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35장 생존자는 고개를 드세요(3)
“큭!”
하렌이 신음을 삼키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몸에서 일어난 흑염이 날카로운 창이 되어 사방에 뻗어 나갔다. 그것은 현준의 접근을 막기 위한 방책이었지만.
“소용없어.”
질드레의 가호 앞에서는 무력하다. 지금 현준은 마력로가 가득 차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대마법에 가까운 수준의 흑염조차 파괴할 수 있었다.
“으아아아아!”
파괴되어 공기 중에 흩어지는 흑염. 가까워지는 칼날. 피하고 싶지만 경직되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
불안하게 떨리는 시선과 함께 간신히 마력을 방출하여 지옥참마도의 경로를 흘렸으나 완벽하지 않았다.
서걱.
소름 끼치는 절삭음과 함께 왼팔이 잘려나갔다. 하지만 하렌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는 대신 반격을 행했다. 묵직한 둔기가 현준의 머리통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반격?”
예상외. 하지만 대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크아아악!”
반격은 허무하게 막혔다. 오러 실드를 머금은 공허의 방패가 철퇴의 일격을 받아낸 사이, 지옥참마도가 하렌의 몸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고, 고속 재생!”
“소용없어! 파이어 블레이드!”
“크아아악!”
몸에 각인된 고속 재생 술식을 가동하려는 하렌. 그러나, 현준이 가만히 두지 않았다.
오러에 화염 속성을 부여하여 상처를 지져 버린 것이다.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오고 동시에 현준의 등 뒤로 도살자 단검이 떠올랐다.
단검의 끝은 하렌의 이마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이런…….”
파악!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날아온 도살자 단검이 하렌의 이마에 꽂혔다. 그의 목이 뒤로 꺾이면서 힘없이 쓰러졌다.
“해치웠나?”
-그런 부활 주문은 그만둬.
지옥참마도의 우려와는 달리 쓰러진 하렌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완전히 죽은 것이다.
현준은 그의 시체에서 영혼을 흡수하여 베히모스에게 바쳤다.
-강인한 영혼이 영원한 공허를 만족시켰습니다. 당신에게 마력의 축복이 선사됩니다.
S급의 무력을 지닌 분신들과 달리 SS급 수준의 하렌, 본체를 제물로 바쳐서 그런지 베히모스의 공허는 크게 만족해주었다.
마력로가 확장될 뿐만 아니라 소모된 마력도 일부 충전되었다.
-이제 돌아가는 건가?
지옥참마도가 물었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해결되었으니까, 이제 가서 쉬어야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 * *
10명에 가까운 대한민국 정재계 고위층 인사가 한꺼번에 목숨을 잃는 대형사건이 터졌지만, 사회적으로 큰 이슈는 되지 못했다.
그들의 죽음으로 이길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판단한 대부분의 언론사들이 이너서클에게서 등을 돌려버린 것이다.
[대한민국 최고위층 집단 의문사.]
[이건 의도된 암살이 분명.]
[정부는 조사에 착수하라.]
그나마 이너서클의 직속이라고 볼 수 있는 대형 언론사 몇 군데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특수 경찰국에서는 ‘사고사’로 조사를 결론지었다.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나옵니까?”
“시체도 보여 줄 수 없다! 현장도 보여줄 수 없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공정하고 투명한 재수사를 요구합니다.”
특수 경찰국에 이너서클의 간부들이 찾아와서 항의했지만, 결정은 변하지 않았다.
이너서클이나 혈맹과 관련된 특수 경찰 간부들이 쓸려나가면서 그 빈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현준이나 진아의 추천을 받은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특수 경찰국장은 송태식이었으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정도.
“처리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특수 경찰국 로비에 앉아 있는 현준의 곁에 검은 선글라스를 낀 스미스가 다가오며 물었다.
‘처리’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하는 것만 보면 집행부 소속의 잔혹한 암살자 같은 모습이었지만 사실 그는 엄밀히 따지자면 UN 소속이었다.
이상한 모습은 아니었다. 조금 극성적이지만 평범하다고 볼 수 있다. 던전 레이드 시대의 개막으로 전 세계의 치안이 악화되고 전쟁 위험이 증가하면서 설립된 UN 직속 특수 기관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스미스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행동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완전히 토벌해야 혈맹으로 가는 자금 지원이 줄어들겠죠?”
“하지만 길드장님. 대한민국의 경제가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현준이 말했다. 옆을 지키고 있던 종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너서클의 구성원 대부분이 대한민국의 정재계 고위층이다 보니 이런 우려가 발생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
“이너서클 최고위층이 10명 가까이 죽었습니다. 대기업 회장은 물론이고 국회의원도 있었죠. 그런데 대한민국이 흔들렸습니까?”
현준의 물음에 종서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회장을 잃은 대기업은 국가와 UN의 지원을 받아 안정적으로 후계자를 회장직에 앉혔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현준과 진아의 입김이 조금 작용하여 혈맹과 연관점이 없고 레이스 길드에 비교적 좋은 감정이 있는 사람이 직위를 승계받았다.
“썩은 살을 도려내면 새 살이 자랍니다. 대체재는 널려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마음 같아서는 대한민국의 경제 따위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부가 공식적으로 레이스 길드에 협조해 주고 있으며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중이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예의는 갖춰줄 생각이었다.
“지시를 내려주시면 지금 바로 행동하겠습니다.”
“은밀하게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UN 특수 기관을 믿으시지요. 무장집행국의 요원들이 현재 한반도에 있으니 당장 처리할 수 있습니다.”
