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35장 생존자는 고개를 드세요(1)
[특수 경찰국장 사망. 이대로 괜찮은가?]
[고진혁 회장 구속, 경제에 끼칠 영향은?]
[UN 정찰조사국, 박멸 작전은 이제 시작일 뿐.]
밤 중에 많은 일이 있었다. UN의 특수 기관인 무장집행국과 정찰조사국이 행동에 나섰다.
특수 경찰국장이 사살당했으며 대한 그룹의 고진혁 회장은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이너서클의 영향력이 닿는 조간신문과 인터넷 뉴스 등에서 대대적으로 편들기를 시작하면서 비난 여론 형성을 시도했다,
“이대로는 여론이 악화됩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태민이 길드장 집무실까지 찾아와 보고했다. 여론몰이가 시작되었으니 비난 세력의 형성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보고를 받고 있는 현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태민은 깨달았다.
‘벌써 대응책을 마련하셨구나! 역시 길드장님이시다!’
존경심이 묻어 나오는 태민의 시선을 받으며 서류 정리를 끝낸 현준. 의자에 앉으며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보부장을 손태희 씨한테 보냈습니다.”
“손태희 씨의 힘을 빌릴 생각이십니까?”
“등용이라고 해두죠. 지금 비어 있는 홍보실장 자리에 앉힐 생각입니다.”
현재의 홍보실은 사무실은 쓸데없이 넓은데 직원들이 거의 없어서 유령 부서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실버 티어까지만 해도 홍보실의 존재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 골드 티어로 승격한 이후부터 중요성이 부각되었는데 과도한 성장으로 인해 인원 보충의 우선순위에서 밀려서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부서였다.
“손태희 씨가 제안을 받아들일까요?”
그녀는 S급 헌터인 동시에 선동과 날조에도 재능이 있는 참된(?) 언론인이었다.
여러 기업에서 비슷한 제안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한 전례가 있기도 했다.
“받아들일 겁니다.”
강한 확신이 묻어나오는 목소리.
“돈으로는 해결될 것 같지 않던데…… 특약이라도 있는 겁니까?”
역시 김태민이다. 눈치가 빨라서 좋다.
“특약이라면 당연히 넣어뒀죠.”
“혹시 제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제한적이지만 UN의 국제 기밀자료실 열람 권한. 그리고…….”
“그리고……?”
태민의 두 눈이 반짝였다. 다음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소진이 누나의 엽기 사진집.”
“그, 그걸로 협상이 되는 겁니까?”
태희가 소진에게 관심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사진집 때문에 움직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뒤이어진 내용이 너무나 충격적이라서 현준이 앞서 말했던 UN 국제 기밀자료실에 대한 제한적인 열람 권한은 묻히고 말았다.
“이건 보너스. 사실상 기밀자료에 대해 제한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진짜죠.”
포스팅이나 기사로 쓰는 건 막겠지만 단순 열람만으로도 호기심 많은 성격인 태희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준의 예상은 정확했다.
“할게! 그거 내가 할게!”
종서를 통해 현준의 제안을 전달받은 태희는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했다고 한다.
제안을 들은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레이저를 발사할 것처럼 선명하게 빛났다고 종서는 말했다.
임명이 끝나고 태희는 곧바로 홍보실에 출근했다. 현준은 그녀가 출근했다는 소식을 듣기 무섭게 종서와 함께 홍보실을 찾아갔다.
“왔어?”
모니터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태희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너서클이 언론의 7할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날 부른 거 아니야?”
오만한 게 아니다. 이건 근거 있는 자신감이다. UN의 기밀자료를 열람하면서 그녀에 대한 비밀스러운 정보를 알게 된 현준은 확신하고 있었다.
‘손태희가 있으면 이길 수 있다.’
그녀는 단순히 100만 구독자를 가지고 있는 파워 블로거가 아니었다. UN의 기밀자료실에 등록된 동아시아 정찰청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태희는 2차 각성자다.
첫 번째 특수 능력은 은신 강화지만 두 번째 특수 능력이 자료조작 계열 해킹이었다.
전투 관련 능력이 아니었기 때문에 던전 공략에 한계가 있었다.
던전 공략이 늦어지니 성장 속도 또한 2차 각성자 치고는 느린 편이었고 덕분에 이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에 대해 알고 있지?”
“역시 눈치가 빠르네요.”
“그러면 계약을 이행할 준비나 해두고 기다려.”
