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35장 생존자는 고개를 드세요(2)
“생존자는 고개를 드세요.”
침묵이 이어졌다. 별장을 지키던 수십 명의 헌터들과 무장 병력이 강현준, 단 한 명을 저지하지 못하고 전멸했다.
현준은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은 정원을 거닐며 현준은 중얼거렸다.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목소리에서는 공허함이 묻어 나왔다.
“아쉽게도 전원 탈락이네요.”
말을 마치며 지옥참마도를 검집에 집어넣었다.
-전멸이다.
지옥참마도가 말했다. 현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 반응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사신의 음험한 웃음소리가 당신에게 위험을 경고합니다. 누군가 당신의 심장을 노리고 있습니다.
동시에 기척이 감지되었다. 느껴지는 마력의 반응은 다가오는 위험이 약하지 않다는 걸 경고했다.
하지만 현준의 얼굴에는 두려움보다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훌륭한 마력 공급원이 출두하셨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검은 제복의 남자를 보며 현준은 지옥참마도를 다시 뽑아 들었다. 베히모스의 가호를 사용할 수 있는 지금, 강적은 마력의 축복을 받기 위한 제물에 불과했다.
“처음에 의심하긴 했지만 역시 네가 ‘적격자’였나?”
“그러는 너는 인베이더인가?”
혈맹원들과는 다른 마력이 느껴졌다.
“그렇다. 위험을 감지하고 이렇게 달려왔건만…….”
솔저급보다 높은 위치에 있으며 침략사령부의 주력을 담당하는 인베이더와의 첫 대면이었다.
하렌의 시선은 씨익 웃으며 말을 끝맺는 현준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조금 늦은 건가……?”
하렌이 중얼거렸다. 당장 침략사령부의 지원이 불가능하다고는 하지만 동아시아 관구의 재정 지원 절반 이상을 담당하는 이너서클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너서클 수뇌부의 위험을 감지하기 무섭게 혈맹의 전투 부대를 소집하고 먼저 달려왔지만 안타깝게도 늦은 한발 늦은 모양.
“검을 뽑아라, 인베이더.”
살기를 방출하자 차가운 냉기가 공기를 물들였다. 하렌은 마른침을 삼키며 거리를 조금 벌렸다.
‘위험해.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다.’
그는 침략사령부의 인베이더. 침략 전쟁을 겪으면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장에서 살아남았다. 실전 경험으로 단련된 본능이 경고했다.
눈앞의 적은 위험하다.
‘하지만 물러날 수는 없다.’
아공간에서 자신의 무기를 꺼내는 하렌. 묵직한 철퇴다.
“저건 방패가 필요할 것 같은데…….”
현준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철퇴의 마력을 살폈다. 최소 A급의 장비가 분명했다.
게다가 둔기 쪽이라서 검으로 상대하기에는 방어가 용이하지 않았다. 현준은 아공간에서 공허의 방패를 꺼내 들었다.
“미안하지만 여기서 죽어줘야겠다. 적격자로 태어난 네 운명을.”
하렌이 사라졌다.
-주인! 위다!
지옥참마도의 경고에 머리 위로 방패를 들어 올리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카르타고의 정의로운 방패가 당신을 수호합니다. 위대한 수호가 함께하는 한, 당신을 위협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카르타고의 수호가 정의로운 반격을 전개합니다. 흔들림 없는 방패는 날카로운 창이 되어 당신의 적을 노립니다.
하렌의 철퇴를 받아낸 순간 공허의 방패가 우웅! 하는 공명과 함께 충격파를 쏟아냈다.
“크, 크윽!”
예상치 못한 반격이다. 충격파에 휩쓸린 하렌의 몸뚱이가 하늘로 솟구쳤다.
“프, 플라이!”
공중에서 공격당하면 쉽게 피할 수 없다. 하렌은 황급히 비행 마법을 펼쳤다.
변칙적인 기동과 함께 급강하하며 오러를 머금은 철퇴를 휘둘렀다.
콰앙!
철퇴가 공허의 방패를 강타하며 굉음을 터뜨렸다. 땅이 움푹 꺼지며 크레이터가 만들어졌지만, 현준의 자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카르타고와의 동조율이 1차 해방의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정의로운 방패가 당신에게 철벽과도 같은 방어를 지원합니다. 이제 매개체 없이도 오러 실드를 전개할 수 있습니다.
방어에 성공하면서 동조율이 오른 모양이다. 게임 안내음성 같은 목소리를 들으며 방패에 닿아 있는 철퇴를 옆으로 슬쩍 흘려냈다.
“이기어검.”
“큭!”
하렌의 자세가 무너진 틈에 도살자 단검이 그의 허벅지에 날아가 꽂혔다. 곧바로 다음 공격을 시도했지만 하렌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블링크!”
