 가져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무슨 지시를 내린 것일까? 플레임은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며 날개를 펼쳤다. 검은 날개를 펄럭이며 그가 향한 곳은 근처의 대형 마트였다.
“하! 이곳인가? ‘그것’이 잠들어 있는!”
천장을 뚫고 나타난 플레임 탓에 무장 경비가 출동했다.
“죄, 죄송합니다! 형님!”
“피자를 사 오라고 했지. 천장을 박살 내라고는 안 했는데…….”
현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 이후로도 24시간 동안 잡일을 포함한 여러 가지를 시키면서 테스트를 하면서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지시는 충실하게 이행하지만, 융통성이 다소 부족하다.
‘교육이 조금 필요할 것 같아.’
이쪽 세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면 곤란하다. 피자를 사 오라고 보냈는데 천장을 박살 냈다는 전화가 올 정도의 상식이면 곤란하다.
“사혈.”
“부르셨습니까?”
어둠 속에서 친위대장, 사혈이 모습을 드러냈다.
“24시간 안에 ‘상식’이랑 ‘개념’을 탑재시키도록.”
“황명을 받들겠습니다!”
우렁찬 대답과 함께 한쪽 무릎을 꿇는 사혈의 모습에 현준은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로마노프와 질드레의 가호를 합쳐서 탄생한 술식의 영향 탓인지 사혈과 친위대원들은 ‘황제’나 ‘황명’ 같은 오글거리는 대사를 입에 달고 다녔다.
“플레임. 가서 개념 좀 충전하고 와.”
“예! 형님!”
먼저 가는 사혈을 뒤따라 플레임이 발걸음을 옮겼다.
-첫 번째 소환수를 완전히 길들였습니다. 소환수, 다크 플레임 드래곤 3세가 성공적으로 귀속되었습니다. 진리에 닿은 미치광이, 질드레의 도움으로 소환 마법의 진리를 엿보았습니다. 군단 소환사가 당신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또 누군가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