“기밀자료실 열람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현준의 말에 태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덤이고 중요한 건 사진집이지.”
말을 마치며 헤벌쭉 웃는 모습에 현준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인간, 어딘가 사고가 이상하다.
“아무튼, 잘 부탁합니다.”
“걱정하지 마.”
태희는 자신이 아는 언론 전문가 몇 명을 홍보실 직원으로 뽑은 뒤,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가장 먼저 중립 입장을 취하고 있는 언론사들을 회유하여 우호적인 내용의 기사를 최대한 많이 쏟아내게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등을 돌린 여론을 반전시키기에는 부족했다. 자연히 일은 많아졌고 피로에 짓눌려 두통을 호소하고 있을 때 현준이 찾아왔다.
“대한 그룹, 고진혁 회장의 방에서 나온 자료들입니다. 혈맹과의 연관점은 물론이고 이너서클의 비리들도 기록되어 있죠.”
“터뜨릴까?”
태희의 두 눈이 반짝였다. 첫 페이지에만 해도 무수한 양의 비리가 기록되어 있었고 연관된 이들도 많았다.
특수 경찰국 병력과 플래티넘 길드 집행부 헌터 수십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냥 터뜨리면 서운하죠. 적당히 부풀려주세요. 손태희 씨 능력이면 적당히 부풀리는 거 쉽죠?”
“역시 너는 알고 있었구나.”
특수 능력에 대해 알고 있다는 투였다. 태희의 물음에 현준은 어깨를 으쓱였다.
“원천이 되는 자료가 있으면 부풀리는 건 어렵지 않지. 진짜 속에 적당한 가짜를 섞어 넣는 것만큼 쉬운 건 없거든.”
진실을 베이스에 두고 거짓을 첨가하면 거짓말을 할 때 드러나는 위화감이 크게 줄어든다.
태희는 현준에게 전달받은 자료에 본인의 특수 능력을 첨가하여 여러 언론사에 뿌렸다.
처음에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곳에 먼저 보냈고 동시에 적대적인 언론사에는 경고와 함께 정정 보도 요청을 전달했다.
[비리 폭탄이 대한민국을 흔들다!]
[강현준, 알고 보니 정의의 사도였다.]
[비밀 장부 공개, 정재계는 침묵.]
비밀 장부와 여러 문건이 공개되자 언론은 난리가 났다. 공세를 취하던 언론사들은 더욱 강력한 역풍을 맞고 나가떨어졌다.
하루 만에 여론이 이너서클에게서 등을 돌렸다.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는군. 그런데 주인…… 왜 진작 비밀 장부를 공개하지 않은 거야?
“그, 그건 일종의 카운터 공격 같은 거라서 저쪽에서 깊게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아무튼, 그런 것이다.
-흐음? 아닌 것 같은데…….
지옥참마도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에 따른 변명을 생각하려는 순간, 타이밍 좋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 누구세요?”
“상급 요원, 스미스입니다.”
구원자의 정체는 스미스였다.
“들어와요.”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하자 천천히 문이 열리고 검은 정장에 선글라스까지 낀 스미스가 들어왔다.
그는 가방에서 서류 몇 장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특수 경찰국의 청소가 끝났습니다. 혈맹과 관련된 모든 이들의 직위를 해제하고 권한을 정지했습니다.”
특수 경찰국장의 자리는 태식이 전례 없는 특진을 하게 되면서 맡게 되었다.
이번 박멸로 특수 경찰국을 장악하게 된 현준은 장기적으로 볼 때 레이스 길드에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인물들을 특진시켜 빈자리를 메우게 했다.
“굳이 이 명단을 특진시키는 이유가 있을까요?”
“이 모든 게 혈맹을 무찌르기 위한 일입니다.”
“강현준 위원님의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잠깐 의문을 품기는 했지만, 현준이 한마디 하자 스미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이미 그의 마음속에서 현준은 신격화되어 있을 정도였다.
정당한 명분을 들먹이니 감히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특수 경찰국을 정리 중에 있습니다. 대부분 체포에 응했지만, 일부는 혈맹과 합류하기 위해 도주했습니다. 그들 중 절반 정도가 모습을 감춘 상태입니다.”
“혈맹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UN 정찰조사국의 요원 다수가 대한민국에서 암약하는 혈맹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큰 움직임을 보인다면 관측망에 잡힐 겁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스미스는 아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혈맹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면 그의 부하들이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수 경찰국을 정리하는 동안 이너서클의 최고위 간부들은 모습을 감췄습니다. 이들을 찾아내지 못하면 장기전이 될 겁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스미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이미 그림자를 붙여두었습니다.”