하렌이 사라졌다. 그는 1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마치 분열이라도 한 것처럼 수십 명이 되어 있었다.
-주인. 환영이 아니라 실체가 있는 분신이다! 주의해!
“나도 알아.”
초보자 안내 시스템처럼 조잘거리는 지옥참마도에게 적당히 대꾸하며 차가운 시선을 흩뿌렸다. 본체를 제외한 분신의 수는 29체다.
-지금이다! 봉인시켜두었던 흑염룡의 힘을 사용할 때다!
“도대체 그건 무슨…….”
-살기를 방출해서 쿠웅! 하고 압도하는 거! 그거 말이다!
흑염룡의 힘이라니, 지옥참마도가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일 것이다. 리퍼의 가호가 마음에 든 모양.
“말 안 해도 쓰려고 했어!”
현준의 모습이 사라졌다.
“불길하다! 흩어져라!”
한 명이 다급하게 외치자 모두 일사분란하게 흩어졌다.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은 듯했다.
흩어지는 이들의 정중앙에 모습을 드러낸 현준의 앞에는 마력으로 구성된 마법서가 펼쳐졌고 붉게 물든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주변을 훑었다.
-리퍼의 잔혹한 살의가 깨어납니다. 치명적인 살기의 일부가 해방됩니다. 살아있는 존재라면 본능적인 두려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리퍼의 가호 발동. 쿠웅! 하고 무거운 살기가 천지를 짓눌렀다. 일순간 분신체들이 경직되었다.
하렌 역시 강력한 살기를 느끼고는 놀라움에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벌써 이 정도의 살기라고?’
적격자의 마력이 감지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이다.
‘이렇게나 성장했다는 말인가?’
압도적인 성장. 그것은 공포를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팔다리가 떨리고 시선이 흔들렸다.
‘침략사령부의 12급 인베이더인 내가 떨고 있다고?’
부정하고 싶지만 두려움을 숨길 수는 없었다.
“대체 이 괴물은…….”
“크아아악!”
목소리는 분신의 비명 소리에 파묻혔다. 근처에 있던 분신이 핏줄기를 뿜어내며 쓰러졌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커헉!”
“으아악!”
섬광이 번쩍이는 것처럼 종횡무진. 비명을 들린 곳으로 시선이 향했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현준은 이미 다른 곳에서 지옥참마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심지어 수십 개의 화염구가 교란까지 펼친다.
“경직이 풀렸다!”
“포위해!”
순식간에 9체의 분신을 잃은 뒤에서야 경직이 풀렸다. 하렌이 먼저 움직였고 분신들이 뒤따랐다.
-주인! 합격진이다!
지옥참마도의 오늘 컨셉이 뭔지 알 만했다.
“나도 알아!”
방패로 몸을 가린 채 주위를 경계했다.
정신적인 연결은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분신이라서 그런지 순식간에 고등 합격진이 완성되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래비티!”
“슬로우……!”
디버프가 연이어 펼쳐졌다. 중력이 현준의 움직임을 속박하고 슬로우가 속도를 느리게 만들었다.
“지금이다!”
“공격해!”
하렌이 분신들과 함께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현준은 씨익 웃었다.
“고작 이 정도로?”
마력을 일으키자 대기가 전율한다. 뭔가 이상하다. 그것을 깨닫고 물러나려 했지만.
“다, 다량의 마력 반응!”
“우회하기에는 늦었어! 공격해!”
미안하지만 게임 끝났어.
-질드레의 마력이 마법 술식을 침식합니다. 어두운 진리의 이름으로 마력의 강제 해산을 명령합니다.
가호가 발동하자 몸을 속박하고 있던 여러 마력의 기운이 흩어졌다. 몸이 가벼워졌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분신을 향해 몸을 던지며 지옥참마도를 휘둘렀다.
“큭!”
분신은 철퇴를 들어 올려 방어했다.
“막았어?”
막았다고는 하지만 분신은 지옥참마도에 실린 힘을 버티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며 뒤로 밀려난다.
“미안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라서.”
씨익 웃으며 듀렌달의 가호를 사용했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오러가 검신에서 솟구쳤다.
“이, 이런 괴물……!”
짙은 청색의 오러 블레이드는 분신의 철퇴를 휘감고 있는 오러를 허무하게 박살 냈다.
이어서 강철로 된 철퇴가 쩌억! 하고 쪼개졌다. 하렌의 분신 또한 오러를 다루는 기술이 뛰어났지만 듀렌달의 가호를 견딜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크윽! 당했다!”
지옥참마도가 목을 스치고 지나가자 분신은 힘없이 쓰러졌다.
“고위 마법을 파괴했다고?”
“대체!”
