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36장 이곳에는 흑염룡이 잠들어 있지(1)
태희의 언론 공작 덕분에 여론은 현준의 편에 서게 되었다. 정찰조사국의 상급 요원인 스미스는 한국에 온 특수 기관의 요원드를 동원하여 이너서클의 잔당 토벌에 전력을 기울였다.
별장에서 추가 명단까지 확보해 둔 상태였기 때문에 사냥은 어렵지 않았다.
혈맹과는 달리 점조직 형태가 아니고 공식적인 행보를 유지하고 있는 간부들이 많았기 때문에 토벌은 어렵지 않았다.
이너서클의 잔당들은 공식적인 지위를 방패가 본인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스미스는 그들의 생각보다 더 답이 없는 인간이었다.
3일이 지나기 전에 간부 30명이 더 사살되고 은신처 4곳이 특수 기관의 손에 넘어가면서 이너서클은 사실상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집행관님. 긴급 전달입니다.”
문이 열리고 어두운 방 안으로 검은 로브를 갖춰 입은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빈 잔에 양주를 채우고 있던 집행관이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보고하라.”
“이너서클이 사실상 전멸했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뒤로 물러나 방문을 열고 나갔다. 다시 문이 닫히자 어둠 속에서 또 다른 집행관 셋이 나타났다.
모두 비슷한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지만 쓰고 있는 가면의 형태는 저마다 달랐고 허리에는 단검이나 장검과 같은 무기를 차고 있었다.
“이것으로 동아시아 관구에 대한 자금 지원 규모가 3분의 1 정도 줄었습니다.”
단검을 허리에 찬 집행관이 말했다. 목소리가 여리고 체구가 작은 걸로 보아 여성이 분명했다.
“위험한 거 아닙니까?”
“자금 지원 규모가 크게 줄었으니 당장 동아시아 관구 전체에 영향이 갈 겁니다.”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이너서클 간부의 진압 과정에서 민주적이지 못한 폭력이 상당히 많이 동원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이걸로 다시 언론전을 펼칠 수는 없는 겁니까?”
혈맹이 ‘민주적’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모습이 웃기지도 않았다.
“언론전을 재개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지시를 수행할 언론사도 없을뿐더러, 지금 저희한테 와야 할 이너서클의 자금을 강현준이 사회에 몽땅 환원했습니다. 덕분에 안 그래도 저희한테 부정적이던 여론이 완전히 돌아섰습니다.”
불법적인 루트로 혈맹에 흘러 들어가던 자금을 확보하기 무섭게 사회에 환원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물론 비밀리에 뒷주머니에 조금 챙겼지만 국민들이나 혈맹에서는 알 길이 없었다.
“남한 교구가 도쿄 공습을 시작할 때부터 모든 게 꼬인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게 강현준의 설계라면 그는 정말 무서운 놈입니다. 신속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하렌 경은 어디에 계신 겁니까? 최근 며칠 동안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교구장님께서 목숨을 잃으시고 관구에서 직속 명령이 전달되지 않는 이 시점에서 하렌 경의 지시가 필요합니다!”
집행관 셋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의자에 앉은 이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하렌 경께서는 전사하셨다.”
충격적인 소식. 무기를 차고 서 있는 집행관 셋은 경악했다.
“인베이더께서 전사하셨다는 말입니까?”
“하렌 경께서는 SS급의 실력자가 아닙니까? 그런데 당하셨다고요?”
“믿을 수 없습니다. 잘못된 정보 아닙니까?”
하렌은 12등급 인베이더로 SS급 최하위의 실력자다. 전 세계 혈맹의 최고 실력자는 아니었지만, 서열 10위 안에는 들어갈 정도였으며 사실상 침략사령부의 선봉으로서 현재 혈맹의 최고 지휘관이었다.
“시체까지 확인했다.”
무거운 목소리가 방 안을 뒤흔들었다. 집행관들은 당황한 기색을 좀처럼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성 집행관이 가장 먼저 멘탈을 수습하고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문제는 걱정할 필요 없다.”