“스미스 요원의 판단에 맡길게요.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면 제거하세요.”
“알겠습니다. 위원님.”
스미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현준은 스미스가 서 있던 곳을 보며 씨익 웃었다. 스미스의 기준대로라면 이너서클의 간부 대부분이 내일 아침 해가 떠오르는 걸 보지 못할 것이다.
혈맹과 관련된 문제에 그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지시를 내린 것이다.
‘극단적인 복수자였지.’
처음 스미스를 만났을 때 로마노프의 가호를 사용하여 확인한 진명을 떠올리며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부장. 오늘 일정은 어떻게 됩니까?”
“없습니다. 길드 업무도 부길드장님이 해결할 수 있는 레벨의 보고서만 남아 있습니다.”
“그럼 저택으로 가죠.”
쉬고 싶었다.
“모시겠습니다.”
종서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쉬고 싶은 마음에 침실이 있는 5층으로 서둘러 올라갔다.
승강기를 타고 5층에 도달했다. 샤워를 끝내고 침실로 들어가기 무섭게 스마트폰 벨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전화를 받았다.
-한소진은 내가 데리고 있다.
변조된 음성.
“당신 누구야?”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경호는 완벽했을 터인데, 그걸 뚫었다고?
경호 담당자로부터 보고도 없는 걸 보면 은밀하게 일이 진행되었다는 걸 의미했다. 자연스럽게 살기가 흘러나오고 손은 지옥참마도의 검 자루를 잡았다.
-날 만나고 싶으면 4층으로 내려와라.
“4층이라고? 하아…….”
현준은 그제야 안도한 듯 짧은 한숨을 내뱉으며 벽에 기댔다. 저택 4층은 소진의 공간이었다.
“손태희인가?”
배려심 깊은 소진이 이런 개념 없는 장난을 칠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용의자는 단 한 명, 손태희뿐이다.
확신에 가깝다고는 하지만 아직 추측이다. 4층으로 내려가서 두 눈으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크큭. 기어이 갈 생각인가? 그곳에?
또 이상한 걸로 분위기를 잡는 지옥참마도다. 현준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으며 계단을 통해 4층으로 내려갔다.
‘불이 꺼져 있어?’
소진의 생활패턴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자고 있을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겨우 오후 8시였으니까.
‘기척은 둘.’
익숙한 기척이다.
‘거실 쪽에서 빛.’
현준은 하사신의 가호를 사용하여 완전 은신 상태가 되었다. 어둠 속에 몸이 녹아든 것을 확인한 그는 이내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모퉁이를 돌아가자 넓은 거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진과 태희도 있었다.
“어떻게 해…….”
“어, 언니…….”
영화관 스크린을 연상케 할 정도로 큰 TV에서는 공포영화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두 여자는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덜덜 떨면서도 TV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둘의 모습을 보니 대충 상황이 예상 갔다. 영화를 보던 중에 겁이 나서 소진이 현준을 부르자고 했을 것이고 태희는 장난을 치고 싶었던 것이었다.
길드장 비서실장인 소진은 오늘 현준의 일정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고.
‘사람을 놀려?’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저었다.
‘나도 똑같이 해주지.’
두 사람을 놀릴 생각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번졌다. 이렇게 웃는 것도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소파 뒤로 발걸음을 옮겼다.
완전 은신 중이었고 영화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척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 모습에 현준은 씨익 웃으며 은신을 해제했다.
“뭐해요?”
은신의 장막을 벗기 무섭게 두 사람의 사이에 얼굴을 밀어 넣으며 귀신처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아아앗!”
“꺄아아아아악!”
S급 전투계 헌터답게 신체 능력이 우수한 태희가 먼저 도망치듯 물러났고 소진은 다리가 꼬이는 바람에 비명과 함께 소파에서 굴러떨어졌다.
“하하하!”
그 광경에 현준은 큰 소리로 웃었다. 이렇게 웃어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전생의 방에서 영혼이 깎여나가는 것 같은 수련을 거치면서 감정도 함께 죽어갔다.
정신을 차려 보니 혈맹을 보면 무기를 휘두르는 기계가 되어 있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건조한 시간.
‘지금은 달라.’
살아있다는 게 느껴진다.
“갑자기 튀어나오고 그래! 너 나한테 감정 있지?”
“혀, 현준아…… 깜짝 놀랐어.”
각기 다른 반응. 현준은 소파를 뛰어넘어 그녀들의 사이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선빵 친 건 손태희 씨에요.”
“오늘 일정도 없고 그러니까, 기분 전환할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 같아서 내가 부르자고 했어. 그런 심한 장난까지 칠 줄은 몰랐어. 미안해.”
현준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롭다 싶었는지 소진이 재빨리 사과했다. 단순히 무서워서 부른 게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감동받았다.
“괜찮아요. 이제부터는 안 그러면 되는 거죠. 제가 누나 걱정 많이 하는 거 알죠? 다른 사람이 그런 걸로 장난친다고 해도 앞으로는 말려요.”
“응. 그렇게 할게.”
얼굴을 살짝 붉히며 대답하는 소진과 그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현준의 모습을 본 태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주 깨가 쏟아지네.”
소진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지만, TV로 시선을 옮긴 현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영화나 봅시다.”
지옥참마도를 옆에 놓고서 공포영화 시청을 계속했다. 귀신이 등장할 때마다 소진은 조금씩 거리를 좁혔고 태희도 홀로 공포를 이기려고 하다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죽창이 필요하다.
그 모습을 본 지옥참마도가 분노를 토해냈다. 그 마음을 현준은 이해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