“당황하지 마라! 지금 이곳에서 적격자를 처단해야 한다!”
당황하는 분신들 틈에서 하렌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와라.”
현준이 살기를 흩뿌리며 말했다. 리퍼의 가호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운 살기였다.
가까운 곳에 있던 분신은 일순간 남극의 한 가운데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전신을 꿰뚫는 것 같은 느낌.
“역시 네놈이 적격자였군.”
도쿄 공습에서 존재가 드러났을 때 하렌은 조심스럽게 그를 후보에 올렸지만, 지금은 확신하고 있었다.
‘틀림없는 적격자다.’
도쿄 공습에서도 뛰어난 무력을 선보였지만, 지금은 더욱 강해졌다. 적격자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성장 속도였다.
‘분명 도쿄에서는 나에게 못 미치는 실력이었을 텐데…… 지금은 그 이상이다.’
그는 미국의 SS급 전투계 헌터인 반격의 검, 이든과도 대등하게 싸웠던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갓 SS급에 오른 현준에게 밀린다고?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다.
‘SS급 최하위는 절대 아니다. 적어도 중견급이야.’
하렌은 마른침을 삼켰다. 어느새 분신들은 다 죽고 10체 정도만 남았다.
“이제 열하나 남았다.”
칼끝을 하렌에게 겨누며 말했다.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분신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무기를 들어 올렸다. 긴장한 기색을 지우려 했지만, 소용없다. 공포가 지배하는 이곳 전장에서 군림하는 이는 오직 한 명뿐이다.
“여기서 살아나갈 생각은 버려라.”
그리고 그 군주가 적들에 대한 조언을 고했다.
“주, 죽여!”
“쳐라!”
두려움을 잊기 위한 돌격. 날카로운 얼음 조각의 폭풍이 불어 닥치고 하늘에서 불의 비가 쏟아졌다.
마력의 소나기를 뚫고 분신들이 거리를 좁혀왔다.
“불이라…….”
하늘에서 쏟아지는 불꽃의 세례.
“그대로 돌려주마.”
-이스텔의 가혹한 불꽃이 함께합니다. 화염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합니다.
마력이 한 움큼 빠져나갔다. 화염의 제어권이 이쪽으로 넘어왔다. 현준을 잡아먹을 기세로 달려들던 불꽃의 비가 허공에서 멈추더니 이내 용의 형상이 되었다. 화염룡의 시선이 분신들에게 향한 순간.
-이스텔이 가진 붉은 마법사의 권능을 행사합니다. 화염계 마법의 위력을 3배 강화합니다.
화르르륵!
화염룡의 몸체를 구성하고 있는 뜨거운 불꽃이 거세게 타올랐다.
“너흰 너무 늦게 왔어.”
화염룡이 분신들을 휩쓸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불꽃이 작렬하자 분신들이 타오르는 몸을 제어하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뿐인데, 이제 혼자 남은 하렌.
“이것만큼은 사용하고 싶지 않았는데! 초 인베이더 모드다!”
부작용이 심하지만, 일시적으로 신체와 마력에 강화 술식을 부여하는 초 사…… 아니, 인베이더 모드를 사용하고 말았다. 그의 머리카락이 붉은색으로 변했다.
“이건 초속의 버프. 붉은색이 된 나는 평소보다 3배 빨라졌다. 다량의 마력을 소진한 네가 나를 이길 수 있을까?”
하렌의 말에 현준은 피식 웃었다. 분명 분신들을 상대하느라 다량의 마력을 소모했다.
지옥참마도의 흡혈 능력으로 일부 마력을 흡수했다고는 하지만 부족했다.
“그래. ‘지금의’ 나는 조금 힘들지도 모르지.”
하지만.
-잠들어 있던 공허가 눈을 뜹니다.
손을 뻗자 현준의 머리 위의 공간이 갈라졌다.
“저건…… 대체…….”
무심결에 찢어진 공간 너머의 칠흑 속을 본 하렌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깊은 심연 속 공허의 눈동자를 보고 말았던 것이다.
-베히모스가 공허한 입을 열고 죽은 자의 영혼을 흡수합니다.
공허의 시선이 한 차례 훑고 난 뒤, 현준의 손아귀로 분신들의 영혼이 흡수되었다.
-다량의 강인한 영혼이 영원한 공허를 만족시켰습니다. 당신에게 마력의 축복이 선사됩니다.
공허가 만족했다. 현준 또한 체내에 차오르는 마력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단숨에 마력을 회복할 뿐만 아니라 전투 시작보다 더 많은 양의 마력을 가지게 되었다.
“예상대로 분신에게도 영혼이라는 게 있었나 보네. 이걸로 나는 3초 전의 나보다 강해졌다.”
3초 매너가 불러온 참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