문이 열리며 검은 로브를 입은 누군가 걸어 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이의 등장에 집행관들은 본능적으로 허리에 찬 무기로 손을 가져갔다.
“그만둬라. 동아시아 관구에서 오신 아르센 주교님이시다.”
그들은 서둘러 무기를 꺼내려던 몸짓을 중단하고 고개를 숙였다. 혈맹에서 주교는 집행관보다 높은 위치에 있었다.
“새로운 교구장이 선출될 때까지 남한 교구는 내가 맡는다. 이의 있나?”
“없습니다.”
아르센의 물음에 집행관들은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도쿄 공습과 아수라 길드 지원 작전에서 대부분의 병력을 상실한 현시점에서 이 방 안에 모인 집행관이 남한 교구의 전력 대부분이라고 볼 수 있었다.
“좋군.”
반대 의견이 없다. 아르센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여성 집행관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강현준은 무서운 적입니다. 지금도 저희의 목을 조르고 있고요. 혹, 앞으로의 계획을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흑염룡이다.”
“예……?”
“다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여성 집행관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아르센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싸늘하게 웃으며.
“흑염룡을 소환한다.”
처음 듣는 단어. 집행관들은 시선을 교환했다. 서로 흑염룡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묻는 듯한 시선을 보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나도 몰라.’
라는 걸 어필하기 위해 고개를 젓는 동료의 모습이었다.
“흑염룡은 우리 혈맹의 상징인 검은 화염을 자유롭게 다루는 드래곤이다. 충분한 제물을 바쳐서 소환하게 된다면 SSS급 중위 정도의 전투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아르센의 말에 집행관들은 전율했다.
“SSS급!”
현존 최강의 등급. 현재로서는 이것보다 높은 경지에 오른 이가 없기 때문에 상위 등급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정말 그 흑염룡이라는 소환수가 SSS급의 경지라는 겁니까? ‘소환’의 특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상위 개체를 부를 수는 없는 걸로 아는데…… 가능한 겁니까?”
집행관 한 명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는 마법계 헌터 중에서도 술식이나 특수 능력에 대한 지식이 깊었기 때문에 ‘소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흑염룡은 어두운 감정을 먹고 산다. 이걸로 더 이상의 설명은 불필요할 테지.”
그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대학살을 벌이면 되겠군요.”
“살아 있는 자들을 흑염룡의 제물로!”
“어둠의 다크! 죽음의 데스!”
“크큭. 기대되는군요.”
집행관들이 환호했다. 그들도 어쩔 수 없는 혈맹의 일원이었으며 침략사령부의 하수인들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알았으면 움직여라! 흑염룡 소환을 위해!”
“모든 건 흑염룡 소환을 위해!”
“우오오오오!”
연이은 패전으로 침울해하던 집행관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흑염룡이 다가오고 있다.
* * *
“설마 한소진 씨까지 데려올 줄은 몰랐어요.”
“이진아 씨. 내가 따라가고 싶다고 했어요. 현준이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두 여인이 양옆에 앉아서 서로를 향해 날카로움이 묻어 나오는 대화를 주고받고 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기억의 과거를 재생해 보면 답이 나온다.
진아는 제일 그룹에서 운영하는 놀이공원이 점검을 위해 하루 운영을 안 하게 되는데, 그날 같이 놀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고 현준은 아무 생각 없이 소진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뒤에 너무 시끄러워.”
조수석에서 태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소진이 외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기 무섭게 따라나섰다.
“어머. 재밌는 사람이네요.”
불만을 표시하는 태희를 보며 진아는 길게 말하지 않았지만, 목소리에서는 불쾌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백미러로 보이는 태희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차 안에 가득한 차가운 공기 속에서 결국 현준이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만 싸워요.”
짜증 섞인 한 마디.
“미안해요.”
“미안해. 현준아.”