명단을 통해 확인한 누군가에게. 하사신의 가호로 만든 그림자를 붙여 두었다.
이너서클은 혈맹과는 달리 점조직 형태가 아니니까 미끼를 물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 * *
“허억, 헉.”
“최 의원님.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통통한 체격의 의원이 거친 숨을 내뱉자 수행원으로 보이는 헌터가 황급히 달려와 부축했다.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야!”
최 의원이라고 불린 남자가 신경질을 냈다. 차량으로는 이동할 수 없는 산길이었기에 꼬박 2시간을 걸어서 이동했다.
그를 수행하는 헌터들과는 달리 평소 운동조차 게을리 한 최 의원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30분 정도만 더 올라가면 됩니다.”
“허억, 허억.”
거친 숨결을 내뱉으며 발걸음을 옮기는 최 의원. 수행원 4명이 그의 옆에 붙어서 함께 이동했다.
예정대로 30분을 걸어 올라간 곳에는 정원이 붙어 있는 큰 별장이 있었다. 무장한 병력과 헌터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다.
수행원이 무장 경비에게 다가가 신분증을 보여주자 대문이 열렸다. 최 의원은 허겁지겁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허리에 여러 개의 단검을 찬 뱀과 같은 인상의 남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최 의원님. 응접실에서 회원님들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 여기는 안전하겠지?”
“이너서클에서도 고위 간부님들을 제외하면 이곳의 존재를 아는 분들은 없습니다. 그리고 A급 헌터 20명과 B급 헌터 30명, 그리고 C급 헌터가 포함된 무장 경비 20명이 철저하게 별장을 지키고 있으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 그럼 부탁하네…… 나는 응접실로 가야겠어.”
응접실에는 이너서클의 고위 간부 8명이 모여 있었다. 모두 대기업의 회장이거나 정치계에서 이름 높은 국회의원들이었다.
아수라 길드 소속의 간부였던 S급 헌터도 한 명 있었다.
“최 의원 왔습니까?”
“어서 오시지요.”
안으로 들어온 최 의원은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며 의자에 편히 앉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대한민국 장악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던 게 아니었습니까?”
거칠어진 호흡을 진정시키기 무섭게 최 의원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의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누군가 입을 열었다.
“UN이 특수 기관보다 상위에 있는 ‘위원회’라는 혈맹 토벌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정황상 강현준이 한국 위원 중 한 명에 임명된 것 같더군요.”
“강현준이 문제군요. 그를 제거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아시아 관구에 암살자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그동안 자금 지원을 해줬으니 이제 도움을 받을 차례입니다.”
SS급 헌터를 상대하는 건 쉽지 않다.
“암살자가 온다고 해도 군대 단위의 공격이 아니면 SS급 헌터를 죽이는 건 불가능합니다.”
누군가의 말에 또 다른 누군가 벌떡 일어나 성을 냈다.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강현준은 가족처럼 아끼는 고아원 동생들과 누나가 한 명 있다고 합니다.”
소중한 사람을 노려라. 강자를 상대할 때 유용하다. 야비한 방법이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은 그런 거 신경 쓰는 족속들이 아니다.
“강현준의 시선을 돌린 후에, 고아원 애새끼들 잡은 다음에 경고 삼아서 하나 죽이면 순순히 우리 지시에 따를 겁니다. 레이스 길드 사무소 단지가 요새 같다고는 하지만 SS급 헌터를 정면에서 상대하는 것보다는 이게 나을 겁니다.”
그가 말을 끝맺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좋은 방법이요.”
“최대한 잔인하게 죽입시다.”
“좋소!”
의견을 말했던 이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면 당장 동아시아 관구에 병력을 요청…….”
말을 잇지 못했다. 순간 몸이 경직되어 움직이지 않았고 차가운 냉기에 소름이 돋았다.
“모, 몸이…….”
“설마!”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마비라도 된 것 같다. 그건 마침 이 자리에 있던 S급 헌터 또한 마찬가지였다.
“도……망쳐…… 쿨럭!”
S급 헌터가 입 밖으로 붉은 피를 쏟아내며 쓰러졌다. 그리고 그가 서 있던 곳의 뒤에는.
“누구 마음대로?”
SS급 헌터, 강현준이 있었다.