“흥.”
진아와 소진은 잠시지만 빠르게 눈빛을 교환하더니 휴전을 선포했고 태희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바보…….”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한 거냐? 다 들린다. 현준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정된 분위기 속에서 30분 정도를 더 이동한 끝에 제일 그룹에서 운영하는 플레이 월드에 도착했다.
“플레이 월드에 온 걸 환영해요.”
앞장서서 달려나간 진아가 나름 발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하는 마음에 싱긋 웃으며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사람들이 안 보이네.”
태희가 불쑥 튀어나와서는 말했다. 놀이공원 하면 많은 사람이 떠오를 법했지만, 주변에는 소수의 직원밖에 보이지 않았다. 점검 때문에 정식 오픈을 하지 않은 탓이다.
“오늘 여기는 전세 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놀아요. 우리.”
점검 중인 놀이기구는 탈 수 없다며 진아는 마지막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와아…….”
잠시나마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놀이기구들을 보며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는 소진의 모습에 모두 녹아내리고 입가에는 선명한 미소가 번졌다.
‘잠깐 쉬어주는 것도 좋겠지.’
혈맹과의 접전이 이어지면서 쉬지 않고 빡세게 달려왔다. 장거리 여행에는 중간에 휴식이 필요한 것처럼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조금은 쉬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디선가 어둠의 다크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대로라면 죽음의 데스가 찾아올지도 모르겠군.
지옥참마도의 음침한 대사와는 달리 하늘은 맑았다.
“우와아아…….”
입구를 넘어서 깊숙이 들어갈수록 놀이기구가 많이 보였고 소진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행복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현준도 흐뭇했다.
“뭐부터 할까요?”
“롤러코스터!”
소진은 당연하다는 듯 외쳤다.
“로, 롤러코스터…….”
현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솔직하게 말해서 롤러코스터 같은 종류의 놀이기구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변명을 떠올리려는 찰나, 진아가 나섰다.
“롤러코스터는 점검 중이에요. 범퍼카는 어때요?”
뭔가 불안하다.
-하사신의 음험한 웃음소리가 당신에게 위험을 경고합니다. 누군가 근처에서 사악한 음모를 벌이고 있습니다.
하사신의 가호까지 경고를? 진아가 뭔가 꾸미고 있다! 지금 보니까 사악해 보이는 표정을 애써 숨기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범퍼카가 시작되었다.
“집행부장님도 같이 해요!”
“저는 보초를 서야 해서…… 죄송합니다.”
규환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저건 그냥 예의상 건넨 말이라는 것을.
-크큭. 어둠의 기마 혈투에 참전하는 이는 총 넷인가?
지옥참마도의 말과 함께 시작되었다.
“꺄아아아악!”
진아가 탄 차량이 소진의 차량을 향해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저, 저거 마법을 쓴 것 같은데?”
가속 마법을 쓴 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 속도는 설명이 안 된다.
현준이 난입하려고 했지만, 그의 차량은 느림보 수준의 속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차량에서 마력 반응.
“슬로우까지 걸었어?”
처음 보는 진아의 모습에 현준은 경악했다.
“빛이여!”
소진은 차량에 강화 버프를 걸었다. 충돌과 함께 굉음이 터져 나왔고 태희가 난입하면서 난전이 펼쳐졌다.
그 이후로는 평범하게 범퍼카를 즐겼고 현준은 음료수를 마시기 위해 자판기를 찾아 이탈했다.
-하사신의 음험한 웃음소리가 당신에게 위험을 경고합니다. 누군가 근처에서 사악한 음모를 벌이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하사신의 가호가 경고했다.
“뭔가 있네.”
현준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 마력을 흩뿌려 탐색을 전개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점검 중인 롤러코스터 뒤에서 뭔가를 찾아냈다.
복잡한 술식이 각인된 고등 개체 소환 마법진이었다.
-내가 말했지? 어둠의 다크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지옥참마도만 신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